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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강민철

05. 무기수형

by 함문평

‘리인모 영웅’은 남조선 최장수 비전향 장기수라고 20년 이상 복역을 하면서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고 자기 사상을 올곧게 유지해온 것을 우리 모두는 흠모하고 따라 배워야한다는 백발이 성성한 윤박사의 음성이 이곳 인세인 감옥 천정에서 들리는 듯했다.

나도 여기서 20년을 보낸다면 윤노빈 박사가 아닌 다른 박사들이 후배 전투원 양성 교육에 ‘강민철 열사’는 머나먼 이국땅 버마에서 자신의 사상을 굽히지 않고 20년을 복역하였다고 말해줄는지.

은경은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서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하고 있을까?

1983년 여름 보통강구역의 아파트 4 층에서 은경의 몸을 품었던 순간이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은경 몸을 더듬고 키스를 하고 몸과 마음이 둘이 하나가 되었었다.

은경의 한쪽 오각별 귀걸이만 만지고 있으면 감옥 안에서도 민철은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5년, 10년, 15년, 20년, 25 년 도 지낼 수 있겠다.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죽을 고비에도 살 길이 보인다고 했다.

민철의 부적은 오각별 귀걸이 한쪽이다. 민철은 살아 평양으로 돌아가 은경을 다시 만난다면 한쪽 오각별 귀걸이를 은경이 간직한 오각별 귀걸이와 대조할 것이다.

그리고 약속대로 더 좋은 오각별 귀걸이를 속주머니에서 꺼내 은경 귀에 걸어주고 은경 귀를 만지고, 키스를 하고, 은경의 눈부신 알몸을 더듬고 다시 영혼과 육신이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내 나이 60 세 되어도 은경은 나를 알아볼까?

희미한 얼굴이지만 오각별 귀걸이를 서로 내밀고 짝을 맞추면 틀림없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 몇 만 리를 떨어져있어도 영혼의 끈은 서로 이어져 있음을 오각별 귀걸이가 증명해줄 것이다.

아버지 강민철은 감옥에서 버마 말을 익혔다.

무기수가 언제 나갈지 모르지만 어머니 은경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면 혼자 통역 없이 버마를 다닐 수 있을 만큼의 버마어 실력이 필요했다.

아버지 강민철의 버마어 선생은 이곳 인세인 감옥의 취사담당 마떼였다.

마떼는 한국에 불법 취업 갔다가 마약 운반에 가담되어 한국에서 버마로 추방되었다.

감옥 안과 밖은 담장 하나 사이로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담장 밖의 사람 사람은 누구든지 늦잠 잘 권리가 있지만 담장 안 죄수들은 기상 음악 소리에 선잠을 깬다.

마떼는 유창한 한국어는 아니지만 일생생활의 한국어 초보 수준을 하고 있어 아버지 강민철에게 서툰 한국어로 유창한 버마어를 가르쳤다.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버마어로 (밍갈라바)

어떻게 지내 시 나요?를 버마어로 ( 네 까웅 앨라 )

영, 제로는 ? ( 또 웅 냐 )

하나, 원은 ? ( 띳)

둘, 투는 ? (흐닛)

셋, 쓰리는 ? (또웅)

아버지 강민철의 버마어 공부는 하루 한 시간씩 계속했다.

버마어 공부를 마치고 나면 묵주를 들고 눈을 감았다.

기도를 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 김옥선, 아버지 강석준, 여동생 강미정을 그리며 기도했다.

평양에 있는 은경과 장인 장모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면 민철은 하루를 되돌아보며 일기를 썼다.

일기 형식이지만 사실은 보고 싶은 은경, 고향 통천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미정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1983 년 12월 26 일 교도소

원래 교도소는 범죄인들의 집합소다.

당연히 거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버마 교도소 수준은 너무 한심했다.

강민철은 스스로 나는 일반 잡범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절도, 살인, 강간, 상해 범들과 정치범 또는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같은 교도소에서 지내지만 사상 차원이 다르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교도소에서 교도소장, 부소장, 간부나 하급 간수까지 강간, 살인, 절도범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민철은 화가 치밀었다.

민철은 교도관에게 요구했다.

정치범, 테러범이니까 그에 상당한 대우를 해 독방을 달라고 했다.

독방이 아닌 7인 실 방으로 배정되었다.

군대와 병원과 교도소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나이 불문하고 들어온 순서로 위아래가 결정된다.

교도소 왕고참, 양 아웅은 살인범이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현재 7년 복역 중이다.

