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년
요즘은 설날 세배도 직계 가족만 하거나 연휴가 길면 해외로 나들이 가는 사람이 많다 보니 세배에 대한 의무감이랄까 유대가 약화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설날과 다음 날은 세배에 목숨 걸었다. 일단 할머니 생신이 정월 초하루였다. 그러니 할머니는 태어나 돌아가실 때까지 생일상 겸 조상님에게 차례상이 겹쳤다.
외할머니는 정월 초삼일이 생신이었다. 떡이고 전이고 외할머니를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설에 만든 음식 그대로 생일상이었다.
평소는 강림에서 설날 일단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배 후 웃담 돌고, 시장통 돌고, 선계, 월현까지 세배할 분들에게 하고 나면 해가 졌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노루 잡으러 가듯 새벽밥을 먹고 아버지가 지게에 콩 한말, 큼직하고 토실토실한 암탉 한 마리를 다리를 묶어 지게에 실어 맏아들, 여동생, 여동생을 대동하고 운학리 외할머니 댁을 갔다.
그러던 어느 해 아버지가 다쳐 외가에 갈 수 없어 아이들만 갔다.
어머니는 계란 10개 한 꾸러미를 주면서 절대 깨지지 않게 조심조심 가져가라고 했다. 저와 큰 여동생 둘이 교대로 들고, 작은 여동생은 주지 마라고 했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반복하고, 쉬고 난 후에는 나와 경희가 달걀 꾸러미를 바꾸어 들었다. 강림서 선계, 월현을 지나 얼음이 언 주천강을 건너야 했다. 강 차 안에서 쉬고 대안에 도착하면 쉬기로 했다.
작은 여동생 경화가 오빠, 나도 한 번은 들어야지 오빠랑 언니만 들면 어떡해? 했다. 경희 눈치를 보니 오빠 한번 쉬어 표정이었다.
주천강 차 안에서 작은 여동생에게 계란 꾸러미를 들렸다. 강 거의 대안 도착 5미터 정도 남은 곳에서 경화가 미끄러졌다. 그래도 꾸러미를 안고 넘어져 10개 중 5개가 깨지고, 5개가 온전했다.
엉엉 울면서 오빠, 미안해! 하는 동생을 달래고, 깨진 달걀을 내가 두 개, 경희가 두 개, 경화 한 개를 먹였다.
남은 5개를 꾸러미를 헐렁한 것을 딱 5개가 흔들리지 않게 꾸러미 재포장을 했다. 거기부터 운학리 외할머니 댁까지는 경희와 내가 교대로 들었다.
운학리 초입에 우체국이 있었는데, 우체국 앞에 외할머니가 나와계셨다.
경화는 외할머니를 보자 달려가 안기고 엉엉 울었다. 울면서 할머니, 죄송해요. 엄마가 오빠랑 언니만 들고 갸라는 것을 제가 들었다가 다섯 개를 깼어요. 죄송해요 하면서 우체국장님이 들을 정도로 엉엉 울었다. 국장님이 울지마라고 뚝! 그치면 십 원 준다고 하니 그쳤다. 덕분에 경희와 저도 십 원씩 받았다. 그 시절 계란 한꾸러미가 15원 수준인데, 남매들의 두꾸러미를 받았어요.
외할머니는 여동생 눈물을 닦아주고, 경화야 네가 무슨 잘못이니? 애들만 보내면서 그냥 보내지 위험한 계란 꾸러미를 들려 보낸 네 어미가 한심한 년이라고 했다.
그 외할머니에게 한심한 년, 어머니가 2년 전에 돌아가셨다.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