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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김치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우리 집 현관문 앞에는 다양한 종류의 택배 상자가 많이 쌓인다. 바야흐로 배달의 민족의 최고 부흥기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택배 상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나를 설레이게 하고 감동시키는 물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김치'다. 그 이유는 내가 여전히 '김치' 없이는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럽식 레스토랑이나 일식집 그리고 베트남/태국 음식집에 가서도 김치를 별도로 요구하거나 주문한다. 더불어 고급스러운 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할 때도 첫 접시에는 김치가 반드시 배치되어야 한다. 나에게 김치는 그 어떤 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이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우리 식구들도 김치 마니아다. 그래서 우리집은 주말마다 활용하는 외식 메뉴를 결정할 때도 크게 이견이 없다. 누군가가 메뉴에 대한 의견을 내면 대부분 그대로 결정된다. 왜냐하면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음식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잘 먹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에 차려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큰 행운인 것이다.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 그리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말이다.




우리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래서 김치냉장고가 두 대다. 그 두 대의 김치냉장고는 거의 사계절 내내 가득 차 있다. 물론 여름에는 과일이나 채소 그리고 술과 생수 일부를 보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간은 김치가 차지한다. 김치의 종류도 다양하다. 묵은김치, 김장김치, 물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고들빼기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겉절이 등 주메뉴에 따라 달리 차려질 수 있는 김치가 준비되어 있다.


얼마 전에는 지방에 사는 지인이 묵은 김치를 가져다가 먹으라고 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지인보다 묵은 김치가 더 반가웠다. 그 묵은김치와 돼지고기 앞다리살 그리고 대파, 표고버섯, 마늘을 결합하면 명품 음식이 탄생한다. 마지막에 들기름 반 스푼을 첨가하면 거의 환상적이다. 일반적으로 김장김치는 보통 수육과 함께 먹으면 잔치음식이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갓 담은 김장김치를 손으로 찢어 잡곡을 곁들이지 않은 흰쌀밥에 올려서 먹는 조합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추가로 수육을 준비하는 것은 김장의 수고를 달래기 위한 술안주일 뿐이다.



물김치는 현대인의 입맛을 살려줄 수 있는 가장 쉬운 소화제이자 치료제이다. 물김치에 밥을 소량만 말아서 마치 마시듯이 먹고 나면, 약 2시간 후에 저절로 되살아난 식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장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식사의 끝에 물 대신에 물김치를 반 공기 정도 마시라고 권하고 싶다. 총각김치는 한마디로 메마른 일상의 흥분제다. 감칠맛이 좔좔 흐르는 자태와 아주 자극적인 오드득 오드득 씹는 소리 그 자체가 주변 사람들마저도 식욕을 돋게 한다. 갓김치는 향기의 음식이다. 그 독특한 향기에 취하기 위해 식사의 중간에 간간히 갓김치를 곁들이면 입안과 내장이 향기로 가득 찬다. 파김치는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반찬이다. 갓 담은 매운 파김치도 그리고 잘 익은 파김치도 더불어 아주 오래 묵은 파김치도 우리의 건강한 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다. 그리고 열무김치는 바쁜 이들을 위한 초간편 건강식이다. 아주 간단하게 맛깔스러운 식사를 원한다면 국수를 한 움큼 삶아서 열무 물김치에 말아서 먹으면 된다. 매콤한 것을 원한다면 열무김치와 고추장, 참기름, 달걀프라이를 쓱쓱 비벼 먹으면 된다. 깍두기는 설렁탕이나 곰탕 혹은 사리곰탕면과 함께 먹으면 다른 반찬을 기웃거리거나 더 훌륭한 조합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들빼기김치는 겨우내 움츠린 몸을 회복시켜 주는 건강보조식품이자 식욕을 부르는 자극제이다. 고들빼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음식이라기보다는 약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김치에 진심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농촌 친화적인 정서를 타고난 것과 김치에 얽힌 어머니의 지극과 정성 탓이 아닐까? 먼저 김치의 주재료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바로 곁에서 보며 자랐으니, 얼마나 그들과 친숙하겠는가? 배추, 무, 파, 갓, 고들빼기 등이 들녘에서 자라나는 과정을 보았으며, 계절에 따라 그 재료들이 순식간에 식탁에 올라오는 그 신선한 마법을 생활 속에서 즐기며 살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찍이 도시로 유학을 가게 되어 부유하게 생활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풍성한 식탁보다는 검소한 반찬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시는 여러 종류의 김치들은 그 모든 빈자리를 풍성하게 채워주고도 남았다. 그런 소소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도시에서 펼쳐지는 나의 식탁에 사계절의 김치들이 떨어지게 않게 해주셨다. 김치를 좋아해서 김치가 맛있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한다며 평생을 집착하셨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어머니의 김치가 도착하지 않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케어를 받으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나는 김치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혹은 어느 가정에서 김치를 안 먹는다고 하거나 혹은 이사 때문에 버리려고 하면 우리집에 버리라고 했다. 물론 모든 김치를 다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김치는 정성과 사랑의 결과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국의 맛있는 김치를 스캔해왔다. 그 결과 시범적으로 소량을 주문해서 먹어보고는 가족 평가단이 모두 동의하면 대량 주문을 한다. 이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치의 종류에 따라 대표 업체가 정해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현관문 앞에 익숙한 박스가 놓여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보아왔던 어머니의 김치박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럴 정도로 그 외관이 비슷했다. 어딘듯 독특한 고향의 향기가 풍기는 듯한 그 박스를 쳐다보고 있으니 반가운 마음과 함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김치를 보낸 주소지도 나의 고향이었으니 말이다. 택배박스를 돌려 보낸 사람 이름을 보고서야 고향 친구의 선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치박스를 열자 온 집안이 고향의 숲 향기와 추수를 마친 들녘의 내음 그리고 고춧대 타는 냄새로 가득 찼다. 아니, 친구의 손향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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