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빰-빠바- 빰 빠바-
진혼나팔 소리가 나고 2-3 분 후에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진영관 소좌는 나팔 소리가 난 후 시계를 봤다. 정확히 60초 지난 후에 스위치를 꾹 눌렀다. 탁 소리와 함께 쾅! 굉음이 터졌다.
번뜩이는 섬광이 지나가더니 천둥 같은 소리가 나며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통령을 기다리던 수행원들이 무너진 건물 아래 깔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줘! 비명을 질렀다. 서석준 부총리와 도열해 있던 대부분의 수행원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순간 묘지는 암흑이 되었다. 무너진 지붕에 깔린 사람, 폭발물 파편 철심에 맞은 사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 얼굴이 피범벅이 된 사람 그야말로 아비귀환이다. 묘소 지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테러의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 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하동선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 강인희 농림수산 부 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 민정당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의학박사 국군 지구병원 전문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 희 청와대 경호실 경호원, 정제원 경호원, 이충헌 동아일보 기자 등이 현장에서 순직했다.
여기에 버마 경호원 2 명과 버마 기자 2 명도 사망했다. 그 외 부상자는 50여 명에 달했다.
그 순간 대통령이 탄 차량은 아웅산 묘소를 향해 오는 중이었다. 영빈관에서 아웅산 묘소까지 거리는 5 킬로미터였다. 폭발이 일어난 시간은 10시 28 분이었다. 대통령이 아웅산 묘소 도착 2 킬로 미터를 남겨둔 상태에서 폭발물이 터진 것이다.
강민철 대위와 신기철 대위 진영관 소좌는 현장을 탈출했다. 북한으로 복귀하기 위해 랑군항으로 갔다. 동건 애국호가 재입항해 대기하기로 했었다. 강창수 부대장은 3인의 전투원에게 거사를 마치고 랑군 항으로 올 때면 동건애국호가 동무들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했는데, 랑군 항을 좌우로 살펴봐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진영관 소좌가 신기철 대위와 강민철 대위에게 명령했다.
두 동무들은 들으시오.
현재 랑군항에 우리를 태워갈 배는 없소.
그러나, 나는 조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소. 3 일 후 저쪽 랑군 항을 잘 볼 수 있는 능선에 밤 9 시에 만납시다. 각자 훈련한 도피탈출 실력을 맘껏 발휘해 꼭, 다시 만납시다!, 예, 알겠습니다. 조장 동무 건투를 빕니다. 신기철 대위는 랑군항 북서쪽으로 달아났다. 강민철 대위와 진영관 소좌는 남동쪽으로 달아났다.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신기철은 버마 경찰의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진영관 소좌와 강민철 대위는 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달아났던 강민철 진영관도 다음 날 10 월 10일 버마 군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순간까지 자신들의 테러가 성공한 것으로 알았다. 체포된 강민철과 진영관 소좌는 부상이 컸다. 얼굴에 수류탄파편이 박혔다. 진영관 소좌는 눈, 코, 허벅지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복부는 창자가 터져 나왔다. 강민철은 코,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고, 오른 족 귀 고막이 터졌다. 왼쪽귀로만 들어야 했다. 상처가 심해 합동신문은 두 명의 테러리스트가 어느 정도 회복 후에 진행하기로 하고 버마 당국은 군 병원에 이송해 치료에 전념했다. 군대 내 병원서 치료하자 일주일이 지나니 상처가 어느 정도 나았다. 범인 신문은 한국을 배제하고 버마 당국만 실시했다.
이유는 버마에서 한국을 테러 자작극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버마 경찰이 현장 조사에서 군악대의 나팔소리가 나고 2-3 분 후에 폭발이 있었다. 그 나팔을 분 군악대원을 조사하였다. 한국 경호원이 다가와서 나팔을 진혼곡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만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진혼곡 빰빠바- 빰빠바- 하는 진혼곡을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을 불렀고, 그 후 3 분 정도 지난 후에 쾅! 소리에 아웅산 묘소 천정이 무너졌다고 진술했다.
