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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문집

[에세이] 존 레논의 음악과 사랑에 대해

by 이경선
존 레논, 오노 요코


존 레논의 앨범을 틀었다. 오랜만이다.


사랑에 대해 유난히 자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라 그럴까, 날이 흐린 때문일까.


존 레논과 오코 요코의 이야기는 아마 비틀즈 혹은 그의 팬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세기의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 수많은 이들이 둘의 사랑에, 찬사를 보내곤 했다.


작년 초 존 레논의 일대기에 대한 전시를 다녀왔다.(한가람미술관 이매진 존레존展) 비틀즈 데뷔부터, 오노 요코와의 만남, 그 이후의 이야기들까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다만. 전시를 통해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중 하나,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존 레논은 가정이 있었다. 어린 아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선택했다. 비틀즈 팬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 불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정을 버린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시대에 그 사랑이 찬사를 받는 건, 왜일까?


두 사람이 보여준 행적, 예를 들면 평화 시위와 같은 것들과, 두 사람이 함께여서 가능했을 작품들 때문, 일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존 레논, 그의 상징성 때문이라 여겼다. 아마 업계에서 필요한 일종의 상징성으로부터 빚어진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는 혹은 무조건적인 자본주의 때문일지도. 이유가 무엇이든 두 사람의 사랑은 빛났다, 지금까지도.


남겨진 이들의 슬픔에 대해서는 누구도 논하지 않는다. 아니, 저변의 어딘가 이야기될 수 있겠다만, 그뿐이다. 다시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말들로 덮어질 뿐이다.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밀회. 몇 년 전 한국 영화 업계에 불었던 빅 스캔들이었다. 국내에선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두 사람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김민희는 홍상수 감독의 뮤즈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고, 두 사람이 함께한 작품은 세계의 호평을 받고 있다.(지난 9월 개봉 작품 ‘도망친 여자’는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언젠가 두 사람의 사랑도 존 레논과 오노 요코와 같은, ‘세기의 사랑’으로 기억될까. 진정한 사랑으로, 남겨질 무엇이 될까. 두 사람이 계속해서 함께 작품을 이어가고, 끝내 쌓아낼 수 있다면, 그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사랑을 부정할 생각도 자격도 없다. 하지만 그 사이 결코 지워지지 않을 몇몇 자욱은 어찌할까.


사랑에 대한 관념


몇 번의 사랑을 하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는가. 얼마만큼의 자욱이 내게,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가. 그런 우리가 바라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이란 건 도대체 무얼까?


사랑하고 이별한다. 가족, 연인, 지인, 모든 관계에 있어 매일이 사랑이며 매일이 이별이다. 그런 우리네의 삶에 ‘사랑’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어떤 관념으로서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하는 걸까, 아니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랑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에 대한 획일화된 규정이 아닌, 우리네의 삶에서 말이다. 종교를 갖고 있지만, 정해진 규정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닌, 나름대로의 해석을 갖고 싶었다.


사랑이란 육체적인 욕망 외의 무엇일까. 오롯이 정신적인, 초월적인 무엇일까. 그것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면 가치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사랑이란 건,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태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만들어진 상상 속 관념은 아닐까. 결국 그런 초월적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가.


여러 관계에서의 사랑도 그러하거니와, 부모 자식 또한 그러하진 않을까.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고, 부모님이 주시는 사랑의 크기에 자식은 닿을 도리가 없다, 그러할 수 없다. 자식은 부모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품어내지 못한다. 언제고 그 아들딸들에게 자식이 생기면 부모에게 받았던 대로, 내리사랑을 전한다. 왜일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조금은 냉소적인 시각일 수도 있겠다만, 종족번식의 개념은 아닐까도 한다. 자손이 이어지는 것, 나라는 ‘종’의 번식이란 개념으로서 말이다. 하여 사랑은 내리사랑이 되고, 자식을 낳는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일부라 할 수 있는 육체적 욕망도 이로부터 이고, 결국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발한 것이라면.


허나 그리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러한다면 무엇 하나 나아갈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존재 가치, 무엇도 발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숱한 인간 본성에 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모든 문제들을 종식시키기 위한, 그를 위해 등장한 명제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런 존재는 어떤 욕망,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인간에 속한 모든 것들을 부정하지 않을 수,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을 테니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존재 가치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성적인 인간, 의구심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명제.

맺음


이어폰에선 아직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름답다.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향유된다.


사랑이란, 누구도 쉬이 생각할 수 없고, 온전히 알지 못하며, 오롯이 행하지 못한다. 다만, 본연의 욕망과 가능한 이성적 가치판단으로부터 형성해가는 과정일 따름이다.


다른 무엇과 같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그것의 바탕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과 타인을 위해 어떤 마음을 품어갈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슬픔과 최선의 행복, 이를 위한 무엇으로써.



출처 : 벅스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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