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물건으로 최대한의 자율성을 얻기
재택근무는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책상과 의자 없이 방바닥에 엎드려 플랭크 하듯이 노트북으로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도 있는데, 좌식 테이블과 좌식의자가 있는 나는 이미 맥시멀리스트라며, 회사에서 홈오피스에 필요한 물건을 사라는 목적으로 내려온 예산에 의문을 표했다.
좌식의자에선 자세가 고정되지 않았고, 다리가 저렸다. 일을 하다가 지치면 '끙차', '이얏호' 같은 국적 불명의 소리를 내야만 몸을 겨우 일으켜서 필요한 것을 가져올 수 있었다. 3개월을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맥가이버 BGM을 틀어놓고 책상을 조립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렇게 디스했던 전 직장도 오피스 가구와 물품들만큼은 과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도가 맞지 않고, 자세가 불편하면, 초원에 풀어놓은 당나귀처럼 집중력이 날뛰었다. 게다가 잠깐 쳐다본 바닥에 머리카락이라도 몇 개 떨어져 있다면 왠지 참을 수 없었다. 분명히 집에서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보인 싱크대에 있는 설거지에 대해 나 자신에게 한마디 한다. '도대체가!'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도 2년, 점점 욕심은 커져만 간다. 원룸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홈오피스용 방 하나가 있으면 일과 일상의 분리도 될 것 같고, 왠지 업무효율도 올라 성과도 더 오를 것만 같다. 그럴 리가. 그럼 방바닥에서 플랭크하면서 노트북 하나로 일하는 사람은 뭐가 되나. 이렇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재택은 아무나 하나, 리모트 워크,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그럼에도 점점 노하우를 터득하며, 최소한의 물건으로 몸과 마음을 지키며 매일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오늘은 재택근무에서 느낀 단점을 미니멀리스트의 관점에서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을 할 때에는 집중하기 위해 끼니를 거르거나, 샐러드만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도시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정반대로, 일이나 공부를 하다가 배가 고프면 순간적으로 지구를 부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일을 할 때 식사가 중요한 사람이다. 자고로 직장인이란 아침에 출근하면서 이미 점심 메뉴를 정해두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재택근무는, 특히 내가 사는 동네는 외식과 배달음식 메뉴가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도 워낙 집에서 뭘 해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좋아하기도 하는지라,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돈도 굳고 좋은 일이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원데이 투데이지, 점차 메뉴 선정과 식사 준비에 있어서 영양사 분들의 심정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밀프렙을 해뒀다가, 질려서 그냥 재료가 있는 대로 반찬을 만들다가, 그마저도 그걸 일일이 다 만들고, 42리터짜리 쏘 리를 타이니 큐트한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도 힘들어져서 원 플레이트 요리에 맛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미리 전날 재료를 준비해두는 '나만의 밀키트'다. 점심시간 땡 하면 바로 꺼내서 사라락 냄비에 다 담아서 가열만 해서 먹을 수 있도록, 두 끼 분량의 식재료를 씻고 썰어서 전날 밤에 준비해둔다. 물론 전기 절약과 플라스틱 랩이나 용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냉동을 하진 않는다.
덕분에 전자레인지가 없는 우리 집에서도 따뜻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조리하는 시간 동안 빨래를 개거나 청소를 하는 등 집안일을 하니 홈오피스의 환경도 보다 쾌적해졌다.
평소에도 옷 8벌로 살아가는 미니멀리스트이지만, 재택근무는 더욱 심플하다. 들어는 보셨는지, 쿨 비즈. 회사에서 여름에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회사에 반팔 셔츠 등 시원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걸 허용하는 룰이다. 우리 집 오피스는 반팔 셔츠를 넘어선 슈퍼 쿨비즈를 채택하고 있다. 재택근무를 위한 옷을 구매하는 사람도 있고, 집중을 위해 일을 시작할 때 편하지 않은 옷으로 갈아입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그중에서 나의 여름 재택근무룩은 나시 한 장이다. 가끔가다 미팅이 있으면 얇은 셔츠 하나를 걸친다.
겨울은 발열내의 한 장에 플리스 같은 따뜻한 옷을 입는다. 가끔 그 상태에서 팔이나 배를 쓰다듬으면 자신이 펭귄이 된 것 같아 한 층 더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장점도 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옷을 간단하게 입는 이유는, 세탁기가 없는 우리 집에서 집안일을 줄이기 위함이라는 부차적인 이유도 있다. 재택근무와 집안일로 투잡하는 기분이 들지 않게 매일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업무의 시작이라 함은 역시 가방 속 깊숙이에 있는 사원증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택근무는 그런 거 없다. 출퇴근 시간이 사라진 덕분에 아침 출근을 여유롭게 할 수 있지만, 잔업도 여유롭게 해 버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한 공간에서 계속 일하게 되니 업무 ON/OFF 모드가 사라지고, 집중력도 널뛰기를 한다. 그러니 업무와 일상 사이에 사라진 경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양치하는 타이밍에 출근하고 저녁식사를 먹어야 하는 타이밍에 퇴근한다. 원래 재택근무 출근은 집에 캡슐 커피머신이라도 두면서 커피를 뽑아마시며 출근해야 간지라고 하지만, 카페인 과다 섭취로 자제하고 있는 나에게는 어쩌다 보니 양치가 곧 업무를 위해 이것저것 세팅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식사를 중요시하는 나답게 6시 이후는 더 이상 위장이 못 버틸 것 같은 시점에 퇴근한다. 언젠가는 저녁이 되면 완전히 와이파이를 꺼버리는 게 목표지만, 일단 넷플릭스부터 끊고.