버마 경찰은 한국 경호원이 왜 그 시간에 나팔을 불게 했는지, 그것이 일종의 범죄 암호 신호로 의심했다. 버마 경찰은 한국 경호원 방상범 경호원을 불렀다. 왜 군악대 대열로 가서 나팔을 불게 했는가? 행사 전에 나팔소리 점검은 나의 평소 임무다. 그럼 행사 도열 전에 충분히 시간을 두고 미리 하지 행사장에 수행원들이 도열한 후에 한 이유가 뭔가?
방 경호원은 수행원들이 도착했는지, 도열했는지는 관심 없었다. 방 경호원이 체크해야 할 목록대로 체크를 하였는데, 모든 항목을 점검한 줄 알았는데, 수첩을 꺼내 리스트 하나하나 재점검을 해보니 군악대 점검이 빠진 것을 그때 발견하고 대열보다 20 미터 후방의 군악대 의장대 위치로 갔다.
군악 전체를 점검하기에 시간이 없어 주변을 돌아보고 이상 없기에 나팔수 나팔소리만 점검했다. 그래서 진혼곡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 연습만 시켰다.
버마 수사관의 질문에 강민철은 거짓진술을 하였다. 진영관 소좌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름은?
강민철이다.
나이는?
26세.
국적은?
대한민국.
학교는 어디를 나왔나?
서울 성북 초등학교를 1972년 졸업중고등 과정은 검정고시를 봤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2 학년 중퇴했다.
학번은 79 학번이다.
아버지 성명은?
강석준(59 세)
어머니 성명은?
김옥순(55 세)
그 외 가족은?
여동생 강미정(25세)
군대는?
대한민국 특수임무 수행부대 설악단
군번은?
997412
계급은?
대위
직속상관 이름은?
설악단장 대령 이민룡
침투 경로는?
해상으로 왔다.
어떻게 왔는가?
공해상 까지는 동건애국호를 탔다.
랑군항 입항 전에 미리 준비한 보트를 타고 항구 반대 편 언덕으로 상륙했다.
버마 당국은 위의 신문조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국 대사관에 진위 여부를 확인 요청했다. 주 버마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진위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공문을 접수받은 한국의 외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방부, 문교부는 합동으로 답변서를 작성했다.
한국 정부는 버마 대사관의 확인 요청에 조사를 했다. 1970년부터 1973 년 사이 성북초등학교 졸업생 명부에 강민철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서울대학교 79 학번에 강민철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이 강민철은 정치학과를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이고 야당 몫 부의장을 하던 박영록 의원 사무실의 사무장을 하고 있었다. 진술은 거짓이라고 한국은 버마 주재 대사관을 통해 버마 정부에 전달했다.
훈령 : 제1 호
수신 : 주 버마 대사
참조 : 참사관
제목 : 강민철 인적사항에 대한 답변
내용 : 1. 강민철 성북초등학교 학적부 확인 결과 강민철 없음(거짓 진술)
2.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79학번 조회 결과 강민철 있음, 현재 강원도 원주 횡성 국회의원 민주당 박영록 국회의원 사무실 사무장으로 원주에 있음(거짓 진술)
3. 군번 997412는 예비역 소령 김원태의 군번임(거짓 진술)
4. 설악단장 대령 이민룡 없음(거짓 진술) 역대 설악단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초대 단장 대령 백운택, 2대 대령 추대식, 3 대 대령 설동섭, 4 대 대령 정천수, 5대 대령 조성진, 6대 대령 강신기, 7대 대령 오현득, 8대 대령 신상우, 9 대 대령 이종진 10대 현재 대령 김상태가 하고 있음.
(1983년 10월 9일, 랑군 교민 토요학교)
전두환 대통령 수행원들이 아웅산 묘소로 떠난 시간에 영부인 이순자 여사는 교민 토요학교 행사에 참석했다. 랑군에 상주하는 한국 대사관 직원, 버마에 진출한 현대건설, 동아건설, 한진해운, 대우건설 등 한국의 상사 직원 부인들이 친목도모를 위해 매주 토요일 대사관 회의장을 빌려 하던 행사였다.
이역만리 버마에서 한국인들끼리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행사였다. 한참 참석자의 인사가 진행될 무렵 경호원이 들어와 행사중단시켰다.
