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갈에누운백구 Mar 22. 2022

<팬텀 스레드> 사랑이 영화라면 장르는 무엇일까?

팬텀 하우스의 가족에겐 기이한 능력이 있다. 감각을 증폭해 세상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레이놀즈는 겉모습만 보고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내면의 드레스를 감지해 그것을 몸 밖으로 꺼낼 수 있고, 시릴은 알마와의 첫 만남에서 보여주듯 한 사람이 내뿜는 체취를 하나하나 감지해 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시릴은 그 체취에서 드레스를 뽑아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릴이 세상을 감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세계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마찬가지로 누군가 그녀의 세계에 침범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시릴이 레이놀즈의 예민한 아침식사 시간을 침범하지 않지만 레이놀즈가 예의없는 태도로 그녀의 세계에 침범하는 순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반면 레이놀즈의 예민한 감각은 모두 드레스로 향한다. 그가 뮤즈들에게서 발견하는 특별한 분위기는 그에 맞는 특별한 드레스로 환원되고, 그의 예민한 아침 식사 자리 또한 드레스 디자인으로 환원된다. 어디서든 드레스 실을 뽑아내는 이 축복받은 능력으로 레이놀즈는 예술적 성취를 이뤘고 팬텀 하우스를 일으켰다. 하지만 예술작업에 있어 축복받은 능력은 타인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있어 저주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는 알마의 질문에 “드레스를 만든다”란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레이놀즈는 축복이자 저주인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오직 드레스로 환원되는 한 인간은 드레스에 대한 사랑의 매개체일 뿐 그 자체로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영화에서 레이놀즈는 드레스를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반복해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며 극 중에서 한 번은 사진으로, 한 번은 실재화된 환영으로 두 번 이미지화되는 어머니는 모두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때, 레이놀즈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드레스에 대한 사랑이 병리학적으로 얽혀있다는 정신분석적 관점을 수용한다면 레이놀즈의 사랑관은 하나의 공식으로 쉽게 정리될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드레스에 대한 애착으로 전이되었고, 드레스에 대한 애착이 뮤즈들에 대한 애정으로 변환되어 레이놀즈의 사랑관을 완성한다는 해석. 독버섯을 먹은 레이놀즈에게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환영이 나타날 때 그 옆으로 알마가 겹쳐지는 연출에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드레스에 대한 패티쉬로, 그리고 어머니를 대체할 또 다른 여성 알마로 전이된다는 설명이 깔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이트적 해석을 영화에 대입하기엔 아직 섣부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으로 영화를 설명한다면 알마의 존재가 부차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나레이터는 알마다. 영화를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알마의 역할을 존중한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레이놀즈의 사랑관보다 레이놀즈의 사랑관에 변화를 일으키는 알마의 사랑관이다.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시 레이놀즈의 능력으로 돌아와 보자. 감각을 증폭해 한 사람을 스캔한 후 그에 딱 맞는 드레스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레이놀즈는, 몸을 맡기면 몇 분 안에 체형과 건강상태 그리고 맞춤 식단까지 뽑아내는 의료기구 인바디와 같은 일종의 증폭 기계다. 이때 기계의 성능은 수치를 결과값으로 산출하는 알고리즘의 성능에 달려있다. “키 170cm, 몸무게 65kg, 체지방률 25%인 사람의 단백질 함량은 16%에 가까우며 그에 따라 추천하는 음식은 닭가슴살이다”라고 데이터에 기반한 결과값을 제시하는 증폭 기계에 우리가 올라서는 이유는 그 결과값이 우연에 의한 무작위적 결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증폭 기계에 몸을 맡긴 사람의 믿음은 인쇄된 결과값보다 정확한 수치와 계산을 근거로 한 기계의 알고리즘 능력에 있다. 그것은 드레스를 얻기 위해 레이놀즈에게 몸을 맡기는 고객들의 믿음과 유사하다. 


