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은 '혼자 읽기'의 좋은 출발점
너 또 만화책이야? 이제 그만 공부 좀 해라!
어릴 때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엄마의 잔소리. 이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만화책은 공부를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리고 만화책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즉 자발적인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인 반면 공부는 어느 정도 외부의 압력이 필요한 듯 보인다.
만화책은 재미있다. 시간이 많고 여유로울 때 느긋하게 보는 만화책보다 시험 기간이라든지,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에 잠깐씩 몰래 보는 만화책은 더욱더 재미있다. 만화책을 즐겨 봤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랬다. 약간의 긴장감과 죄책감이 양념처럼 섞여 들어갈 때 더욱 감칠맛이 났다. 이렇게 보면 공부와 만화책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는 아닌 듯싶다.
하지만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이에게 만화책을 권해 주세요.
글자를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만화책은 글자를 온전히 익히고 싶은 강한 동기를 만들어주고, 읽기의 재미를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일종의 '읽기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초대장' 같은 느낌이다.
내가 아이에게 만화책을 권해 주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의 두 아이가 만화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만화책에만 빠져 글책을 멀리하면 안 되겠지만 읽기의 출발점으로는 매우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읽기를 막 시작한 우리 아이들에게 만화책은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까?
먼저 한국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두 아들은 마법천자문 학습 만화책 덕분에 한글을 완벽히 떼고, 한자로 이루어진 한국어 고급 어휘를 익힐 수 있었다. 마법천자문은 주변 친구들의 집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학습만화이다. 게다가 재미있게 읽으면서 한자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엄마들도 기꺼이 사주고 싶어 하는 책이다.
막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첫째 아이가 어느 날 나에게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랑 빨간색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유치원 버스에서 어떤 누나가 자랑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법천자문'이라는 만화책과 부록으로 나오는 한자카드를 말한 것이었다. 우리 집을 아이들의 작은 도서관으로 만들고 싶은 로망을 갖고 있었고 책에는 돈을 아끼지 말자가 나의 소비 철학이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아이가 원하는 마법천자문 1권을 구입하였다. 그때는 아이가 한글을 완벽히 익히기 전이라 나는 만화책을 자주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수없이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아이는 특정 장면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고, 아이는 언제부턴가 그 만화책을 혼자 보며 스스로 글자를 읽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글자는 그때그때 물어가면서 스스로 글자를 익혀 나갔다. 더군다나 한자카드에 있는 한자들을 모두 다 읽고 쓸 줄 알아야 다음 권을 사주겠다는 아빠의 지략 덕분에 아이는 한자도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다. 이 만화책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한자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지나니 아이가 아는 한자의 수는 내가 알고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둘째는 미국에서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그 무렵,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한글학교에 가서 한글을 배웠지만 6개월 다닌 게 고작이었다. 집에서 아이에게 한글 책을 많이 읽어 주려 했던 나의 노력도 한몫했겠지만, 마법천자문 책을 스스로 술술 읽고 싶은 아이의 강한 동기는 자기 주도적 한글 학습을 이끌었다. 아이는 마법천자문 책을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처음에는 그림만 보다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글자를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더니, 이내 만화 속 캐릭터처럼 감정을 실어 말하듯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만화책을 스스로 읽겠다는 강한 동기가 자기 주도 한글 학습을 이끌었던 경험은 아이가 영어 만화책을 보기 시작할 무렵에 다시 되풀이되었다. 물론 그 동기는 어떤 책을 통해서든지 발생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추구하면서도 우리 집 책장에는 미니멀리즘의 핵심인 여백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히려 책장을 차고 넘칠 만큼의 다양한 형태의 책들이 있다. 하지만 만화책에서 나타난 그 강한 동기는 다른 책들에서 나타난 그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첫째가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미국 초등학생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영어 만화책 <Dog man>을 선물 받았다. 하지만 아이는 만화책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일단 이해가 전제인데, 그 만화책의 렉사일 지수는 480 정도로 미국 기준 2-3학년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 첫째 아이는 미국 학년 기준으로 본다면 유치원생인 데다가 리더스북(읽기 학습을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책) 레벨 2 정도의 책을 혼자 읽고 즐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책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남자아이들의 취향 저격인 <Dog man>을 마법천자문에 푹 빠졌던 것처럼 아이가 좋아하게 된다면 영어 책 읽기를 습관으로 굳혀줄 좋은 시작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베드타임 스토리 시간을 이용해 한 두 페이지 정도 소리 내어 읽어 주고, 어떤 내용인지, 왜 그 장면이 웃긴 건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아이는 점점 만화책 속 등장인물들과 친숙해지기 시작했고, 만화를 따라 그리기도 하면서 책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만 보다가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말풍선을 읽으려는 시도를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낄낄거리며 아주 자연스럽게 만화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내가 읽어준 건 단 한 권의 만화책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오히려 아이가 혼자 읽고 나에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만화책은 '말풍선'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입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종이에 프린트된 문자를 읽지만 문어가 아닌 구어 형태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입말이니깐 대부분 짧은 호흡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소리 내어 읽기에 매우 좋다.
