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는 형과 얽힌 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지금은 한 송이에 삼천 원 남짓한 바나나지만, 극 중 회상 속에서 바나나는 지금 돈으로 십만 원쯤 할 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바나나를 사 와 주인공에게는 두 개를, 형에게는 세 개를 나눠준다. 그러나 학교를 다녀와 보니 자신의 몫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후 이어지는 김 부장(배우 류승룡 씨)의 대사는 단순한 형제간 다툼을 넘어, 한 아이가 어린 시절 느꼈을 억울함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형, 기억 안 나? 내가 형 방 가서 쓰레기통 뒤져서 껍질까지 찾아서 그거 들고 가서 형한테 소리 지르면서 내 거 왜 먹었냐고 그러니까 형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 줄 알아? 내 따귀를 때렸어. 따귀를. 내가 울면서 엄마한테 가니까 엄마가 형이 하나 더 먹을 수도 있지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고, 어? 내가 형한테 맞았다고 하니까 엄마가 아예 그 뒤로 대꾸를 안 해. 내가 집에서 그런 존재였어. 내가.”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14화 중에서
나에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여섯 살 차이가 나는 언니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자매라기보다 부모에 가까운 존재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언니는 중학생이었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이미 대학생인 성인이었다. 집에서는 언니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던 어느 날, 언니와 놀다가 얼굴을 세게 맞았다. 고의는 아니었고 실수였지만,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빠 안경을 쓰고 있던 나에게 맞은 통증은 꽤 컸다. 아파하고 있는 나를 향해, 언니는 괜찮냐는 말 대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왜 거기 있어.”
갑작스러운 타격에 아팠던 통증보다도 억울함이 더 오래 남았다. 그래서인지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 일이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통증의 크기 때문은 아니다. 그때의 감정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쳤고, 놀랐고, 위로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 순간 언니가 괜찮냐고, 다치지 않았냐고 물으며 나를 안아주었다면 이 기억은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과받지 못해서 마음이 상한 것보다, 나에게 책임을 돌리는 그 한마디가 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아픈 건 나인데, 잘못한 사람도 나였던 것이다. 분노나 슬픔, 억울함은 표현되거나 공감받으면 옅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설명되지 않으면 마음속에 저장된다.
누군가는 왜 그때 따져 묻지 않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무엇보다 상대는 자매가 아니라 ‘부모 같은’ 언니였다. 보호자이기를 기대한 존재에게서 공감 대신 화를 마주하게 될 때, 사람은 저항하거나 무력해진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나는 보호받지 못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억울함과 분노, 말하지 못한 무력감이 뒤엉킨 채 그 기억은 미해결 상태로 남았다. 그 당시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김 부장(배우 류승룡 씨)은 형과의 에피소드를 정신과 상담의에게 털어놓으며 이렇게 묻는다.
“만약에 그때 형이 사과를 했다면, 지금 뭐가 달라졌을까요?”
나 역시 궁금했던 그 질문에 상담의는 이렇게 답한다.
“에이, 그건 영원히 몰라요. 우리가 평행 우주로 가볼 수 있지 않은 이상.”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러니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볼 수는 더더욱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그 일을 기억하지도 못할 언니와의 대화일까, 아니면 나를 위해 먼저 건네는 용서일까. 하지만 그것들이 먼저는 아닌 것 같다.
『오은영의 화해』라는 책의 도입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부모, 자식, 형제, 친구 혹은 주변 사람과의 화해는 접어 두세요. 그들과의 화해는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과 화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나', 그런 '나'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고 미워했던 '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 그 상처받은 ‘나'와 미워했던 '내'가 화해하기를 바라요. 상처의 시작은 '나'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것을 기억하세요. 그것을 알고 당신이 당신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를 바랍니다. (p.11)
이 문장을 읽으며 깨닫는다. 내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은 언니의 사과가 아니라, 그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나 자신의 감정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일을 ‘이미 지난 일’로 정리하려 애썼지만, 사실은 아직도 그 장면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위한 공감’을 해주려고 한다. 자기 합리화여도 괜찮다. 누구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순간에, 지금의 내가 내 편이 되어주면 된다. 함께 억울해해 주고, 화가 날 만했다고 말해주고, 말하지 못한 이유까지 이해해 주는 일이다.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나에게, 늦게나마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아마 그것이 회복의 시작일 것이다.
“맞은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놀랐고 화날 만했어. 그리고 네가 무서워서 말하지 못한 것도 정말 당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