양 아웅은 아침저녁 점호에 불참했다.

불참해도 교도소 내에서 교도관이나 공익근무 모두 양 아웅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양 아웅은 완전 죄수들의 왕 노릇을 했다.

양 아웅이 민철의 통역 마떼를 불렀다.

양 아웅이 민철에게 머리박아를 시켰다.

민철은 마떼에게 양아웅 네가 뭔데 나에게 머리를 박아 시켜 ? 통역을 하게 했다.

교도소에 왔으면 왕고참 말을 하느님 말씀처럼 따르라고 했다.

오늘 너의 신고식이다.

민철은 왕고참에게 너는 예의도 도덕도 없느냐? 통역을 하게 했다.

양 아웅이 민철을 주먹으로 쳤다. 민철이 일어섰다. 태권도 특공무술, 폭파, 수영, 산악훈련 등으로 단련된 124 군부대원 400 여 명 중에서 3 인 선발하는데 최종 3인이 된 강민철을 양 아웅이 몰라 본 것이다. 민철의 발이 양 아웅 머리를 가격했다.

민철은 2 단 옆차기로 양 아웅 턱을 날렸다.

양아웅 입과 코에서 피가 나왔다.

민철은 양 아웅 눈을 까봤다. 이상이 없었다. 죽지는 않았다.

교도소 내 소문은 번개처럼 빠르다.

민철은 마떼를 불러 교도소 실천 사항을 통역시켰다.

나 강민철은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육군 대위 출신이다.

버마에 군대가 있듯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도 많은 군대가 있다.

장교와 하사관 병사의 계급이 엄격히 존재한다.

나는 장교 출신이다.

나는 일반 범죄자, 절도, 상해, 강간, 살인 등의 잡범과는 다른 사상범이다.

즉, 테러리스트 강민철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 내가 국가의 명령으로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테러를 하였지만 나는 도덕적 사상적으로 깨끗하다. 너희들 절도, 상해, 강간, 살인 같은 죄를 나는 지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나도 이곳 교도소에 수감된 이상 이곳의 규칙을 100% 지킬 것이다. 너희들도 교도소 규칙을 지켜라. 만약 지키지 않는 자는 오늘 양아웅처럼 나의 옆차기가 날아갈 줄 알아라.

이 시간 이후 점호 시간 지각하는 자, 불참하는 자, 식사 시간 작업 출장 시간 3 분 이상 늦으면 오늘 양 아웅이 나에게 2 단 옆차기 한방에 쓰러지듯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들은 코리아의 태권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 알 것이다. 나는 태권도 공인 5단 특공무술 3 단 유도 2단 도합 10단이다.

마떼가 강민철의 말 하나 하나 천천히 버마어로 통역을 했다.

이 사건 이후 버마 교도소는 소장이나 부소장 교도관 하급 교도행정직 모두 편하게 되었다. 교도소 규정을 어기는 자가 없어졌다.

1983년 12월 31일, 한해를 보내며

은경에게

보고 싶다, 은경.

평양을 떠나면서 버마로 간다고 말도 못하고 그냥 해외로 간다고 했는데, 미안하구나.

솔직히 나도 배를 타고 랑군 항에 와서 여기가 랑군 항 인 줄 알았지 배안에서는 숨죽여 지냈다.

우리의 거사가 민족통일을 위한 밑 걸음이라고 들었고, 지금도 내 신념에는 변화가 없다. 오늘이 12월 31일 내 청춘 한 살이 이 밤만 지나면 더해지는데, 난 한 해 동안 발전이 없고 발전할 수도 없음에 절망을 느낀다.

그래도 내가 자살을 하거나 자해 없이 지내는 것은 은경 네가 귀에 걸고 지냈던 ‘오각별 귀걸이’ 한 짝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난 힘들 때마다 이 오각별 귀걸이를 만지작거리지.

이건 내 부적이야.

힘들면 힘든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나에게 있는 그 상태로 버티고 지내라 그러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말해주거든.

은경, 이 밤 지나면 1984년 새해야.

새해에 은경 더 건강하고 훌륭한 선생님 되기 바란다.

만약에 교원 경연대회라도 있으면 나가 금상을 받기 바란다.

1983년 12월 31일. 버마 랑군 하늘아래

은경을 사랑하는 민철 씀

1984년 1월 1일, 아버님께

아버님 그간 안녕하신지요?

불초자식 민철은 아버님이 알지도 못하는 버마 랑군 교도소에서 이글을 올립니다.

