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웅산 둘레길 입구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늙은 호박
아침 이슬 머금고
가을 해살에 튼실해 진다
늦잠 자고 일어나 보니
할머니와 손자가 호박을 따서
보자기에 싸고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간다
뒷모습을 보는데
시나브로 눈물이 난다
검정교복 짧은 머리 시절
늙은 호박을 머리에 이고
원주역에서 비둘기호로
중앙선 청량리 역에 내려
지하철 1호선 대방역
플랫폼에서 어머니를 만나
늙은 호박 받아 들고
대방역 계단을 내려와
병무청을 지나고 중학교 언덕에서
팔아프다고 놓은 것이
떼굴떼굴 굴러 대로변 견치석에
박치기 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어머니는 보자기에 조각난 호박을
주섬주섬 담아 머리에 이고
십구공탄 벌겋게 열기 뿜는
조손이 사는 집에 왔다
애야 호박을 조심조심 다루지
이게 뭐냐 하는 할머니 말씀에
어머님 죄송해요
청량리 기차에서 내리다
발을 헛딛어 철로에 호박이 다
깨쳤어요
잘 씻어 호박죽 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머니 샛빨간 거짓말에
할머니는 아는 듯 모르는 듯
검정교복에 교모도 안쓴 채
대문 밖으로 달아났다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 샛빨간 거짓말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없고
개웅산 둘레길 입구
늙은 호박을 소중하게 들고가는
할머니와 손자 뒷모습만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