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를 지혜라고 부르고 나의 발에 모시겠습니다

오늘 날씨 맑음

by 모호씨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싸늘했습니다

그리하여 몸의 일부를 그늘 밖으로 내어 놓고

멍하니 흐르는 발들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걷지 않는 날을 없었지만

나는 아비를 닮아 성실했었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어떤 걸음을 멈춰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삶이 여행인 줄은 미처 모르고

시작하면 곧장 도착하고

또 시작하면 곧장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졸업이 죽음인 줄 모르고

자격이 비문인 줄도 모르고

무얼 채워 적으려고 바삐 애썼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텔레비전이 뱉은 이야기가

지하철이나 카페에서나

엄마에게서나 할머니에게서도 들려옵니다


지혜가 사라지고 신비가 사라지고

할머니는 책을 몇권 사다주었습니다

엄마는 신문을 읽으라 하셨습니다


여행의 선물은 오직 여행 안에 있음을 몰랐습니다


나는 오늘 어떤 걸음을 멈춰버려

나는 그만 나의 발을 가만히 노려봅니다


나의 발은 도구가 아니라 주체가 되었습니다

발을 내딛는 곳에 고작 하루의 인생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지는 더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나의 발의 감각에 더 예민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나는 그대를 지혜라고 부르고 나의 발에 모시겠습니다

내가 온통 흔들린 질문이고

내가 온통 후회하던 깨달음입니다


나는 그대를 신이라고 부르고 나의 발에 모시겠습니다

다만 오늘이고 내일에도 오늘일

나의 단 하나의 시입니다


W 상석.

P Brooke C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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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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