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책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방법
막바지 가을날이 너무 좋아 우리 가족은 계획에 없던 보스턴 여행을 훌쩍 떠났다. 나는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숙박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여행 가방을 싸기 위해서는 세심한 손길들이 필요한데 서두르다 보면 꼭 중요한 것들을 빠뜨리게 된다. 또 무계획으로 떠나게 되면 여행지에서 관광객으로서 해봐야 하는 것들을 다 못 해보고 오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첫째 아들의 잠옷 바지와 카메라 메모리카드를 빠뜨렸다. 또 고래 투어를 예약하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표가 다 팔린 상태였고, 푸르덴셜 센터의 보스턴 유일의 전망대는 Covid-19 때문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으며, 아이들이 고대했던 수륙 양용차 Duck Tours는 시즌이 끝나 있었다.
하지만 트롤리에 올라타 보스턴을 한 바퀴 돌아보며 보스턴만의 특유한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클램 차우더 수프와 굴 요리를 맛보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캠퍼스를 거닐며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버드 대학교 로고가 새겨진 기념품들을 사기 위해 들른 Harvard Coop에서 아이들이 어릴 때 가끔씩 읽어주었던 그림책 < Make Way for Ducklings -오리에게 길을 비켜 주세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실 하버드 후드티와 공책보다 나의 눈길을 더 끈 것은 보스턴을 배경으로 그려진 이 동화책과 귀여운 오리 인형이었다.
<Make Way for Ducklings> 그림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에 나왔던 삽화를 통해서였다. 이 책의 저자 짐 트렐리즈는 그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을 때 여러 가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자에 대해 알고 있는 일화를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로버트 맥클로스키가 <Make Way for Ducklings>을 그릴 때, 오리를 그리면서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니? 마지막에는 오리 새끼 여섯 마리를 자기 아파트에 데려와 자세히 관찰하기로 했지. 그런데 그 녀석들이 계속 움직이는 통해 결국 극 어떻게 했는지 아니? 이건 정말 사실인데, 그가 오리에게 와인을 먹였다지 뭐니!”
며칠 후 짐 트렐리즈는 그 반 선생님께 메일을 받았는데 학생들이 그가 얘기했던 책들을 읽어달라고 졸라 도서관에 다녀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 특별한 걸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릴 적 작가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동화책을 좋아했고 즐겨 읽었지만 한 번도 누가 그 책을 썼는지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그 작가가 살아온 삶이 그의 책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당연히 알리가 없었다. 나에게 아무도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이 책 제목 아래에 항상 새겨져 있었지만 난 그 작은 글씨를 읽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중고등학생 무렵에 작가의 이름은 나에게 그저 시험공부의 대상이었지 나와 작품을 연결해주는 고리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작가에 진정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후 <My Dad>의 저자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책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의 책 <My Dad>에 나오는 아빠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슈퍼 영웅이다. 빨간 망토에 나오는 늑대도 무서워하지 않고, 고릴라처럼 힘이 세서 거인이랑 레슬링도 거뜬히 한다. 집처럼 덩치가 크지만 테디 베어처럼 부드럽고,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뭐든지 잘하는 아빠는 나를 웃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 나오는 아빠는 처음부터 끝까지 잠옷바람으로 등장한다. 언제나 파란색 줄무늬 파자마에 브라운 체크무늬 잠옷 가운을 입고 있다. 그리고 이 체크무늬는 책의 맨 앞장과 뒷장 전체에서도, 식빵에서도 볼 수 있다. 왜 곳곳에 이 무늬가 등장하는 것일까?
앤서니 브라운의 아버지는 그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의 오래된 잠옷 가운을 우연히 발견하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한 것이 이 동화책의 탄생 배경이다. 그래서 이 책의 곳곳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입으셨던 잠옷 가운의 무늬가 등장한다. 이 일화를 듣고 나서 책의 마지막 그림을 다시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많이 그리웠을 그의 심정이 느껴져서 일까… 아빠의 품에 폭 안겨 있는 남자아이의 모습이 왠지 애잔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어른이 된 앤서니 브라운이 책에서 나마 다시 아이로 돌아가 그리운 아버지 품에 한번 더 안겨보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앤서니 브라운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고릴라는 실제로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투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우리 아이들이 커서 그림책을 만들면 나와 남편은 어떤 동물로 그려질지…… ㅎㅎ 궁금해진다.
작가의 존재를 알고 그 작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그 작가가 쓴 책이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단지 작가와 관련된 하나의 일화를 들었을 뿐인데 그 책이 더 읽고 싶어 진다. 마치 내가 아는 누군가가 책을 쓴 것처럼 아주 가깝게 느껴져 글과 그림 속에 스며든 그의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진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줄 때 항상 누가 책을 썼는지,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일화가 있다면 꼭 들려주곤 한다.
얼마 전 로알드 달 아저씨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로알드 달 아저씨는 bully(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를 아주 아주 싫어한다고. 그래서 아저씨의 책에는 자주 아주 못된 bully가 등장하는데 결국에는 슈퍼 파워를 가진 조그마한 아이에게 혼쭐이 난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로알드 달의 다른 책에 등장하는 bully와 그에 맞서는 용감한 아이들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Matilda>에 나오는 Trunchbull교장, <James and the Giant Peach>의 못된 이모들, <The BFG>의 거인, <George's marvelous medicine>의 괴짜 할머니 등등…
작년의 일이었다. 학교 과제로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즉 위인 중 한 명을 선택해 조사한 후 발표를 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아이는 작가 중에 한 명을 선택하고 싶다고 하였다.
“작가? 보통 이런 과제에는 토마스 에디슨, 넬슨 만델라, 테라사 수녀 등등의 위인을 선택하는 거 아나야?"
작가에 대해 종종 얘기해 준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이는 계속해서 작가 중에서 선택하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그림책 <Where Wild Things Are>의 작가 모리스 샌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이 그림책이 처음 나왔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 담아야 되는 아이들의 그림책에 무서운 괴물이 등장하고 엄마한테 “I will eat you up!”이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이 등장해 학부모와 교사들은 경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이 분노하는 Max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이 책에 열광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보는 아이들의 그림책에 행복, 기쁨뿐만 아니라 분노와 슬픔 등 보다 다양한 감정들이 다뤄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보스턴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Make Way for Ducklings>을 읽어주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라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짐 트렐리즈가 얘기했던 작가의 일화를 다시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오리에게 어떻게 와인을 먹일 수 있냐며, 오리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울상을 지었다. 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덕분에 아이들은 로버트 맥클로스키 아저씨가 그린 오리의 모습을 더욱 세심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사진첩과 구글맵을 번갈아 보며 우리가 보스턴에 봤던 강과 거리들, 풍경들을 동화책 그림 속에서 찾아보며 다시 한번 책을 읽어 나갔다. 동화책을 읽는 내내 오리들이 지나갔을 그 길들이 눈에 선명히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