이글은 강원도 원통으로 부칠 수도 없는 편지입니다.

부치지 못할 편지일망정 쓰지 않으면 제가 미칠 것 같아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여기 랑군은 통천보다 뜻합니다.

겨울이지만 원통의 가을 날씨 정도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죄수들은 차라리 겨울이 좋다고 합니다.

여름은 옆 사람의 땀 냄새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는 것, 죄수가 사회 사람보다 더 빨리 늙고 병드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새해면 아버님께 큰절 한번 올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할 텐데, 지금 제 형편이 아버님께 저의 생존조차 알리지 못합니다.

여동생 미정이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어디 혼처는 정했는지 궁금합니다. 어머니 관절은 좀 어떠하신지요?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내에 있어도 부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놈이 이역만리에 나와 있으니 더 죄송할 따름입니다.

버마, 랑군에서 정월 초하루

1984년 3월 3일, 봄볕이 그리워

랑군 교도소 작은 창문에도 봄볕이 방안을 따스하게 비춰줍니다.

교도소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볕이 어린 시철 통천에서 초가집 처마 밑 고드름을 녹이던 봄볕처럼 따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허락도 없이 저는 평양의 한 여자를 품었습니다.

동평양 중학교 수학 담당 교원 박은경 여성 동무입니다.

제가 여기서 언제 조국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으나 기회가 되면 아버님이 평양 보통강구역의 은경을 한번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교도소에서 맞는 봄이 왔지만 봄은 아닙니다.

버마 랑군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민철 씀

1984년 7월 27 일, 여름

내가 평양이나 개성에 있다면 오늘 7월 27일 전승기념일 행사를 볼 수 있는데.

이곳 랑군은 전승기념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날씨가 더워 땀 냄새 사람 냄새가 싫다.

정말 처음 겨울에 교도소 수감 때 죄수들이 지내기엔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날이다. 더위야 빨리 빨리 가거라.

1984년 8월 15일, 추석 명절

고향 통천에도 오늘 한가위 보름달이 떠 있겠지요.

이곳 버마 랑군의 보름달도 참 밝습니다.

어린 시절 통천에서 맞이하던 추석과 지금 먼 랑군 교도소에서 보내는 추석은 너무 차이가 납니다.

이곳 버마 교도소에서 추석을 명절로 생각하는 죄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 편지에서 언급한 은경이라는 여인의 얼굴이 꼭 보름달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보름달도 밝고 부모님과 제가 은경과 함께 한가위를 보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부모님과 은경이가 여기 버마에 죄수로 있는 것도 모르는데, 눈물이 납니다.

저 혼자 쓸데없는 공상만 하게 됩니다.

추석 명절에, 버마 교도소에서

고향을 그리며 민철 씀.

1984년 9월 1일

오늘도 마떼에게 버마 말을 몇 자 배웠다.

아버지는? (아페)

어머니? (아메)

할아버지? (아포)

할머니? (아퐈)

아들? (따)

딸? (따미)

남자? (야웃짜)

여자? (메잉 마)

1984년 9월 15일

오늘도 마떼가 저녁 식당 청소를 마치고 내 방에 와서 버마 말을 몇 자 가르쳐주었다.

안녕 하십니까? (밍갈라바)

잘 지냅니다. (네 까웅 바대)

감사합니다. (쩨주 핀 바대)

안녕히 계십시오? (또아 바오웅매)

안녕히 가십시오? (까웅 바비)

또 뵙겠습니다. (뛰야데 다 뽀)

1984년 12월 31일

또 한해가 가는구나.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어요.

은경, 보고 싶다.

은경, 사랑한다.

은경, 은경, 은경, 은경, 은경,

내 고향 강원도 통천

동해 푸른 바다.

평양 보통강구역 은경의 아파트.

내가 살아서 평양, 통천 다시 갈 수 있을까?

나는 이곳 버마 교도소서 또, 청춘의 한해를 넘긴다.

1985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김일성 수령님의 신년사를 읽고 싶다.

이곳 교도소에 노동신문 하나 안 보내는 버마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사나 참사 놈은 뭐하는 놈들인지 모르겠다.

나 강민철이 이렇게 노동신문에 난 수령님의 신년사를 보고 싶어도 관심도 없는 놈들.

내가 밥은 먹었는지 관심도 없고 약간의 영치금이라도 넣어주면 좋겠는데, 어느 놈 하나 관심 두는 자가 없다.

