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이는 강민철이다. 독신으로 살았으며, 미얀마 아웅산 테러범으로만 알려졌다.
그가 이 세상의 평범한 남자들처럼 한 여인을 사랑했고,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른다. 오마니 김분녀 뱃속에 씨앗을 심어 놓고 평양을 떠났다. 1983년 8월 여름이다. 1984년 7월 25일 평양시 보통강구역 작은 병원에서 내가 태어났다. 아바이 없이 태어난 유복자였다. 아바이 얼굴도 모른다. 오마니가 알려주어 본명이 강영철이었고 특수임무 수행을 위해 국가에서 여권 만들기 위해 가짜로 만든 이름이 강민철이었다.
1983년 여름에 이름마저 ‘미얀마’로 변경된 ‘버마’라는 나라에 전투원으로 떠났다. 일행은 아바이 보다 군사칭호가 높은 진영관 소좌 동급인 신기철 대위였다. 북이나 남이나 해외로 테러활동 나가는 인원을 특별한 대우했다.
군사칭호가 높은 진영관 소좌와 의견이 충돌하자 자기 의견을 접었다. 작전은 보는 이에 따라 성공이라 할 수도 있고, 실패라 할 수도 있었다.
1980년 9월 1일 제12 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취임을 경축하는 기념 담배가 나왔다. 전 세계에서 대통령이 취임한다고 경축 담배를 만드는 나라는 남조선뿐이었다.
1980년 담배를 만드는 곳은 전매청이었다. 현재 담배인삼공사 전신이다. 전매청장은 함영서였다. 그는 충북대학교 연초제조학과를 1962년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전매청에 특채로 들어갔고, 연초 제조 분야 최고 권위를 가진 박사였다.
경축 담배 이름은 ‘솔’로 지었다. 물론 담배 이름 작명도 그자가 했다. 솔의 담배 표지디자인은 정이품 소나무를 스케치 한 작품이다. 소나무의 일편단심, 충성심을 상징하여 작명한 담배 ‘솔’이었다.
‘솔’ 좌우로 봉황무늬가 그려있다. ‘경축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이라고 글씨가 새겨있다. 거리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간판이 모든 관공서에 나붙었다.
‘설악단’에서 특수 훈련을 받던 공작원 오수원이 탈영했다. 오수원은 솔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설악단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논산 훈련소나 사단의 신병교육대를 수료한 병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모집된 군인이었다.
국군정보사령부에서 별도의 모병 담당관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운동신경이 민첩하고, 담력도 어느 정도 있고, 최악의 경우 고문을 당해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을 사람을 물색하여 철저한 신원조회와 체력검정을 실시하여 합격한 인원만 설악단 요원이 될 수 있었다.
오수원은 담배 한 모금 깊이 빨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북한군 병사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다. 한 명은 초소 안에 있고, 한 명은 초소 밖에서 좌우로 이동했다.
오수원은 겉옷만 입고 하얀 내의를 벗었다. 투항한다, 월북한다는 표시로 흰색 내의를 흔들었다. 초소 밖에서 서성이던 초병이 발견하고, 초소 안에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분대장 동무! 저기 웬 놈이 흰색 속옷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디?
독수리바위를 봐요.
정말 저놈이 의거 월북을 한다. 확성기 가져오라.
예, 여기.
아, 아, 아 거기 하얀 내의를 흔드는 동무는 들으라.
의거 월북이면 내의를 왼손에 들고 흔들어보라!
오수원은 내의를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잡고 흔들었다.
북한군 초소에서 간단한 최초 신문만 받고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월북이유는 전두환 정권이 눈꼴이 사나워 의거 월북했다고 했다.
매일 9시 뉴스 땡! 하고 나면 TV 화면에 등장하는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이 오수원은 너무 보기 싫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월 초의 부산 마산지역 데모 수습 방법을 차지철은 탱크로 밀어붙이겠다고 하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민심은 천심이다. 민심을 똑바로 파악하고, 우리 중앙정보부가 보고하는 정보보고에 대하여 대통령 각하께서 관심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에 차지철이 끼어들어 각하!
까짓 거 탱크로 밀어붙이면 됩니다!
그 한마디에 분개한 김재규가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차지철을 향해 이 버러지 같은 놈! 하면서 권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에는 서울의 봄이 오는 듯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고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90%라는 경이적인 득표로 전두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치적으로 약점이 큰 정권의 공통점은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민들 피부에 직접 느끼는 정책을 편다는 것이다. 물가를 인위적으로 통제하여 물가안정을 이루었다.
통행금지도 없앴다. 학생들의 교복도 자율화했다. 학생들의 두발도 자율화했다.
방송국에서는 칼러 방송 송출 시간을 연습했고, 프로 농구, 프로 야구를 출범시켰다. 이른바 3S로 불리는 스크린(영화), 스포츠, 섹스 산업에 국민들의 눈을 잠시 정치에서 3S 쪽으로 돌리게 했다.
이민을 갈 형편은 못되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홀가분하게 월북했다.
오수원의 월북으로 북한은 남한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전두환 일당들이 정권을 잡는 일련의 사건 12.12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사진을 합성하여 전단을 만들었다.
북서풍이 불 때 고무풍선에 매달아 띄워 보냈다.
