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좋은 사람보다는

그냥 좋은 사람이 더 좋다.

by 담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몇 년 만에 다시 마주 앉아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시간은 흘렀지만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다. 그 시절의 나로 잠시 돌아가, 조금은 철없고 조금은 해맑았던 나와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그런 친구와 “그땐 그랬지”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시계는 의미를 잃고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매번 만날 때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도 이상하게 지겹지 않다. 같은 기억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다.

스무 살, 갓 대학에 입학해 ‘새내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신입생 환영회를 다니고 선배들의 부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늘 뒤에서 후배들을 챙기던 선배가 한 명 있었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분위기를 살피고,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것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서로 가까운 곳에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한 번쯤 얼굴을 보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일 때까지만 해도 만남은 무난했다. 그러나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그 선배의 말과 태도는 점점 거칠어졌다.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말버릇과 행동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반가움보다 당혹감이, 추억보다 불편함이 먼저 마음에 남았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도 편한 사이는 아닐 수 있다는 걸. 한때는 분명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다시 마주해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서로의 결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결국 어떤 인연은 ‘시절 인연’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아마 각자의 삶을 살아오며 서로가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가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은 방향이든 말이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각자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는지는 온전히 알 수 없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서로의 시간을 존중할 뿐이다. 그리고 오랜만의 만남이 불편해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서히 멀어진다. 결국 오래 보았다고 해서 모두가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감정에는, 내가 변했다는 사실도 분명히 한몫하고 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 그때의 나와 그때의 그는 잘 맞았다.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상처도 받고 배우기도 하면서 가치관은 달라졌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과 행동들이 이제는 관계를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속 저울 위에 올라간다. 친해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인연을 시절 인연으로 남기겠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건, 억지로 맞추지 않으려는 자기 존중이자 추억은 인정하되 현재의 나를 속이지 않겠다는 솔직함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우선에 두는 선택. 그것은 잃음이 아니라 정리에 가깝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결국 “그래도 그 시절에 함께여서 좋았다”는 생각만 남을 것이라 믿는다. 그 정도면 충분히 잘 보낸 인연이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는 말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내 안에 나만의 기준이 생기고, 그 기준에 맞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살아갈수록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아진다.


언젠가부터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쓰는 에너지도 의식적으로 줄이게 되었다. 예전에는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더 참아보려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타이밍’과 ‘인연’이라는 말 뒤에 나 자신을 숨긴다. 굳이 애쓰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누군가는 사람을 가린다고 비겁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알고 보면 좋은 사람'보다는 '그냥' 편한 사람이, '그냥 좋은 사람'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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