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근심 걱정이 있을 때 바다를 찾곤 한다. 끝없이 너울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답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것은 정답을 전해주는 바다의 현묘함 때문이라기보다 정답을 찾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는 바다의 무관심 때문일 것이다. <애틀랜틱스>의 바다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 영화의 바다는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그렇게 <애틀랜틱스>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바다 이미지를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미스터리는 풀리고 주인공 아다는 한 단계 성장해 있다.
나는 <애틀랜틱스>에 나타나는 바다 이미지의 변화를 통해 이 영화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로맨스와 오컬트, 추리극의 장르경계를 넘나드는 <애틀랜틱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면 바다이고, 그것을 축으로 영화의 서사가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세네갈 다카르에 사는 건설 노동자 청년들은 3개월 동안이나 임금을 받지 못해 일자리를 찾아 스페인으로 떠난다. 바닷길도 모른 채 무작정 떠난 항해에서 청년들은 거센 파도를 만나 모두 죽고 그 영혼은 마을에 남은 젊은 여자들의 몸에 깃든다. 남자들의 혼에 빙의된 여자들은 죽은 남자들을 대신해 임금을 체불한 자본가에게 복수한다.
슐레르만과 아다의 사랑 이야기와 경찰의 방화범 추적 이야기를 줄거리에 추가한다고 해도 영화의 서사엔 빈 곳이 많다. 망자의 영혼이 빙의되는 오컬트적 설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렇다. 모든 죽은 남자들이 마을의 여자에게 빙의돼 자본가를 찾아갈 때 슐레르만이 경찰 이사에게 빙의돼 아다에게 찾아가는 설정도 서사의 일관성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애틀랜틱스>는 그러나, 일관되게 삽입되는 바다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이야기의 선명함을 되찾는다. 변화하는 바다 이미지는 수수께끼의 해답을 전해주려는 듯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제 나라에서 임금을 받지 못해 다른 나라로 떠난 난민 신세의 청년들을 하릴없이 집어삼키는 세상사에 무관심한 바다는 영화의 서사를 만나 형태가 바뀌고 색이 입혀진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에서 처음 묘사되는 바다의 이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임금을 받지 못한 청년들이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롱테이크에서 교차 편집되는 바다의 색은 회색이다. 희뿌연 배경에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는 마을의 남자들이 부조리한 삶의 고뇌를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를 때에도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바다만을 바라보는 슐레르만의 모습과 겹쳐진다. 어떤 위로도 전해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무심하게 파도치는 바다는 어떠한 관심도 없이 다카르 청년들을 죽음의 바다로 밀어내는 부조리한 세네갈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어떠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어 그저 노래를 부르며 스페인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다카르의 남자들에게 세네갈 사회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자연 바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질식당해가던 다카르 청년들의 삶이 대서양의 파도에 질식당해 종결되는 서사는 비유적이다. 그러나 청년들을 삼킨 바다는 이제 더 이상 무관심한 침묵으로, 추상성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희뿌옇게 파도치던 바다는 형태를 바꾸고 색을 입는다. 그것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 인생이 핀다고 말하던 수동적인 다카르의 여자들이 거리로 나서 자본가를 찾아가는 변화만큼이나 극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서사 상으로 보면 동네 여자들이 남자들의 영혼에 빙의돼 뿌연 눈을 한 채 사장의 집에 찾아가는 장면이지만 그보다 더 극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것은 오마르의 수영장에서 결혼식 장면으로 이동하는 숏 사이에 등장하는 바다 장면이다. 마치 고정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청녹색 바다 위에 삽입되는 전자음악은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를 틀어놓은 듯한 신경을 긁는 음들의 조합이다. 죽음처럼 멈춰있는 바다를 배경으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음조는 망자들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하긴 직전에 등장한 오마르의 야외 수영장 숏을 보고도 망자들, 특히 슐레르만이 울부짖지 않기는 힘들다. 오마르의 수영장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온화한 너울거림 속에서 노을빛에 아름답게 젖어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날엔 아다와 오마르의 결혼식이 있다. 한 명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에 침잠해 갈 때 한 명은 노을 지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가하게 수영하는 아이러니. 움직이지 않는 잔잔한 바다와 신경을 자극하는 알 수 없는 음들의 불협화음은 수많은 오마르와 슐레르만을 만들어내는 세네갈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드러내는 묵시록이 된다.
