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보다 더한 재갈 시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거진 이름을 지을 때는 3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독립군과 독립군 잠은 간도특설대 조선 내에서 순사나 순사 길 안내잡이, 해방 이후 좌우 싸움, 자유당 시절 이기붕과 박마리아, 미군정 시기 모윤숙의 악행, 박정희는 5.16 혁명이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도 쿠데타라고 했고 우리말로 군사반란이라고 하셨다.
김재규가 박정희 시해로 개만도 못한 놈 만화를 보고 만화 그린 놈이 개만도 못하다. 김재규는 한세대 건너가면 재평가받고, 김재규 명령으로 총을 쏜 박선호나 박흥주 대령은 무죄라고 역사가 평가할 날이 오거라고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김명신이 라마다 르네상스에서 줄리 작가 그림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야기 유검무죄 무검유죄를 쓰다 보니 정말로 쓸 이야기를 못썼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 며칠 전 일이다. 할아버지에게 4촌 조카고 나에게는 6촌인데 그냥 5촌 당숙으로 불리던 분이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이유는 할아버지 형제들이 다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생존한 할아버지께 아뢸 말씀이 있다고 했다.
그분이 한 이야기의 요점은 김재규로부터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국가안전기획부 간부로부터 대학교 학생들 데모준비 동향을 편지지에 써서 주고 그 시절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40-50만 원 시절에 20-40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편지로 보고한 내용이 정확히 데모 일시와 인원 추산이 맞으면 40만 원을 받고, 차등으로 30, 20을 받았다고 했다.
양심상 계속 그 일을 하기는 싫고 바로 그만 두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긴 곰방대에 연초와 대마를 반반 섞은 수제담배를 피우시면서 일단은 김재규가 중정부장 하는 동안은 해주고 김재규가 중정부장서 해임되거든 그때 그만두라고 하셨다.
고교시절이라 수학 2점짜리 하나 더 맞고 명문대 가려고 그 대화를 더 듣거나 질문도 없이 도서관으로 갔다.
할아버지와 그 당숙 모두 고인이 되어 물어볼 수도 없고 할아버지는 김재규가 중정부장 오래 못 갈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시절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기자 해직이 2024년은 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