1983년 10월 10일 , 서울공항 버마, 인도, 스리랑카, 브루나이, 뉴질랜드, 호주 등 6개국 순방을 하기로 떠난 17박 18일의 거대한 점보외교가 첫 순방국 버마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귀국했다. 떠날 때의 김포공항에서 출국성명을 낭독할 때의 자신감 대신 초조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경비가 삼엄한 서울 공항에 도착해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
이번 사건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조직적으로 바로 국가 원수인 본인의 생명을 노린 전대미문의 악랄한 음모의 소산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국가 원수인 본인의 위해를 획책하여 잔혹 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범죄의 원흉으로 전(全) 지구상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북한을 지목하는 것은 비단 우리 국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연전에 그들이 본인의 해외 순방을 틈타 캐나다에서 본인의 목숨을 노리다 발각된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적으로서 우리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하려고 집요하게 도발해 왔으며, 비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폭력과 유혈을 일삼는 살인범이라는 천하공지의 속성만으로도 이번 범죄가 저들의 소행임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중간 생략)
본인은 무수한 도전과 시련의 고비를 무서운 합심단결로 이겨온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저력이 어떠한 위협도 끝내 물리치고 우리의 생존과 안녕을 굳건히 지켜낼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와 결의로 오늘의 이 도전을 훌륭히 이겨 나가야 하겠으며, 본인은 신명을 다 바쳐 불의를 응징하고 평화와 번영을 구현하는데 앞장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83년 10월 10일
대통령 전두환
(1983년 10월 13일, 서울 여의도 광장)
육·해·공 3군 군악대의 중저음의 진혼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숨진 17 인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순국 외교사절 합동국민장으로 공식 명칭이 정해졌다. 하늘도 17 명의 아까운 인재를 비명에 가게 한 것이 애통한 지 구슬비를 뿌렸다. 잿빛 하늘 아래 서울대 부속 병원 영안실을 빠져나온 17 위의 연현이 종로 4가, 광화문, 중앙청 앞을 지나 마포와 서울 대교를 건너 여의도 광장으로 향했다.
감상협 국무총리가 조사를 낭독했다.
19 발의 조포가 울리는 가운데 영구차는 연도에 늘어선 국민들의 애도 속에 영결식장을 떠나 동작동 국립묘지를 향했다.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숨진 17위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들은 오열 속에 17 위의 안장을 지켜봤다. 영결식을 마친 여의도 광장은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장으로 변했다.
‘살인자 김일성을 지구상에서 몰아 내자!’
‘피를 나눈 동족을 향해 폭탄을 던진 전대미문의 살육행위를 전인류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등의 피켓과 현수막이 물결을 이뤘다.
유학성 반공연맹 이사장은 아무리 악랄한 북괴도당이라 하더라도 동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다면 이 같은 살인행위를 저지를 수 있겠느냐? 고 규탄했다.
이날 석간신문에 난 흑백사진 한 장이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한 소녀가 국립묘지 나무에 기대어 혼자 눈물을 삼키고 있는 장면이었다.
희생자 서상철 동자부 장관의 차녀 미경 양의 사진이었다.
1983년 11월 22일, 랑군 법원에서 강민철과 진영관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버마의 사법제도는 4 심 재판을 한다. 1심과 2심은 지방법원에서 하고 고등법원의 3 심과 대법원의 4 심이 있다. 아웅산 테러의 사건의 중요도와 국제적인 관심을 반영해 1,2 심은 생략하고 바로 랑군 법원에서 3 심이 이루어졌다. 특별법원이 개회되었다.
강민철과 진영관을 위해 랑군 변호사협회에서 2 명의 국선 변호인을 선임했다. 강민철과 진영관 은 버마 형법 제301, 302 조의 살인죄, 무기불 법 소지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장이 강민철에게 물었다. 강민철, 당신은 유죄를 인정하는가?
예.
진영관 당신은 유죄를 인정하는가?
......
대답이 없었다.
묵비권행사를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묵비권이었다. 철저히 주체사 상에 세뇌된 태도다. 테러 후 잡히기 전에 자폭을 하고 자폭이 여의치 않으면 일체의 자백을 하지 말고 묵비권으로 공화국의 치부를 드러내지 말라는 정치사상 교양이 뼛속까지 몸에 밴 진영관 소좌였다.
강민철의 국선 변호인은 강민철의 자백으로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형법에 명시된 ‘제보자의 특권’ 조항을 들어 면책 특권으로 감형이나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장은 테러리스트들에게 면책 특권은 없다고 모두 사형을 선고했다. 1984 년 네윈이 의장인 버마국가평의회에서 강민철은 감형되었다.
