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24년을 보름 앞두고 한 조직의 리더로 발령을 받았다. 솔직히 얼마 남지 않은 직장 생활에서 이러한 부담스러운 상황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스로 일을 할 때 완벽주의자의 면모가 강하고 또 상당히 센시티브 한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부장으로 승인한 지 9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그런 리더 역할이 내 팔자에 부여되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의 비율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거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축적되고 정립된 가치관에 의해, 수직적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경계해 왔다. 내가 언제 행복해지고 언제 상처받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암튼 이번에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달라진 상황에 대해 뭔가 준비를 해놔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정신적 무장을 하거나 흔들림 없는 내공을 쌓는 일이었다. 그러나 멘탈 트레이닝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게 가능할 거라 바라지도 않았다. 두 번째는 빨리 상황을 인정하고 회사에서의 모드를 변경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1개월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추가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중에서는 즉시적으로 적용 가능한 물리적인 것도 있었다. 그것은 지위에 맞는 풍모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남몰래 인터넷쇼핑몰을 여행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괜찮은 '하프넥 티셔츠'를 찾았다. 아직 상품 후기는 1건도 없었지만 디자인과 컬러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가성비가 참 좋았다. 티셔츠를 주문하자 그제서야 뭔가 준비가 된 듯한 안심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북극 한파에 가까운 추위가 한반도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심리적인 분야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위안을 받는 요인들이 다양한 것 같다. 어떤 이는 헤어숍에 다녀오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등산이나 낚시를 다녀오는 것이 또 어떤 이는 좋은 안주에 낮술을 곁들이는 것이 큰 위안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이 다양하지만 그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유독 마음에 드는 옷을 얻었을 때 얻는 위안은 즉각적으로 반응이 온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애타게 기다리던 티셔츠가 도착을 하지 않는 것이다. 북극 한파가 기승을 부리다가 시베리아 쪽으로 올라간 이후에도 소식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묻고자 판매자에게 채팅 문의를 했다. 그랬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바로 알아보고 조치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택배기사님에게 아무래도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보고 안되면, 오늘 다시 물건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라면서 아주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상황이었지만, 판매자의 대처가 신속 정확하고 그 자세와 마인드가 고객중심적이라 나는 더 이상 불만을 확대할 수 없었다. 이런 분이라면 고객을 상대하는 사업이나 그 어떤 장사도 잘하겠지만,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에서도 훌륭하게 처신하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암튼, 내가 주문한 티셔츠는 일주일 만에 도착했다. 두 번째 택배기사님에게는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도착한 티셔츠를 입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두 번 감탄했다. 한 번은 이 가격에 이렇게 좋은 디자인과 퀄리티의 티셔츠를 만들어 낸 판매자의 감각에 감탄했고, 또 한 번은 그런 훌륭한 물건을 발견한 나의 인터넷쇼핑 노하우에 감탄했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있어 좋다. 세상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그 지루함이 끝이 없다. 그러나 세상이 재밌다고 생각하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도 재미가 넘쳐난다. 일상에서 그런 재미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1층 데스크에서 전화가 왔다. 택배 물건을 보관 중이니 퇴근하면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보통 집 앞에 두고 가는데, 왜 데스크에 맡겼지? 하면서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찾으러 갔더니, 바로 그 행방불명이 되었던 티셔츠가 도착해 있던 것이다. 그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잠시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했을 뿐, 그가 처한 특별한 상황에서 대해 설명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 중복된 티셔츠는 또 어쩌란 말인가?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오늘 드디어 첫 번째 발송한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어떡할까요?'라고 친절한 판매자에게 톡을 보냈다.
"아! 지난번 택배기사의 사적인 상황 때문에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원하신다면 그 추가 티셔츠는 그냥 고객님이 공짜로 입으셔도 됩니다. 대신, 시간 되실 때 리뷰 한건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저야 티셔츠가 마음에 들어서 좋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금액의 반값을 지불하고 제가 입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이번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신 내용을 토대로 제가 가감 없이 포토리뷰를 작성해서 남기겠습니다."
"아!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고요."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네요."
P.S.
그날 저녁 내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산적한 일들을 책상 위에서 다 치워버렸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리뷰를 작성했다. 그리고 티셔츠를 번갈아 입어보며 셀프 촬영했다. 티셔츠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아끼는 재킷들을 다 걸쳐보면서 찍기도 했다. 내가 왜 그렇게 진심을 다할 수 있었을까? 그저 기분이 좋아서다. 아님 진심이 통해서 그런 것이다. 전혀 모르는 판매자이지만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가 잘 되길 바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