무엇보다 만화책은 재미있다. 그래서 시키지 않아도 반복하여 읽는다. 그리고 만화책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몇 번만 반복하여 읽으면 쉽게 외워진다. 이렇게 외워진 문장은 아이에게 그대로 흡수되어 자연스럽게 스피킹 실력을 향상한다.
한국에서 한국어 만화책의 단점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만화 속에는 가벼운 생활 대화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휘의 확장을 위해서는 글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는 입장에서 그 언어로 생활 대화를 익히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익이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 입장에서 가벼운 생활영어가 많이 등장하는 영어 만화책은 영어를 배우는 아주 좋은 자료가 된다.
위의 그림은 Dog Man A Tale of Two Kitties의 한 장면이다. 이 한 페이지만 봐도 정말 다양한 표현과 어휘가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게 재미있다. 대문자로 표시된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읽으며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물론 귀여운 부작용도 있다. 이 부분을 재밌게 읽은 형제들이 한동안 내가 말만 하면 'why?'라고 대답하며 낄낄 거리다가 만화 마지막 장면의 파파처럼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은 적이 있다.
만화책에는 소리와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아주 자주 등장한다. 만화책을 자주 접한 아이들은 이런 단어들이 언제 쓰이고, 글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습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저장된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들은 아이들이 글을 쓸 때 그 글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전에 외국인 학교에서 근무할 때 아이들이 쓴 글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다양한 책을 읽으며 영어를 언어로서 접근한 아이들의 어휘와 학습으로만 접근한 아이들의 어휘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전자의 경우는 문법은 조금 틀리 지언정 생동감 있고 읽는 재미가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문법적으로는 괜찮은데, 아이의 글인데도 뭔가 건조하고 틀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쓰지 않는 경우는 더더욱 만화책이 아니면 다양한 소리말과 모양 말을 접하기 어렵다.
모두가 공감하는 유머에 나 혼자 웃지 못할 때면 뭔가 소외된 기분이 든다. 같은 언어를 써도 세대가 달라지면 공감을 못하기도 하는데 언어가 다를 경우는 더더욱 어렵다. 외국인 친구들과 다 같이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의 어떤 말에 모두가 깔깔대며 웃을 때 전혀 공감하지 못했음에도 혼자 가만히 있는 게 멋쩍어 따라 웃는 경우. 혹은 미국 시트콤을 보다가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는데 도무지 왜 웃긴 건지...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는 경우.. 대부분 한 번쯤은 겪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보통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말로 유머를 듣고 이해한다면 그 사람의 언어 수준은 상당히 높다고 여겨진다. 유머를 이해하고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언어에 녹아 있는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Why can't you give Elsa from Frozen a balloon?
Because she will let it go.
예를 들어 위의 조크를 한번 보자. 이 조크를 듣고 웃을 수 있으려면 이 문장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에 더해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디즈니 만화영화 <겨울 왕국>의 내용을 알고 주인공 엘사가 'Let it go'를 열창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만화책은 또래 집단에서 공감이 되는 유머를 배우는데 좋은 도구이다. 나의 아이들은 <Dog Man>을 읽다가 미국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Knock Knock Joke'를 알게 되었다. 이 조크는 먼저 한 명이 'Knock Knock'하고 말하면 상대방이 'Who's there?'이라고 물어야 한다. 그다음 각자 자기만의 재미있는 조크를 만드는 방식인데 요즘 이 조크에 푹 빠져 시도 때도 없이 'Knock, Knock' 하며 나에게 문을 두드린다.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의 저자 짐 트렐리즈도 말했다.
만화책은 혼자 읽기의 좋은 출발점이라고.
어른이 되어 훌륭한 독서가가 된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는 만화광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