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왔을까?
지난 금요일인 2018년 11월 23일 덕수궁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1월 15일부터 시작된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에 다녀왔다. 근대 미술작품들을 도슨트의 해설과 함께 감상한 후 개인 감상을 하는데, 갑자기 근대 풍속화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노동을 하는 서민들을 그린 풍속화인데, 그림 속 노동자들의 몸이 내 눈에 들어온다. 작품속에 있는 40대 이후의 노동자들은 모두 배가 좀 나와있었다. 그림을 찬찬히 보니 분명 많이 먹어서 나온 배는 아닌 듯 싶었다. 살이 쪄서 나온 배가 아니라면, 아마도 중년의 남성들이 배가 볼록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가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깨달음 같지 않은 깨달음을 왜 갑자기 얻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아닌 줄 알았지만 아마도 몸에 대한 환타지를 가지고 있나보다.
몸 하면 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인 다비드의 몸을 떠올린다. 물론 그 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간의 몸이지만 당시 종교가 인간에게 끼친 영향을 고려할 때, 거의 신의 몸이다. 즉 실재하는 몸이 아니라 이데아의 구현인 것이다. 다비드상 같은 몸은 젊음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몸을 중년이후에도 내몸으로 하고 싶다면, 식단 조절, 운동 기타 관리가 있어야 할 것같고, 그것도 식단조절, 운동, 기타 관리가 전업이 되어야 할 거 같다.
여자의 몸에 대한 환타지는 좀더 이상하다.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의 몸도 나의 환타지가 되지 못한다. 너무 풍만해서 요즘으로치면 비만의 기준에 해당한다. 그럼 나의 여자의 몸에 대한 환타지는 어디서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디서 왔는지 가물가물하다가 어쩜 순정만화에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큰 눈, 마른 몸매, 긴 다리등의 비현실적인 외모가 너무 아름답다고 순정만화를 통하여 학습한 것 같다. 물론 여주인공들에게 닥치는 문제도 너무 빼어난 미모 때문이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력도 바로 그 미모인 결자해지 방식의 순정만화의 내용도 학습했겠지. 순정만화에 나오는 비주얼을 내가 구현하려 하면 일단 요즘 말로 견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견적'
이 말은 우리의 외모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내포한다.
나는 외모의 인위적 변형에 대부분 한결같은 입장이었다.
'인간의 다양성을 왜 돈을 들여 획일화 하느냐'고 '바보같은 짓'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적 외모 환타지를 가지고 있었나보다.
신화나 순정만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몸의 환타지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사람들이 요즘 티비에 나온다. 유전의 행운으로 가지게 된 큰 키와 비율, 유전의 행운 혹은 과학과 의학의 도움으로 된 듯한 이목구비를 하고 내게 말하는 거 같다.
너도 가능성이 있어.(돈만 있다면)
이런 몸이 아니면 너는 비참할 거야.
분명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닌데, 왜 나는 자꾸 이렇게 들리는 걸까.
자본주의가 신앙이 된 시대에 믿음이 깊지않은 나는 자주 힘에 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