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갈에누운백구 Oct 28. 2022

B루한 이들을 위한 B급 판타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리뷰

가장 판타지적인 이야기로 이토록 현실적인 위안을 주는 영화라니. 눈과 귀는 시종일관 정신없고 시끄러운 와중에 마음은 곳곳에서 울컥했다.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이 기묘한 괴리감에 대해 말하고 싶어 글을 썼다.     


영화를 말하기에 앞서 지금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한 세계를 상상해보자.     


한 커플이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마주 앉아있다. 한쪽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금세 무거워진다. “우리,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처음부터 하나의 정답을 바라지 않는 이 무거운 질문의 답은 침묵일 때가 많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비극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곱씹다 보면 이미 대답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있다. 그 숨 막히는 시간 끝엔 하나의 결과가 남아있기 마련이다. “우리 그냥 그만하자”     


연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족 간에도, 자신과의 대화에서도 우리는 이런 흐름을 적잖케 마주한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로 시작해서 이내 “그만하자”(또는 nothing matters)로 끝나버리는 허무한 결말. 사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끝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머리를 물어뜯으면 또 하나의 머리가 솟아나는 히드라처럼 이런 질문은 답을 할수록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결국 자기 머리에 휘감겨 질식해버릴 때까지 서로를 몰아넣기 때문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두 문장으로 두 번 끝나버린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간다. 영화의 신나고 경쾌한 리듬이 어딘가 찡하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현실적인 이유로 매번 중도에 포기하는 지점을 영화가 끝까지 도달해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어긋나버려 돌이키기 힘든 관계에서도 상대, 그리고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는 항상 꿈꾸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도대체 에블린 가족은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에블린이 생활력 부족한 남편을 따라나섰을 때? 말 안 듣는 딸을 낳았을 때? 늙은 아버지를 미국에 데려왔을 때? 영화는 문제의 모든 순간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결심한 듯하다. 관객은 멀티버스를 통해 에블린의 모든 삶과 문제의 순간들을 따라간다. 탄생의 순간부터 출산의 순간, 피자집 알바의 순간까지 문제의 순간마다 파생된 멀티버스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에블린이 미국에 처음 도착해 생활비를 벌기 위해 피자 간판 돌리기 알바를 했어야 했는지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에블린의 삶의 굴곡마다 이야기들은 켜켜이 쌓여있다.     


여기서 잠깐 또 하나의 멀티버스를 상상해보자. 우리가 앞에서 본, 단 두마디로 이별을 맞이한 커플이라면 영화를 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하나하나 함께 되짚어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모든 오해를 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는 너무 많은 문제로 시끄러운 머릿속과 현실의 적막한 침묵 사이의 간극에서 파국을 맞이했던 커플의 후회에 응답한다. 파트 1 <에브리씽>은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란 질문에 생각나는 모든 답을 해보는 시간이다. 머릿속 시끄러운 생각들과 현실의 적막한 침묵 사이의 데시벨 맞추기 작업. 거실에서 조용히 영수증을 정리하는 에블린의 모습 위로 ‘파트 1, <에브리씽>‘이란 자막이 등장하고 그와 함께 울리는 요란한 배경음악은 문제를 끝까지 따라가보겠다는 영화의 의지를 알린다.     



삶의 잡음들      


거창하게 출발했지만 사실 문제의 순간을 되짚는 것은 쌓인 영수증을 처리하는 일만큼 귀찮고 좀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비극의 순간 중에서도 영화가 가장 먼저 지목하는 에블린 가족의 문제는 사소해보이는 가라오케다. 한밤중 가라오케 앞에서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에블린 가족은 다음 순간 세탁소 사업권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다. 세탁소 운영과 상관없는 가라오케 영수증이 세금공제에 잘못 사용됐기 때문이다. 세탁소 가게의 지출 목록에 끼어든 가라오케 영수증은 에블린의 삶에 끼어든 웨이먼드와 딸 그리고 늙은 아버지의 존재와 겹쳐 보인다. 평탄한 삶을 흔들어놓는 삶의 잡음들. 그런 잡음들의 잔인한 점은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영수증이 세탁소 지출 목록에 끼어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처음부터 가라오케를 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더욱 처음부터 세탁소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웨이먼드를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가라오케 영수증이 문제가 되는 시점에서 에블린은 알파 웨이먼드를 만나 멀티버스 모험을 시작한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감당하기 힘든 잡음을 만났을 때 멀티버스 회로를 돌리곤 한다. 