레이놀즈를 찾아오는 귀족들, 헨리에타 하딩, 로즈 부인, 벨기에 공주는 레이놀즈에게 따로 자신의 취향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저 가만히 서서 자신의 치수를 재공할 뿐이고 레이놀즈가 완성해 낸 드레스를 입을 뿐이다. 거기엔 레이놀즈가 추출해낸 드레스는 언제나 옳다는 강력한 믿음이 전제돼 있다. 레이놀즈가 만들어내는 드레스는 한 사람이 가진 최고의 아름다움을 원단의 색과 주름으로 형상화한 결과이고, 따라서 그의 드레스 안에 들어간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믿음. 언제나 완벽한 그의 드레스에 문제가 있다면 드레스 사이로 살이 비어져 나오는 헨리에타 하딩의 못생긴 몸과 완벽한 드레스를 소화할 수 없는 로즈 부인의 못생긴 얼굴이다. 문제는 개인의 오류에서 발생할 뿐 그가 추출해낸 드레스엔 아무 문제가 없음을 헨리에타와 로즈 또한 인정하기에 레이놀즈의 드레스와 재단사로서의 그의 삶은 더욱 완벽해진다. 하지만 그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 사람, 알마가 등장하며 레이놀즈라는 완벽한 기계에 결함이 생기기 시작한다. 


레이놀즈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완벽하게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정의는 개인의 조건에 영향받지 않으며 언제나 변치 않는 불변의 가치를 지닌다. 헨리에타 하딩이 유행에 맞춘 패션과 스타일에 맞는(chic) 옷을 입기 위해 의상실을 옮겼다는 말을 듣곤 레이놀즈가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는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유행에 따라 변하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chic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소리치는 레이놀즈에게 드레스를 제작하는 일은 아름다움이란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가는 정밀한 세공 작업과 같다. 원석 안에 숨은 보석의 아름다움을 정해진 길을 따라 재단함으로써 밖으로 드러내는 세공 작업. 


전쟁 때 얻은 벨기에 손뜨개 레이스를 알마의 드레스로 재단하는 장면은 세공사이자 재단사인 레이놀즈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아름다운 손뜨개 레이스는 미완성 상태의 원단으로, 레이스의 존재 목적은 드레스로 변환되는 것이다. 드레스가 되지 못한 레이스는 그에게 더 이상 드레스에 대한 영감을 불어 넣어주지 못하는 철 지난 뮤즈의 존재와 같고, 드레스로 변환되지 못하는 존재는 그에게 쓸모없는 존재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레이스의 본질, 아름다움의 본질을 찾아다니는 그에게 한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가 본질을 찾기 위해 언제나 매개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레이스를 드레스로 변환하지 못한 이유가 레이스를 드레스로 변환하는 공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아름다움의 본질을 속에 간직한 뮤즈를 통해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레이놀즈는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알마 앞에 속수무책이 된다. 


도출해낸 결과값이 근거가 없으며 무작위적인 결과의 나열이었음이 밝혀진 증폭 기계는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알마가 행하는 것은 모든 것을 드레스로 환원하는 레이놀즈의 알고리즘에 결함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정의를 내리고 정답을 발굴하는 레이놀즈의 알고리즘은 드레스를 만들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팬텀 하우스엔 그가 내린 정의들로 가득 차 있다. 빵에 버터를 바르는 소리는 과한 소음이고, 아스파라거스를 버터에 조리는 것은 너무 느끼한 것이다. 평소처럼(normally) 서 있는 것은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것이며, 그가 선택한 원단은 예쁜 것이다. 그가 내린 정의에 근거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 정의에 말없이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알마는 그것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다. 그녀는 레이놀즈가 “과하다”라고 말한 것이 그저“ 빵에 버터를 바르는 행동일 뿐”이라고 정확히 짚는다.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것은 “평소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서 있는 것이라고 정정하고, 레이놀즈가 고른 원단 자체가 별로이기 때문에 드레스가 예쁠 수 없다는 의견을 거침없이 내놓는다. 알마에게 팬텀 하우스란 사랑의 공간이지, 사랑을 드레스로 환원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알마에게 사랑은 하나의 정답을 도출해내는 재단 작업이 아니다. 


