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의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이자 극한의 태도
나이를 먹는다. 한국말 가운데 요즘 내가 이 생각 저 생각 들게 하는 단어이다. 나이와 먹다라는 두 개의 아주 다른 말이 스리슬쩍 같이 사용 된다. 보통 먹는 건 떡볶기나 밥 같은 먹거리이다. 먹다라는 말은 나의 능동적인 행위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그런 동사이다. 그리고 좀 생각해보면 2차적인 사용으로 상황에 따라 욕을 먹거나 충격을 먹는데, 이건 외부적 이팩트에 따른 나의 수동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나이를 먹다에서 살필 수 있는 세계관은 욕이나 충격과 먹다가 함께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거같다. 참고로 영어에서 나이(age)와 함께 사용되는 동사는 get이나 grow인거 같다.
서론이 길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된 나의 친구들이 만나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나 이제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려고, 괜히 불편한 사람 만나서 내 맘 언쩒고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나이를 먹으니까 더 그렇더라."
나도 고개를 대차게 끄덕였었다.
"그래 맞아 우리끼리 재밌게 놀자."
사실 우리끼리 재밌게 노는게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노는데 맘과 행동이 서로 맞는 사람들끼리 놀면 재밌으니 그건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나의 끄덕임에 기저에 있던 '배제'의 속성에 대하여 한번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최근에 있었는데 제2차 상생의 사회 내부토론회다.
상생의사회 내부토론회는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3시에 마포에 있는 대안연구공동체 2층에서 개최되었다. 정정화님이 사회를 맡고 신용인님과 정웅기님이 '우리 사회 이념 갈등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주제로 발제를 하셨다.
요즘 뉴스에 빼곡하게 나오는 편가르기를 극복하는 방안에 대하여 신용인님은 모두가 합의한 헌법을 준거로 풀어가자는 내용이었고 정웅기님은 2014년 화쟁코리아 경험담을 주로 발제를 하셨다.
어려운 내용이어서 이러저러 고민이 깊어가는 중에 정웅기님의 발제문 가운데 "죽으나 사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대접하고 존중하면 정의와 평화가 빛나게 된다"는 음성을 듣는 순간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단박에 깨닫는 것)의 발끝에 닿았던 거 같다. 돈오가 한 5단계로 나눌 수 있다면 (1이 초보 5가 최고) 나는 한 0.5레벨 정도 돈오였던거 같다.
아! 나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여 평화를 깨고 좋은게 좋은거야 하는 태도로 주변을 대하여 정의를 뭉게버렸구나.
나의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나 잘남의 만용을 바탕으로 주변을 배제하려는 태도가 은근하게 깔려 있었던 거 같고 이러한 나의 아집에 바탕한 어떠한 말과 움직임도 갈등을 부추기거나 덮어버릴 뿐 갈등을 극복하고 한 걸음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어려서 본 만화영화에서 재투성이를 신데렐라 공주로 변신하게 하는 요정의 마법봉처럼 0.5레벨 돈오가 내 말과 행동을 확 달라지게 하기는 어렵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주변 사람 대할 때 꼴보기 싫으면 안보면 된다는 마음에서 좀 벗어나려는 걸 시작해 보려고 한다.
꼴보기 싫을 수 있지만 죽으나 사나 더불어 살아야하니 일단 나 스스로 이기심이나 아집이 심했나 돌아보고 어찌하면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나 이렇게 저렿게 머리를 굴려보고 내 언어의 상태는 어떠한가 점검 해보아야겠다. 그래도 어렵다면 가끔씩만 만나고 최소의 교집합으로 껄끄러움을 최소화하겠지만은 마음가짐은 죽으나 사나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을 바탕에 깔아야 겠다. 사실 나의 인격으로는 엄청난 결심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이 먹다"라는 단어가 욕과 충격과 같은 외부적 이팩트에 따른 수동적 상태를 표현하는 언어였다면 이제부터라도 나의 욕구를 나의 능동적인 행위로 충족시키는 그런 단어로 바꿔보고 싶다. 나의 능동적 행위에 의하여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시간을 사용하고 싶다.
즉 제대로된 나잇값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나도 안다 이런 건 신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과학이 내 손안에 있는 시대에 종교가 있는거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