국제사회에 테러리스트의 전모를 밝혀 버마의 국제신인도 높인 점이 참작되어 강민철은 무기로 감형되었다.
진영관은 계속 묵비권 행사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84년 무기수가 된 강민철은 군대 내의 군교도소에서 민간의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984년 7월 25일, 평양 어머니는 아버지가 평양을 떠난 후 뱃속에 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평양 보통강 구역의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다.
사내였다. 남이나 북이나 남아선호 사상은 같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걱정이었다.
아비 없는 외손자가 측은했다. 별 방법이 없었다.
아기는 민철을 꼭 빼닮았다. 눈만 어머니를 닮아 컸지만 쌍꺼풀이 아니었다. 이름은 ‘영수’라고 지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아버지 강민철이 해외 나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애를 낳아 어떻게 키우겠냐며 지우라고 했었다.
어머니는 혼자 키워도 당당하게 혁명유자녀답게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려 아이를 낳았다.
동평양 중학교의 당 세포 지배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처녀가 애를 낳았지만 나는 부화로 애를 낳은 것이 아니고, 강민철이라는 전투원의 아내이고 다만 해외로 임무수행 가기 전이라 결혼 휴가를 낼 수 없어 결혼식을 못하였지만 양가 부모님의 승낙을 다 받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밀리면 어머니 박은경은 정말 한심한 부화 녀성이 된다.
그러면 평양서 추방당하고, 수학 교원도 끝이다.
이를 악물고 일처리 했다. 김일성 수령에게 신소를 올리고,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도 신소를 올렸다. 신소에 대해 김정일이 사실 확인을 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강민철이 실제 이름이 강영철이고 해외 파견된 전투원이라는 것을 학교 당 세포 지배인이 알아냈다. 어머니의 신소가 받아들여졌다.
신랑 강영철과 신부 박은경의 혼인신고, 아기 출생신고가 처리됐다. 아기 이름은 ‘강영수’로 올렸다. 아버지가 버마에서 무기수로 지내는 동안 나, 강영수는 평양 대동문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만경대 혁명학원’에 보냈다.
만경대 혁명학원 원장은 리오성 중장이었다.
리오성 중장은 김일성과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그래서 만경대 혁명학원 원장이 되었다. 다른 중학교는 교복을 입지만 만경대 혁명학원은 군관들 군복이 교복이다. 군관과 구분하기 위해 바지에 빨간 줄무늬만 넣었다.
멀리서 보면 군관 복장과 똑같았다.
군복의 교복을 입고 어머니에게 경례를 하였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도 경례를 했다.
경례를 받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 박은경은 빙그레 웃었다.
1986 년 9월 1일,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입학
남한은 3월에 입학을 하지만 평양의 학교는 9월 1일이 입학이다.
혁명학원의 일과는 군대식이었다.
교복이 군관 복지로 만든 것이라 고급이었다.
번쩍거리는 금색 단추에 군관 모자는 평양의 다른 중학교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입학식에서 리오성 원장은 훈시를 하였다.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우리 혁명학원은 입학생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피를 바친 혁명열사의 본을 받아 여러분은 밥을 먹어도 조국을 위해 밥을 먹고, 총을 쏴도 조국을 위해 쏘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용하는 연필 하나 총알 하나도 헛되이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김일성 수령님은 일제치하에 일본군 순사의 눈을 피해 엄동설한에도 조국 광복을 위해 쪽잠을 주무시면서 독립군을 지도하셨습니다.
남조선에서 많은 동지들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남로당 빨치산 활동’의 혁명 열사들 중에는 아직도 남조선의 좁은 감옥에서 조국 통일을 기다리는 ‘리인모 영웅’을 본받아 전향하지 않고 장기수로 남아있는 혁명열사가 43 명이나 있습니다.
오늘 뜻깊은 날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한다고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돼지고기 20 마리를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온몸으로 보호해야 합니다.