이제 영화는 거침없이 나아간다. 오마르의 결혼식장은 화재로 아수라장이 되고 그가 아내를 위해 준비한 고급 침대는 친구들의 허세용 사진을 위해 쓰인 뒤 그대로 불탄다. 마을 남자들에게 빙의된 여자들은 악덕 사장의 집에 찾아가 체납금액을 요구하고 그의 집을 불태운다. 이때 우리는 남자들에게 빙의된 여자들이 나타나면서부터 영화에 바다 이미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자들에게 빙의된 남자들이 클럽에 모여앉아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 밝힐 때까지 바다 이미지는 삽입되지 않는다. 부조리 앞에서도 세상사에 무관심한 자연인 양 행세하는 타락한 공권력과 공고히 자리잡은 자본가의 착취 앞에 마을의 여자들이 스스로 파도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감독은 영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세상 앞에 초연한 자연이 계급도 성별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는 듯 보여도 바닷가에 수영장을 건설할 수 있는 사람과 일자리를 찾아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차별이다.
말하자면 <애틀랜틱스>의 바다는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서민들의 부조리한 삶에 어떠한 관심도 없는 세네갈 사회를 빗대고 있는 듯하다. 슐레르만이 빙의하는 존재를 경찰로 설정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슐레르만을 제외한 나머지 남성 청년들은 자본가를 찾아가는 반면 슐레르만은 혼자 떨어져 나와 경찰에 빙의돼 아다를 찾아나선다. 슐레르만에겐 아다에게 사랑을 고백해야한다는 개인적인 목표도 있지만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만큼 그들 뒤를 봐주는 공권력의 타락을 고발해야 하는 공적인 목표 또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공권력이 결합해 체계화한 권력 구조는 슐레르만이 바다에서 발견한 거대한 산처럼 공고해서 어느 한쪽만 건드려서 해결될 수 없다. 이사에게 빙의한 슐레르만은 오마르의 집에 불을 지른다. 그리고 오마르 집에 불을 지른 범인이 자신임을 안 이사는 자신을 기소할 수 있는 증거물을 스스로 제출해야 한다. 비유적인 방식이지만, 영화는 이사를 통해 세네갈 사회를 병들게 하는 공권력의 타락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애틀랜틱스>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서사의 개연성보다는 상징적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말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유나 상징 같아 보이는 사회의 부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하는 힘이고 그것을 포착하는 방법은 그것과 같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서사의 개연성을 넘어, <애틀랜틱스>가 품고 있는 이미지들의 연계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로 사용되는 ‘무단침입’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애틀랜틱스>는 ‘무단침입’의 이미지를 여러 형태로 변형해 세네갈 사회를 통찰한다. 죽은 남성은 마을에 남은 여성의 몸에 무단침입하며 빙의된 여성들은 자본가의 집에 무단침입한다. 극 초반, 슐레르만과 아다가 키스를 하는 순간 건물의 관리인은 무단침입을 이유로 이들을 쫓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청년이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해 타국으로 떠나야 하고 그로 인해 청춘의 평범한 사랑마저 이룰 수 없도록 사회가 자행하는 일상의 무단침입은 아무 곳에도 토로할 수 없다. 일상의 평범함에 묻어 들어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소리 없이 무너뜨리는 사회의 부조리는 언제나 똑같이 해안가에 들이치는 파도의 형태와 색을 바꿔 서사 속에 무단침입 시키는 영화적 효과로 그 실체를 명백히 드러낸다. 빙의, 무단침입, 바다 이미지 등으로 나타나는 <애틀랜틱스>의 비유와 상징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느낌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자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다카르의 청년들은 노래를 부르며 해외로 떠나거나 돈 많은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가는 꿈을 꾸면서 부조리한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던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그들은 색을 바꾼 바다처럼,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선다. 자본가가 죽은 청년들의 무덤을 파고 이사가 슐레르만의 영혼으로 아다를 만난 뒤 자신을 고발하는 증거물을 서장에게 제출하고 나면 <애틀랜틱스>의 바다는 잔잔한 붉은빛이다. 그 위엔 신경을 자극하는 이상한 음조들 대신 슐레이만과 아다의 나레이션이 자리한다. 서로의 안에 서로가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나레이션은 세네갈의 미래를 이끌어갈 힘을 결의와 연대에서 찾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가 보인다. 그것은 무관심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자연에 색을 입히고 음악을 입혀서라도, 망자의 혼을 데려와 초현실적 연대를 이뤄서라도 부조리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은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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