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부산 범일동 학원가에서 공식이를 만난 건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 중의 하나였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에 만난 싸늘한 골목길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가로등이었기 때문이다. 실패와 재수라는 막연한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반 초대형 강의실에 모여든 그 수많은 사연의 재수생들 중에서 그렇게 우리들이 어울리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공식이 그리고 중경이는 참 유별났다. 수업과 공부 사이의 빈 공간을 슬기롭게 잘 활용했다. 범일역 기찻길 계단에서 그리고 광안리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그리고 서면 동보서적 주변 밤거리에서 또 남포동 잡화 거리를 거닐며 종교와 철학을 이야기하고 세상과 사회를 논하고 그렇게 가족관과 인생관을 정립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늦가을 어느 날 MBC 본사에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MBC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니 그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난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낯선 서울 말씨를 들으면서 얼떨떨해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이없는 마음 한 편으로 '아! 어쩌면 공식이가 내 습작시들을 MBC에 보냈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뒤통수를 때렸다. 그리고 몇 시간도 안 돼서 내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젠가 종교에 대해 밤새워 토론을 하다가 내가 건넨 습작시들을 읽어보고는 '이거 신춘문예에 보내야 하는 거 아냐?'라고 혼잣말하듯이 구시렁대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박재삼, 김남조 시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가끔 그때를 회상하면 왜 저리도 은둔형 외톨이 같은 모습으로 시상식에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튼 이 사건으로 공식이는 내 인생에 엄청나게 큰 임팩트를 안겨주었다.
곧이어 대학 원서접수 시기가 왔다. 지원할 대학과 학과에 대해 공식이와 제일 먼저 상의했다. 내가 서울의 유명한 공대에 지원할 예정이라고 하자 공식이는 불길한 표정으로 부산대가 더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나 충고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무슨 귀신이 씌었었는지 끝까지 그 결정을 꺾지 않았다. 결국 또 떨어졌다. 재수를 했는데도 실패한 것이다. 결국 레벨이 떨어지는 후기대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입학식도 하기 전에 음악밴드에 가입하여 1년 내내 헤비메탈 뮤직에 빠져 살았다. 대학생의 가방 속에는 악보와 소주 그리고 새우깡이 전부였다. 그리고 1학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이 되자, 학교로부터 학사경고 2개와 11개의 F학점이 통보되었다. 그 충격적인 경고장들을 받아 든 순간 주저 없이 입대를 결심했다. 그리고 제대 직후부터 매년 계절학기를 등록할 수밖에 없었고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 결과 졸업을 위한 규정 학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 공식이의 의견을 수용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어느새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교 4학년의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공식이와 함께 서면 거리를 활보하면서 세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따금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취업에 대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곤 하다가 영광도서에 앞에 이르렀다. 마치 목적지가 거기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때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 끝에서 앞서갔던 공식이가 빨리 오라며 손발짓을 했다. 달려가 보니, '한국OO 공채시험' 안내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 여기 도전해 봐라. 일과 창작활동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아닐까?'라고 했다.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 공채시험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험일까지 딱 3개월이 남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관련 서적 일체를 구매하고 귀가하는 길에 동네 독서실을 장기 예약했다. 그리고 54세인 지금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 후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아니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신도림역 인근의 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살았다. 그즈음 우리는 결혼을 했고 또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러니 더욱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낼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거의 매 주말마다 여행을 다녔다. 생각은 같았다. 아이들에게 자연과 도시에서 가능한 수많은 직. 간접적인 체험들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도록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친구가 바로 옆에 살고 있다'라는 안정감이었다. 그 후 직장 이직으로 인해 잠시 떨어져 살다가, 다시 15년 전에 분당이라는 신도시에서 다시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삶의 기쁨과 걱정을 공유하고, 맛있는 음식들과 카페를 공유하고 그리고 전동드릴을 공유하고 월드컵 등 스포츠 이벤트를 공유하고 삶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중년이 된 지금은 나의 고향마을을 제 고향인 듯 드나들고, 내 인생의 영원한 아지트가 될 지리산의 담안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함께 구상한다. 아니 어쩌면 여태 함께 일궈 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머지않은 어느 시점에, 그곳에 3개의 소박한 땅콩집을 지어 공식이와 태영이와 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완전히 눌러앉지 않고 가끔씩 세컨드하우스로 활용하더라도 말이다. 이 사회가 내 순수한 마음 위에 조금만 더 깊은 스크래치를 긋는다면 난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한 번밖에 없는 이 축복의 인생을 제대로 누리며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공식이를 생각하면 그러한 노후생활의 안식이나 힐링이 더욱 애달프다. 그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공식이는 인생 자체가 오롯이 '희생'으로 점철된 녀석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한순간의 머뭇거림 없이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하며, 형제자매를 생각하는 마음도 놀랍고 부러울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그러니 함께 살고 있는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가끔씩 그의 집에서 술 한 잔 기울이는 날이면 다음 세상에 그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조카들이 참 맑고 밝다. 이런 상황에서 제수씨에 대해서 언급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세상 여자들이 다 부러워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공식이는 그렇게 늘 희생을 하며 살아왔다. 희생이 습관이며 희생이 취미생활이다. 가족을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그리고 또 사회생활 속의 누군가를 위해 계속해서 희생하고 있다. 그렇게 희생만 하면서 살다 보니 몸을 보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최근에는 몸이 갑자기 좋지 않아 급기야 입원치료까지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소식은 주변에서 희생을 선물 받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암튼 공식이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희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늙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P.S.
광현아!
나는 공식이라는 애칭이 좋아서 그렇게 표현하고 부른다.
"공식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