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TV를 보며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있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고립된 하루를 보내며 소파에 파묻혀 누워 있거나, 혼술을 곁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 더욱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마치 심연에 깊게 가라앉은 것처럼 몸과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쯤 되면 마음 한구석에서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 습관의 시작은 대학 시절이었다. 시험 기간 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마지막 시험이 끝나면, 마치 보상이라도 받듯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기숙사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온전히 쉬고 나서야, 다른 무언가를 할 힘이 생겼다. 더는 누워있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몸이 찌뿌둥해질 때쯤, 동굴 속에서 빠져나왔다. 친구들은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꼭 필요했다.
이 습관은 사회에 나와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이어졌다. 업무가 과중했거나 사람들에게 치인 날이면, 집에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TV나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활동량은 줄고, 고립된 시간은 늘어만 갔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속에서 자책감만 커져갔다.
물론 혼자 보내는 시간 자체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무한정 길어지면 오히려 독이 된다. 무기력해진 자신과 마주할 때면 한심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그 감정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스스로를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러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그 나락에서 자의적으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때 마주한 문장이 있다.
배측 선조체에 새겨지는 패턴에 관해 이해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일단 생겨난 패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한번 익히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나쁜 습관을 고치기가 몹시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오래된 습관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저 더 강력한 새 습관을 들이면 예전 습관이 약해지는 것뿐이다. 게다가 습관이 일단 배측 선조체에 자리 잡으면 그때부터는 쾌락에 관심도 두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 습관이 생기는 이유는 대개 측좌핵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지만, 일단 습관 이 생긴 뒤에는 측좌핵이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는 중독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처음에 중독은 측좌핵의 쾌락적인 충동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측좌핵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중독은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한다. p.114-5
-앨릭스 코브 작가의 <우울할 땐 뇌과학> 중에서-
이 글귀는 자책감에 빠져있던 나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었다. 이미 생겨난 나쁜 습관은 사라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니, ‘그간 내가 같은 행동을 반복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나의 오래된 행동 패턴을 무작정 탓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습관을 쌓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나에게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우선 집 근처에서 할 수 있는 가벼운 운동을 등록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또한 식사 후 소파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던 습관을 끊기 위해, 밥을 먹고 난 뒤에는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가 20분 정도 가볍게 산책하기로 했다. 산책 후 다시 소파에 눕더라도, 적어도 20분은 걷고 난 뒤에 그렇게 하자는 나와의 작은 약속이었다.
완벽한 변화는 아니지만, 이런 소소한 노력들이 나를 천천히 고립의 굴에서 끌어올려주기를 바란다. 혹여 중간에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이제는 안다. 이미 자리 잡은 습관이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결국 나쁜 습관을 억지로 없애려는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습관이 제자리를 잡을 시간을 주는 것이 진짜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