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은 말해도 괜찮다.

by 담하

도서관.

나에게 도서관은 꽤 의미 있는 공간이다. 조용한 분위기와 빼곡한 책장, 각자 무언가에 몰두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이상하게 안도감이 든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던 경험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책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고, 함께 근로하던 친구들과 누가 더 빨리 책을 정리하나 내기를 하며 보내는 시간도 꽤 즐거웠다. 무엇보다 도서관은, 내가 ‘필요한 것을 요구해 성취해 본 기억’을 처음으로 갖게 된 장소였다.


스무 살 이후 집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던 나에게 아르바이트는 선택이 아니라 숙명에 가까웠다. 학업과 동시에 여러 일을 병행했고, 도서관 근로 역시 그중 하나였다.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에 틈틈이 일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근로장학생 조건에 해당하지 않아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근로를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다른 일을 구해놓지 않은 상황이고 수업 시간표도 이미 근로를 계속 할 것에 맞춰놓은 상황이라 무척 곤란했다.


고심 끝에 나는 용기를 내어 담당 계장님을 찾아갔다. 내 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결과적으로 계장님의 배려로 한 학기 더 근로를 이어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다음 학기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선택은 나에게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부끄럼이 많은 편이었다. 마음속에 원하는 것이 있어도 쉽게 말하지 못했고, 심지어 먹고 싶은 음식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원래의 나라면, 도서관 근로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저 속상해하며 “어쩔 수 없지” 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그 변화의 시작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인연이 닿지 않아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학교 선배였다. 우연히 그 선배가 교수님께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며 부탁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 그녀는 담담했고, 자신의 상황을 숨기지도 과장하지도 않았다. 부탁에는 비굴함도 뻔뻔함도 없었다. 그저 겸손하고 솔직했다.


그 모습은 내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동안 부족한 상황은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그냥 솔직하면 되는 거구나. 솔직함은 잘못이 아니구나.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의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누군가 말로써 조언해 주었다면 그렇게까지 와닿진 않았을 것이다. 설명보다 목격이, 조언보다 경험이 훨씬 강력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사람은 내 ‘표현 허용치’를 넓혀준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조금씩 변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요청한다고 해서 관계가 쉽게 무너지지도 않았다. 혹여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를 위해 내 의견을 말해봤다는 사실만으로 후회는 남지 않았다.


그 변화는 내 삶의 여러 장면으로 이어졌다. 도서관 근로를 연장했던 일, 원하던 곳에 취업하게 된 일, 회사에서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팀장님께 상의할 수 있게 된 일까지. 모든 선택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건 내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수용되지 않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나에게 비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태도는 지금도,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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