“만약에 그 선택을 안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세탁소 가게의 지출 목록에 끼어든 가라오케 영수증과 에블린의 삶에 끼어든 웨이먼드 사이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가라오케 영수증의 경우 “6시까지 지출내역을 다시 정리해 오라”는 명확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이 다시금 주어진다는 것이다.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처럼 보이는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는 이제 영화 밖에서 또 하나의 버스점프를 시도한다. 영수증 더미에서 한 사람의 모든 인생 굴곡을 보는 디어드리는 에블린의 영수증을 보고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녀는 에블린 삶의 어느 부분까지 보았던 걸까. 그녀가 가라오케 영수증에서 한밤중 에블린 가족의 화합을 위한 노력을 보고, 다음날 다시 멀어진 에블린 가족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에블린 가족의 불행을 짚어가다가 어느새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에 와 별 볼일 없는 세탁소 사업을 하는 에블린의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았더라도 그녀가 내놓는 해결책은 6시까지 영수증을 다시 정리해 오라는 것이다. 그녀는 너무 깊게 문제를 파고 들어가 감당 불가능한 비극의 심연을 보고 할 말을 잃고 자리를 뜨는 사람이 아니다. 디어드리의 진정한 능력은 수많은 영수증 더미에서 한 사람의 인생 굴곡을 보는 것이라기보다, 굴곡들을 받아들여 적당한 선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띵 매러스'의 절벽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디어드리의 반대편엔 언제나 거대한 문제에 집착하는 알파 웨이먼드가 있다. 조부 투파키와 알파 웨이먼드는 모두 나띵 매러스(nothing matters)란 단어로 삶을 일축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멀티버스계의 기득권층인 알파버스 일행의 목표는 절대 악으로 상정된 조부 투파키를 제거하는 것이다. 가라오케 영수증, 이혼 서류 따위는 이들에게 너무나 사소한 문제다. 세계의 운명을 지켜내야한다는 ‘빅 워드’를 끊임없이 남발하는 이들은 에블린 일상의 크고 작은 굴곡들엔 전혀 관심이 없다. 에블린의 삶의 굴곡마다 가지쳐 뻗어나간 멀티버스는 알파버스 일행에겐 특별한 능력을 빌려올 수 있는 임시 팝업 스토어에 불과하다.


만약 조부 투파키를 제거하는 미션을 완료하더라도 영원히 안고가야 할 딸의 부재는 에블린의 삶에 가장 커다란 비극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조부 투바키만 제거하면 세상의 모든 혼란이 사라질 것처럼 행동하는 알파버스 일행은 블랙 베이글 속으로 도피하면 삶의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조부 투파키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삶의 불안과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외부 대상의 파괴 또는 자기파괴의 극단적 해결책을 따른다는 점에서 이 둘은 에블린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     



문제적 순간이었던 디어드리와의 만남이 기회의 전환점이 되고, 행운처럼 보였던 알파 웨이먼드와의 만남이 에블린의 삶에 가장 큰 위험이 되는 순간 에블린의 문제적 순간을 모두 따라가 보겠다는 파트 1의 거창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지금의 문제적 순간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른 의미가 된다면,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란 질문에 지금 답변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짚어가며 시끄럽게 떠들던 입은 이제 다시 적막해진다.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를 따라 절벽 위의 돌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시간이 다 흘러가도록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모든 순간이 문제가 될 수 있고 모든 문제가 다시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 된다면 삶의 문제들을 부여잡고 쓸데없이 낑낑대기보다 모든 시간이 다 지나간 뒤 시간의 벽에 등을 기대고 삶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 시간이 오면 더 이상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금도, 영수증도, 가족도, 친구도, 세계도, 나 자신도.      



B루한 사람들의 B급 액션씬     


모든 문제적 시간을 지나온 뒤에야 에블린은 질문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란 질문은 삶에서 문제적 순간을 모두 소거하고 나면 다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란 믿음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문제로 이뤄져 있다면, 삶에서 문제들을 소거하면 삶 자체가 지워진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를 찾을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지’를 고민해야한다.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핫도그 손가락이 아니라 내 몸의 일부인 핫도그 손가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히 슬퍼하는 어리석음이니까.     



‘다정함의 액션씬’이 그토록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이미 각자의 비루한 문제들을 안고 사는 인물들이 치유되는 과정이 너무나 소소했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자에겐 수류탄 대신 아내의 향을 담은 향수를, 마조히즘적 이상성욕을 안고 사는 남자에게는 간단한 터치를, 라쿤쿠니를 잃어버려 슬픔에 잠긴 요리사에게는 자신이 직접 라쿤쿠니가 되어 위로하는 장면. 그 위엔 손가락 핫도그와 자신의 삶에 무력감을 느끼는 상대를 위해 발가락으로 연주해주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다. ‘다정함의 액션씬’엔 삶의 비루함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두 사람이 있다. 남들에게 쉽사리 말할 수 없는 볼품없는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 한 사람과 상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진 못하지만 현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상대를 생각해주는 한 사람. ‘다정함의 액션씬’은 상대의 비루함을 이해하는 마음과 자신의 비루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름답게 합을 이루고 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가방 위에, 돌 위에 가짜 눈알을 붙이는 것뿐이라도, 그것으로 누군가의 삶의 짐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대로 충분하다는 다정한 위로에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현실의 굴레 위에서 벌어지는 비루한 두 사람의 B급 액션씬은 너무나 소소해서 사랑스러웠고 너무나 현실적인 해답이라 울컥했다.     


우리는 항상 꿈꾼다. 내 삶을 지겹게 따라다니는 묵은 문제들을 속 시원히 해결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년간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시험을 준비하기 전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고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대화가 단절된 가족관계에서 다시 화목했던 때로 돌아가 새롭게 출발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이미 벌어져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문제 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에블린이 영수증을 정리하는 장면으로 돌아와 파트 3, <올 앳 원스> 자막이 올라가면 주변엔 백색잡음이 잔잔히 깔려있다. 에블린은 앞으로도 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테고 조이와의 의견 차이로 다툴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또다시 화해하고 국세청 직원들과 부대끼며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그 안에서 벌어질 사랑스러운 B급 액션씬은 영화 밖으로 나와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zxsTXNmVm0&ab_channel=A24MUSIC

매거진의 이전글 <1917>, 또 하나의 전쟁: 서사와 형식의 대치구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