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비아스키가 지구로 돌진하는 혜성을 발견하곤 민디 박사와 함께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장면까진 재난 영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영화는 할리우드 블랙 코미디의 공식을 따른다. 돈룩업이 주목하는 재난은 재난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 속 정치 상황이다. 말하자면 돈룩업은 정치 재난을 풍자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블랙 코미디 쇼의 영화적 버전이다.
색색이 표기되는 오프닝 크레딧의 텍스트는 영상 못지 않은 볼거리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티모시 살라메, 아리아나 그란데, 메릴 스트립, 조나 힐, 케이트 블란쳇... 영상이 삽입되지 않은 검정 화면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거대한 이름들은 텍스트만으로 화려하다. 2시간 20분을 화려한 편집과 배우들의 연기로 가득 채우는 영화는 snl의 재미요소를 그대로 따라간다. 변화를 향한 호소보다 무거운 현실의 스트레스를 화려한 볼거리와 웃음으로 날려버리는 팝콘 무비.
팝콘 무비의 조건은 선명하게 대상화되는 타자이다. 그 대상을 물리적으로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관객은 희열을 느낄 수 있다. 마블 영화가 대표적이다. 마블의 어벤져스와 돈룩업을 비교해보자. 화려한 캐스팅 이외에도 많은 부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두 영화는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거나 인류의 절반이 스냅 한번에 사라지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드는 극단적 상황이 설정되면 전개는 탄력을 받는다. 비상식적인 악의 세력에 맞서 그들의 의도가 현실화 되는 것을 모든 수를 써서 막는 것이다. 주인공이 고군분투할수록 상대의 존재는 선명해진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선악의 구분이 현대의 관객들을 만족시키지 못함을 잘 알고있는 할리우드는 악에도 근거를 마련한다. 타노스가 인류의 절반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의 무분별한 자원의 낭비로 인류 전체가 멸망하기 전에 균형을 찾기 위함이다. 하지만 코믹스 원작에서의 설명은 영화와 다르다. 원작에서 타노스는 죽음의 여신 레이디 데스의 사랑을 얻기위해 무차별적인 살인을 한다. 균형은 부차적 문제로 그려진다. 이때 주목할 지점은 타노스의 동기를 다르게 설정한 것에 대한 감독 조 루소와 앤서니 루소의 설명이다. 레이디 데스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려면 그 “캐릭터의 뒷 이야기, 타노스와의 관계, 다른 캐릭터와 만나는 계기 등을 넣어야 하기에” 이야기 전개가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원작을 각색했다고 감독은 밝힌다. 죽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류의 절반을 제거한다는 설정보다는 자멸해가는 인간 사회의 균형을 위해 인류의 절반을 제거한다는 설명이 확실히 더 간결하고 명확해보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타노스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보다 그런 행동을 행하는 모습과 그 행동을 억제하는 영웅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혜성충돌은 저지되어야한다"는 서사의 진행을 위한 정언명령이다. 돈룩업이 환경오염과 혐오에 기반한 양극화로 자멸해가는 인간 사회를 혜성충돌이란 극단적 상황을 설정해 풍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혜성충돌이란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전제는 캐릭터의 행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중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혜성의 부산물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혜성 충돌을 방치하는 캐릭터는 혜성 충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과 대비되며 선명한 풍자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환경오염과 같이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의 문제는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 사회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획된 시간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돈룩업을 보는 관객이라면 어벤져스를 보는 관객과 같이 누구나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하고,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명확한 사회 문제는 웃음의 시간을 규격화한다. 혜성 충돌만큼 저지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확실히 내려진 환경 오염이란 주제는 그에 반하는 이를 단번에 풍자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풍자의 대상과 상황이 빠르게 정리된 뒤엔 계산된 시간에 맞춰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다.
돈룩업이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을 따지는 사회상과 정치인들을 풍자하고 있음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14일 후면 디비아스키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는데도 대통령은 중간 선거와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갖고, 대기업 회장 피터는 혜성을 하나의 자본으로 생각한다. 아마존이나 구글, 삼성과 함께하며 트럼프 시대를 거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다. 실제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대통령은 많은 부분에서 트럼프를 연상시키며 마크 라일런스가 연기한 피터는 외모부터 애플의 팀 쿡을 연상시킨다. 돈룩업을 외치는 전당대회는 트럼프의 전당대회를 그대로 풍자하기도 한다.