‘총 폭탄 정신’으로 무장하여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신입생 여러분이 공부도 군사훈련도 과학 탐구도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10년, 20 년 후에는 여러분 중에 세계적인 과학자가 나와 핵무기도 만들고, 미국 본토까지 날아가는 미사일도 만들고,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나와 남북통일의 초대 대통령도 이 혁명악원에서 탄생될 것을 나 리 오성 원장은 믿습니다.(박수)
여러분은 조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기 전에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전 교직원과 함께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박수)
입학식이 끝났다.
아침 6시 기상나팔소리에 기상하고 밤 10시에 취침 음악 소리에 맞춰 잠을 잤다.
연병장에서 체조를 하고, 구보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학과 출장을 간다. 모든 이동은 대열을 지여 이동했고, 이동 간에는 항상 군가를 불렀다. 우리 일행이 식당에 도착했다.
내가 구령을 붙였다.
일동 제자리 앉아!
식사시작!
감사히 먹겠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일어서! 구령이 떨어지면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섰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자기의 식기는 자기가 깨끗하게 세척해서 식기 보관함에 반납했다.
조선어, 소련어, 수학, 과학, 체육, 군사학 등의 반복 수업이 이루어졌다.
군사학은 제식, 총검술, 격파, 특공무술, AK 소총 분해결합, 고장발생 시 응급조치, 수류탄 제조 및 투척, 독도법, 통신 기기 조작, 암호문 조립 및 해역 등 일 학년에서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고난도의 훈련과목이 편성되었다.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군사학과 물리학에 흥미가 있었다.
나는 핵물리학자가 되어 핵개발로 미국 놈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핵보유 국가가 되는데 자신의 할 일이 있을 거라 믿었다.
1986 년 9월 2일, 부치지 못한 편지(은경이 민철에게)
강민철, 내 사랑하는 동무에게 드리는 바입니다.
여기 평양은 9월이라 선선합니다.
동무는 지금 어느 나라서 무얼 하시나요?
동무와 사랑을 나눈 1983 년 8월 한여름 밤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동무는 지금 어디 있기에 무정하게 흐르는 세월 동안 이토록 소식 한자 없이 지내십니까? 동무는 동무의 씨앗을 내 몸에 뿌린 줄도 모르시겠지요?
동무는 무정히 떠났지만 동무가 부린 씨앗은 내 몸속에서 1984년 7월 25 일 태어나 어제 9월 1일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늠름한 군관복의 교복을 입은 아들 영수의 거수경례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인 저에게 하였지요.
경례받는 마음이 얼마나 뭉클했는지 동무는 모르실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도 그러시더군요.
이 자리에 강민철 동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몸만 다치지 말고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살아서 돌아오시길 빕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바보라고 놀려도 다른 곳 시집 안 가고 영수 하나만 바라보고 잘 키울 것입니다.
당 세포 동무에게 말하고 위대한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 신소문을 올려 동무와의 혼인 신고 아들 영수 출생신고 다 마치고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에 보낸 것입니다.
아침 먹어도 저녁을 먹어도 동무가 문을 열고 올 것만 같아 가끔 문을 보며 먹습니다.
글재주 없는 제가 동무를 그리며 시 한수 적어봤어요.
오시면 제가 낭독해 드리지요.
민철 동무 그리워하는 시
- 박은경-
아름다워라 민철 동무 흙 묻은 전투복
그립다 그립다 민철 동무
갈매기 울던 바닷가에
꽃이 피면 나비 온다
은경 얼굴 곱게 단장하면
민철 동무 오실라나
그네 뛰는 아낙네들
올라가면 다홍치마
내려오면 하얀 속치마
은경 가슴 다 녹이여
민철 동무 보고 싶소
동무 동무 민철 동무
은경 눈물 안 보이오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오각별 내 귀걸이
다시 한번 걸고
민철 품에 안기고 싶어
1983 년 12월 24 일 아버지 강민철은 버마 교도소에 수감되어 ‘오각별 귀걸이’ 한 짝을 만지작거렸다.
은경 생각이 났다.
수인번호 3727, 은경은 아직도 이 오각별 귀걸이를 간직하고 있을까?
새로운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을까?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고향 강원도 통천의 부모님은 무사하신지.
여동생 미정은 시집을 갔을까?
내가 버마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다 불어버린 것을 혹시 사상이 부족하다고 혁명열사가 아닌 반당행위자로 낙인찍힌 것은 아닌지?
개성에서 마지막 훈련 과정에서 윤노빈 박사의 사상교육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