집에서 집중력을 되돌리려는 재택근무러들의 노력은 정말 눈물 난다. 스탠딩 데스크에, 무슨 밸런스 보드에, 어떤 분은 회의 내내 자꾸 발로 뭘 밟고 계시고, 저분은 어디서 일하시길래 집이 저렇게 어두울까, 누구는 또 눈이 부셔서 눈을 거의 감고 있다. 그럼 나는 멀쩡한가? 나는 집중이 되면 그 상태를 붙잡고 싶어서 쉬는 시간 없이 일한다. 가끔 미팅 후에 기가 빨리면 자리를 떠나는 정도. 리프레쉬는 퇴근하고 할게요.
홈오피스에 어느 정도 투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분명한 건 집중력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다. 그 전날 질 높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은 어느 정도 확보된다. 몸이 아프면 참지 말고 적극적으로 병원에 가자. 나는 어떤 음악과 음료를 마실 때 기분이 좋아지고, 업무 효율이 올라가는지,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하는 일은 누군가와 대화, 회의 중에 계속 종이에 연필로 그 내용을 적는다. 각종 디지털 툴을 써가며 최첨단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 웬 종이에 연필이냐 싶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내용을 들으면서 정리하고 나중에 복기하기 위함이다. 역시 일을 사랑한다면 연필로 써야지 아무렴.
재택근무 요원들은 알겠지만, 재택근무는 출퇴근 시간이 사라진다는 거대한 장점과 함께 자잘한 단점들도 많이 숨어있다. 그중 자주 듣는 말은 역시 팀원들과의 소통에 대한 단점, 예를 들어, 예전과 같이 잡담을 할 일이 없어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거나, 상대방이 뭘 하고 있는지 몰라 물어볼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얼마나 열일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가시적으로 보여줄지 모르겠다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초반에는 무조건 많이 자주 말하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재택근무를 오래 하면서 어느 정도 나만의 룰이 생겼다. 나의 지금 상태와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는 TMI(Too Much Informaion), 즉 과도할 정도로 자주 알린다. 그중에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은 생략한다. 예를 들면 열두 시에서 한시 외에 다른 시간대에 점심을 먹으러 가면 팀원들에게 간단히 알리지만, 열두 시에서 한시 사이에 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메신저의 스테이터스만 바꾼다. 갑자기 와이파이 라우터가 말썽일 때, 컴퓨터가 과부하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해서 재부팅이 필요할 때처럼 잠깐 동안이라도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적극적으로 알린다. 꿀팁이나 이득이 되는 정보들은 일개미처럼 링크를 갖다 나른다. 반면에 팀 내 멤버들에게는 때때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스레드나 코멘트에 적는 대신 이모티콘 리액션으로 대체한다.
잡담은 시간을 정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잡담 방을 Google meet이나 Zoom으로 만들거나, 회사 동기들끼리의 채널을 만들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회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가감 없이 외부 사람들, 즉 친구나 가족에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회사 안에서 풀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아닌가. 그리고 금주 실패의 아이콘인 나답게, 적극적으로 오프라인에서 회식이나 네트워킹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술 모임은 일단 정하고서 명목은 나중에 붙이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역시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이 깨지기도 하고,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갔을 때도 더 쉽게 말을 걸거나 업무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아, 세상에서 가장 알맞고 독특한 이모티콘을 찾아서 쓰는 것도 재택근무의 묘미다. 점심시간 외에 밥을 먹게 될 때는 주먹밥 아이콘을 올리고 가는데, 돌아와 보면 다들 알았다는 의미에서 주먹밥 아이콘으로 대답해놓는다. 우리 팀원들이 이렇게나 귀엽다.
초원의 야생 코끼리들은 하루에 15km 이상도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왠지 그 이야기를 들으니 꼭 재택근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자율성이 주어졌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해나갈지 방향을 찾는 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니까.
나만의 페이스로 혼자 고요하게 점심 식사에 집중할 수 있는 것, 혼자만의 업무 공간이 넓어져서 스트레스가 적어진 것, 이 모든 게 재택근무가 있어서 가능한 행복이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한국과 일본에서 재택근무가 이렇게까지 많은 기업에 도입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지금의 이 자율성 안에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을 터득해가고, 조직과 개인이 서로 신뢰를 얻어, 지구에게도 이로운 이 근무형태가 앞으로 더 넓게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제는 초원에 풀어놓은 당나귀가 아닌, 초원에서 몇 킬로미터든 묵묵히 걸어가는 코끼리처럼, 주어진 자유만큼 책임을 갖고 일하려고 늘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