오수원의 진술 중에 남한의 중요한 외교 기밀을 털어놓았다. 작은 아버지 오현득이 외무부에 서기관으로 근무해 득문 사항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제3 세계 외교를 강화를 위해 인도와 버마를 방문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북한군 훈련소 중에서 고난도의 훈련을 하는 곳이 124 군부대다. 124 군부대는 1968년 김신조를 포함 31 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던 부대로 유명했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내려온 31 명 중 김신조는 생포되고 28 명 사살되었으며, 북으로 2명이 도주 복귀했다. 도주한 두 사람은 박재경과 이상규다. 박재경은 현재 북한 노동당 서열 22 위이고 대장으로 군사 복무하고 있다.
이상규는 그 후 다시 남파되었다가 부산 다대포에서 남한의 설악단 부대원 이기건, 이응일조에게 잡혔다. 이기건, 이응일은 탈영하여 월북한 오수원의 선배다. 붙잡힌 간첩이 이상규이고 그 당시 정보사령관이 육군 소장 이상규였다. 이상규, 전충남 다대포 간첩을 생포하고 신문한 최초 신문 보고를 받은 정보 사령관 이상규 장군은 상규가 상규부하에게 생포되었다고 했다.
124 군부대의 지휘관은 강창수였다. 강창수는 김일성과 함께 6.25 전쟁에 참가했던 ‘강건’의 아들이다. 강창수 부대에서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 3 명이 버마 특수 임무에 편성되었다.
이미 전투원으로 9 년 이상 복무하였고 강화도 침투, 거문도 침투 등의 경험이 있었기에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수영, 달리기, 외줄 타기, 두 줄타기, 세 줄타기, 총 격술, 태권도, 유도 등의 체력훈련과, 폭발물 제조, 무전기 송수신 등의 무기와 통신 훈련도 하였다.
정치사상 교육도 중요하게 이루어졌다. 이들 3 명을 위한 정치사상 교양 강의는 구국의 소리 방송 원고를 집필하던 ‘윤노빈 박사’가 맡았다.
진영관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는 백발이 성성한 윤노빈 박사를 쳐다봤다. 윤노빈은 강의실 스크린에 흑백 사진 한 장을 비췄다.
이인모 노인이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늙었지만 눈매가 부리부리 했다.
한때 최장기 비전향 장기수로 한국 언론은 물론 세계 인권 기관에도 석방하라고 공개요청 한 인물이다. 윤노빈 박사의 정치사상 특강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특수임무 3 명의 정치사상 교양을 맡은 윤노빈입니다. 전투원 여러분의 사상 무장이 투철하지만 그래도 다시 정치사상을 교양시키라는 김일성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 구국의 소리 방송 원고를 쓰다 말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전투원이 임무 수행을 하다 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면 바로 복귀하면 되지만 실패할 경우가 문제입니다. 실패할 경우 가장 좋은 것은 동무들이 휴대하고 있는 자살용 독침으로 자살을 하거나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것입니다.
당에서는 그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적들에게 모든 무기를 빼앗기고 자살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면 여기 사진의 이인모 영웅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인모 영웅은 남조선의 최장기 비전향 장기수입니다. 수령님께서는 이인모 노병에게 ‘영웅 칭호’를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불사조 이인모’라는 별명도 붙여주셨습니다. 수령님께서 남조선에 갈 수 없기에 이인모 아내와 자식들에게 영웅칭호와 영웅메달을 친히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불러 달아 주셨습니다. 전투원 세 동무들은 이 윤노빈이 출신 성분이 좋아 보입니까?
네.
아닙니다.
저는 출신 성분이 나쁩니다.
본디 남조선 사람입니다.
남조선에서도 가장 남쪽 부산입니다.
부산에 있는 국립 부산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철학을 가르치고 조용하게 살고자 했으나 남조선 정치가 놈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10.26 전에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이 데모한 것을 이 윤노빈이 뒤에서 사주했다고 뒤집어씌우고 교수 연구실을 압수수색 했습니다.
체포당한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 어시홍, 연선흠, 김태국, 김성태, 신명섭, 박영원, 신상균, 최성현, 김선미, 신난숙, 김선애, 김채란, 이시영, 서원석 등이 모두 ‘신성철학 연구회’ 소속이라는 이유로 이 윤노빈을 교수 연구실을 압수수색하고 나를 체포했습니다.
서울 서빙고 분실이라는 곳에서 이근안 고문전문가를 만나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더 이상 이놈의 나라에선 내가 더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 결론 내리고, 나의 또 다른 반쪽 조국 북한으로 의거 월북했습니다. 전두환 집권 초기라 나의 월북은 전두환 정권에게 타격을 줄 수 있기에 일체의 언론 보도가 통제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 서울 다음 큰 도시 부산의 국립대 교수가 북으로 월북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놀랄 것이고, 월북 이유가 전두환이 싫어서라고 신문에 보도된다면 그야말로 수치 아니겠어요?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나의 월북을 알고서도 모른 척 일체의 보도를 안 했습니다.
아니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지요.
괜히 죄 없는 시인 김지하만 구속수감 되었지요.
김지하와 나는 강원도 원주 중학교 동문이라는 이유로 그의 시 ‘오적’을 금서로 만들고 구속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