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운 창 너머에 늘 찍을 것들이 있다
4와 13이 함께 있어 남들은 불길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위로를 했고 나는 괜찮다며 그만큼 특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했던 나의 생일을 먼 이국 땅의 작은 스튜디오에 갇힌 채 맞게 되었다.
프랑스는 4월인데 해가 (우리나라의 여름보다) 길어서 저녁 10시는 되어야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자정이 되자마자 엠마가 축하를 해주었는데 그땐 아직 거리 위에 밤이 짙지 않아 시계가 나를 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년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느끼게 해주는 쓴소리만 같아서 그다지 생일이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엠마는 이동제한 때문에 장난감 하나를 못 사준다며 무척이나 속상해했다.
이동제한이 무한히 길어지는 만큼 우리의 취침시간도 자꾸 늦어만 져서 매일같이 아침 해가 수탉의 엉덩이를 꼬집는 것을 연기된 마지막 일과처럼 바라보고 있다.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도 하늘이 온전히 보이는 창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살던 성북동의 4층 집에서는 하늘이 잘 보여 참 좋았는데 시야도 돈이 되는 땅이라 곧 커튼처럼 건물이 꼭 맞게 들어서서 시계가 아니면 낮밤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이사로 커튼이 조금 물러서거나 옆으로 비켜서기도 했지만 하늘을 온전히 바라보려면 늘 상상이 더 필요했다.
프랑스에서는 거리를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참 즐겁다. 미세먼지가 하늘의 색을 가리지도 않고 높은 건물들이 시야를 자르지도 않아서 매일의 날씨와 계절의 변화들을 온전히 다 지켜볼 수 있어 좋다. 나날의 색들과 제멋대로인 구름들을 그냥 바라본다. 그 안에는 어떤 줄거리나 의미도 없지만 순수히 나를 사로잡는 색과 형태들이 늘 떠 있다.
집에 돌아와도 다행히 우리의 앞에는 늘 하늘이 있다. (우리의 스튜디오는 한쪽 면이 창으로 다 덮여 있는데 아침이면 그곳에서 해가 떠오른다.) 우리의 책상은 하늘을 마주하고 놓여 있다. 그래서 나는 쓰고 싶지만 쓰기는 또 싫은 글을 손바닥 돌로 눌러 놓고 (도망가진 못하게 내가 꼭 쓸 거니까.) 눈 가까이까지 흘러 내려온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어릴 때, 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나는 제법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특별한 자아가 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자아는 상품처럼 통용이 되는 거일 텐데 나는 그것을 몰라 잘 팔릴 자아보다는 나만의 특별한 무엇이 되길 간절히 원했다. 무심한 자유의 공기 속에서 교육도 강요도 받지 못해 걷잡을 수 없이 펴져 버린 환상의 약효는 무척이나 강했다. 특별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그 형태와 쓰임을 금방 이해하고 역사에서 출처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별종의 냄새가 나는 조금의 조각이 껴 있어야 특별함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의 열광을 받을 수 있다. 새로운 미인은 언제나 조금 못 생긴 미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모르고 살아왔다.
그 모든 것과 단절된 순수한 다른 것을 꿈꾸고 바라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또한 너무나 강력한 세례명의 무게 아래에 있기도 했다. 무척 다르다는 환상이 낮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언제나 너무나 좋은 평범한 사람이고 말았다.
이상한 것, 나만의 것이라고 믿으며 두렵고 부끄러운 열망에 휩싸이며 시작을 해도 끝에 가면 무엇하나 날카롭지 못한 것을 쓰고 마는 것은 그러한 시절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특별하다는 생각, 새로운 것, 나만의 것을 한다는 환상과 우선 마주해보기로 했다. 남들과 비슷한 것을 쓰기 싫어 무엇도 보려고 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언어로 무언가를 그리면서 남들에게 전혀 물들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 봐야지. 내가 하던 것들이 도처에서 보여도 멈추면 안 되지. 나의 뇌가 이미 그들의 고기로 다 채워져 있다는 것을 쓰려도 외면해서는 안되지.
내가 더 이상 다르지도 특별하지도 못하다 생각을 하니 무척 슬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움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를 미련처럼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아니 새로운 것은 있다. 하지만 세상에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움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 모르는 것들 중 무엇인가를 누군가가 구멍이 난 말로라도 억지로 안아 담아 온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그냥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앎의 끝에서 보이는 앎의 한계이다. 그러니 게을러 모르는 내가 진기한 것이라 생각한 것은 실은 그들의 창고에서는 별 거 아닌 것으로 썩고 있었던 것이고.
만약 우리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집에 있으면 안 된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영화를 무수히 봐야 하고 시를 소설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들은 그곳에 없는 것 단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오직 낡은 것들에게 얘기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약은 구약에게 알리는 것이고 신약을 신약인줄 알려면 구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무심히 태어나거나 이미 태어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는 것들일 뿐. 무엇이 만들어지고 쓰이다가 사전에 등록이 되면 그것은 활자처럼 단단해진다. 가족의 일원조차 활자처럼 여겨진다. 그가 우연한 비에 뚝이 터져 이상해진다면 십중팔구는 변화를 부정하고 복구를 하려고 할 것이다.
'너 좀 이상해. 정신 차려.'
새로운 것은 그렇게 불편한 것이고 그래서 너무나 언짢은 것이다. 세상은 이제 알만큼 다 알게 되었다고 완성하고 싶어 하는 욕망들 앞에 네가 일부러 안 보던 것들을 들이미는 싸움. 새로운 것은 그래서 운동이며 오히려 정치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들이 늘 이로운 것도 아니다. 이로움이란 제일 단단하고 느린 감각이니까. 그것은 우리가 먹지 않던 물고기, 과일, 우리가 품지 않던 모습의 사람, 우리가 발음하지 않는 소리, 우리가 구토하고 싶어 지는 향기이다. 인간 말종이고 진보하지 못함의 증거이고 비이성일 수 있다. 새로운 것은 희귀한 게 아니고 늘 넘치는 것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은 발견을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들고 저 어딘가의 굳건한 성벽을 때리는 일이다. 그것은 말을 하는 것. 담으려 하지 않는 저들의 말을 가져와 그 속에다 독을 푸는 것이다. 새로움을 아는 것과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 사이의 커다란 차이.
그리고 또 새로운 것을 하다 마는 것과 새로운 것으로 이기는 것 사이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명적으로 위태로운 다리를 찾기 위해서는 쌍안경을 들고 들어야 하는 거겠지. 외부만 볼 것이 아니라 저 미운 것들의 속도 끝없이 봐야 하는 거겠지.
해가 길어도 날은 언제나 짧다. 나의 낮은 힘 빠진 머리카락처럼 이미 한 뭉텅이나 빠져 버렸다. 커피를 마셔 본다. 시계보다 하늘의 색을 따라가는 정신을 위해. 날짜는 속절없이 바뀌어도 우리는 아직 잠들지 않는다.
오늘은 거짓말처럼 선명한 무지개가 우리의 창 가까이에 서 있었다. 무심히 눈에 든 구름 옆에서 우연히 발견한 판타지. 창문 아래의 우버이츠 기사들은 내가 뭘 그렇게 찍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우리만의 단어였다. 단조로운 창 너머에 늘 찍을 것들이 있다. 너무 열심히 쓰느라고 못 보던 것들을 말을 다 못 배워 가만히 보고만 있다.
프랑스어가 서툴다. 영화라는 말은 더욱 서툴다.
글 이미지 레오.
202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