풍자의 대상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 웃음은 보장된다. 하지만 관객이 풍자의 대상을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통찰력 덕분이 아니다. 관객은 자신이 풍자의 대상과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그것에 거리를 둔 채 관망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조종된다.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 속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관객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때까지 지시는 계속된다.
영화에서 화려한 캐스팅 다음으로 돋보이는 화려한 편집을 생각해보자. 한 장면은 다음 장면과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붙고 떨어진다.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 장면이 대표적이다. 디비아스키 혜성을 처리할 위성을 쏘아올리는 연설장면은 대통령 집무실에서의 뒷이야기,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보는 tv중계화면과 교차 편집된다. 대국민 연설장면에서 메릴 스트립의 대사는 오직 정치인의 위선을 보여주는 풍자의 장치로써 의미를 가지며 그 때문에 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 뒤로 붙는 지시적 장면들이다. 겉과 속이 다른 정치인의 위선은 진실의 내막을 알고 있는 집무실의 사람들과 그 사실을 모르는 일반국민의 대비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대통령을 찍는 카메라, 카메라가 송출하는 tv화면, 그것을 보는 일반국민들로 차례차례 이동하는 편집은 결국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는 영화관객의 존재로 완성된다. 명확한 대비 속에서 관객은 풍자의 대상을 정확히 찾아낸다. 하지만 대상을 추척하도록 철저히 계산된 블랙 코미디의 공식에 대입되는 것은 결국 관객이다.
인물들이 대사를 채 다 끝내지 못하고 다음 장면에 의해 대체되는 편집을 생각해보자. 돈룩업의 인물들과 그들의 대사는 대부분 그렇게 편집된다. 돈룩업의 편집이 인물의 대사를 모두 활용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컷 편집을 해가며 숨 가쁘게 이어지는 이유는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완벽한 공식을 위해 최대한 많은 상수값을 지시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상수값은 현실 세계다. 코로나 문제, 환경 문제 등 부조리한 현실의 레퍼런스를 아무리 많이 넣어도 사라지지 않는 어리숙한 관객에 대한 불안은 2시간 20분이란 러닝타임을 필요로 한다. 혹시 관객이 이 풍자를 알아채지 못하진 않을까.
디비아스키가 영화를 가득 채우는 풍자적 상황들을 뒤끝 없이 수월히 넘기는데도 유독 장군이 과자값을 받아간 것에는 반복해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군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피터의 비이성적인 행동과 그런 행동으로 그들이 얻게 되는 이익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해명될 때 디비아스키는 마음놓고 그들을 비웃을 수 있다. 하지만 도무지 그 이익이 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장군의 기이한 행동에 디비아스키는 소리를 지르며 화낼 수도, 소리를 내며 크게 웃을 수도 없이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상황을 곱씹어야한다. 그것은 미국식 블랙 코미디로 관객을 쉼 없이 웃게 만들어야 하는 감독에게 불행이다. 관객은 웃어야 한다. 디비아스키는 결국 그것이 장군의 권력게임이었음을 깨닫곤 웃는다. 돈룩업에서 웃음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무리하지 못한 웃음은 쿠키영상을 동원해서라도 끝까지 추적해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앤딩크레딧까지 풍자는 이어진다. 우주공간엔 다이어트 앱이 설치된 핸드폰, 월스트리트의 황소동상, 대통령과 그 아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떠다닌다. 감독은 영화 내내 우주공간으로 나서길 꿈꿨을 것이다. 그곳에서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어떤 전후관계도 없이 오직 풍자와 재미만을 위해 뜬금없이 등장한다. 사실 그것은 지구에서도 이뤄지던 일이다.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패러디한 장면 속에 부유하며 풍자를 위해 소비된다. 과자값을 받아간 장군이 그 후에 다시 등장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