레이놀즈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그의 세계관을 지탱하는 기둥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임을 암시할 때, 그래서 알마 또한 어머니의 분신으로 환원될 처지에 놓여있을 때 이 영화를 정신분석학적 틀에서 재단하고자 마음먹은 관객은 알마가 독버섯 차를 내놓는 순간 레이놀즈처럼 앓게 된다. 알마는 무조건적 사랑을 행하는 어머니,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렇게 어머니라는 단어에 달라붙어 있는 관념에 죽음을 선사하는 최초의 사랑이 된다. 더 이상 어머니로, 드레스로 환원되지 않는 알마는 둘의 존재만으로 완결되는 사랑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알마가 독버섯 차를 내놓으며 새삼 환기되는 사실은 알마가 사랑의 문법을 놓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레이놀즈가 정한 팬텀 하우스의 규칙에 따라 더 이상 빵에 버터를 소리나게 바르지 않을 때에도, 레이놀즈의 가치관에 따라 드레스의 아름다움에 어울리지 않는 로즈 부인의 몸을 드레스로부터 벗겨낼 때에도 알마는 레이놀즈의 세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그녀의 사랑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관점에서 그녀는 레이놀즈의 세계에 흡수된 꼭두각시가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레이놀즈의 세계를 흡수한 주인적 위치에 가까워진다. 알마가 독버섯을 꺼내들기 전까지 그녀의 행동에서 레이놀즈의 그림자를 더욱 크게 느꼈다면 우리 또한 레이놀즈의 세계에 압도돼 알마의 세계를 과소평가한 탓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버섯을 먹기 전까지 알마를 다른 뮤즈들과 똑같이 과소평가한 레이놀즈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PTA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구조, 서로를 야욕하는 두 사람 사이의 권력 관계는 <팬텀 스레드>에 와서 한층 복잡해진다. 알마는 레이놀즈와 권력 게임을 벌임과 동시에 관객과의 게임을 진행한다. 레이놀즈가 정의내리는 영화의 분위기와 장르에 발맞춰 따라가던 관객은 어느 순간 영화의 주인공이 알마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은 레이놀즈가 자신의 세계의 주인이 알마였음을 깨닫는 때와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사랑의 순간과도 비슷하다. 두 세계관이 만나고 충돌하며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에 굴복하길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의 세계에 서로가 투신해서 처음에 존재하던 두 세계관의 정의부터 모호해지는. 


영화의 장르는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그것은 영화의 테마곡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초반 레이놀즈가 거울 앞에서 얼굴을 단장할 때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곡 <House of Woodcock>은 영화의 막바지 알마가 레이놀즈와의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장면에 그대로 삽입된다. 똑같은 피아노 선율은 어느새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 레이놀즈와 팬텀 하우스의 우아함과 단정함을 정돈된 느낌으로 표현하던 테마곡은 기묘하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알마와 레이놀즈의 꿈같은 사랑의 순간을 따뜻하게 감싼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씬. 알마가 처음 팬텀 하우스에 들어와 레이놀즈와 달빛 아래서 드레스를 재단하던 순간은 완전한 사랑의 순간으로 변모해있다. 무릎을 꿇고 알마의 드레스를 재단하는 레이놀즈와 가만히 서 있는 알마. 이제 그곳엔 어머니도 없고 뮤즈도 없으며 드레스를 치장하는 색색의 원단이나 레이스도 없이 오직 알마와 레이놀즈만이 자리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T_XjcdgT6g

매거진의 이전글 장르를 변속해 시간을 달리는<드라이브 마이 카>의 매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