차라리 이곳 교인들이 교회서 돈을 모아 위문 오는 것이 반갑다.

내가 나가 당에 고발하면 비판받을 놈들 한둘이 아니다.

새해 수령님의 신년사는 못 봐도 수령님과 당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김일성 수령님 만수무강을 빕니다.

1985년 정초 버마 교도소에서

전투원 강민철 드림

1985년 1월 3일

버마 교회에서 교도소 위문을 왔다.

과자, 빵, 음료수, 과일 등 푸짐하게 나누어 주었다.

가장 반가운 것은 치약 칫솔이다.

영치금을 넣어주는 죄수들은 그 돈으로 칫솔도 치약도 사지만 나는 아무도 영치금을 해주지 않으니 칫솔이 솔이 완전히 누웠다.

오는 교회 위문품 속에 들어 있는 새 칫솔로 이빨을 닦으니 약간 피가 났다.

그래도 개운해서 좋다.

조선민주주의공화국에도 이런 교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왜 수령님은 교회를 봉수 교회 하나만 남기고 다 없애셨는지......

교회 위문품 새 칫솔로 개운한 정초다.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1985년 2월 16일

오늘은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생신이다.

개성이나 해주에 있었으면 고기 한 점 맛 봤겠는데,

여기 버마에는 고기 한 주는 일 없다.

전 세계 다른 교도소도 이 모양인지, 식사가 말이 아니다.

정말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먹는 식사다.

아 나도 누가 영치금 좀 넣어주면 좋겠다.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1985년 4월 5일

봄볕이 따뜻하다.

감옥에서 맞이하는 봄도 봄이다.

한시에 봄이 왔어도 봄이 아니다(春來不似春)라는 한시도 있지만

여기 교도소에도 봄이 왔다.

나무의 파릇파릇 새잎을 보니 평양 희수 생각이 난다.

통천 아버지 어머니는 잘 계신지

여동생 미정이는 시집을 갔는지 궁금하다.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어요.

은경, 보고 싶다.

은경, 사랑한다.

은경, 은경, 은경, 은경,

내 고향 강원도 통천

동해 푸른 바다.

1985년 4월 15일

오늘은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의 탄생일이다.

조국에 있었으면 돼지고기에 특식이 왔을 텐데 여기 버마 대사관 놈들은 뭐하는 놈들인지 전투원에게 면회 한번 오는 법이 없구나.

나는 수령님을 위해 폭탄테러를 했는데, 수령님은 나를 감옥에서 빼주지도 않는구나...

이래서야 누가 전투원 총폭탄 정신으로 할까?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1985년 7월 27 일

오늘이 전승기념일이다.

이 뜻 깊은 날 나는 교도소에서

힘없는 나날을 보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은경 오각별 귀걸이 한 짝만 보면

부적처럼 생각이 달라진다.

나 강민철은 꼭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은경을 다시 만나고

통천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미정이도 만나야 한다.

보고 싶은 얼굴

은경,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미정이 .......

버마 교도소에서 잠 못 이루는 밤에 민철 씀

1986년 9월 19 일

제 10회 서울 아시아경기가 내일부터 열린다.

오늘이 전야제 하는 것을 버마 국영 방송이 녹화 방송으로

내보냈다.

서울 동대문 운동장이라고 자막이 나왔다.

너무 화려하고 좋다.

놀랍다.

남조선 거지가 많고

미군들이 먹다 버린 소시지를 가져다

부대찌개 해먹는 남조선이

저런 아시아경기대회를 치르다니

놀라울 뿐이다.

우리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시아경기대회 할 날이 오겠지

버마 교도소에서 강민철 씀

1986년 9월 20 일

어제 전야제에 이어 오늘 정식 개회식을 했다.

3 개의 대형 북이 울리는 가운데 식전 행사 영고가 펼쳐진다.

서울의 여러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연합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등장했다.

마스게임도 잘 했다.

마스게임 하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가장 잘하지만

서울 학생들도 못지않게 잘한다.

우리 조선은 한 핏줄인 게 분명하다

남이나 북이나 남에게 보여주는 행사는 잘한다.

같은 방 죄수들이 저기 서울이 너의 나라냐고 물어서

아니다 저기는 남쪽 조선이고

나는 북쪽 조선이라고

지도를 보며 설명해주었다.

버마 교도소에서 강민철 씀

1987년 12월 31 일

오늘이 지나면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내가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떠나 버마 교도소에 수감된 지 5 년이 된다.

아! 5년, 아까운 내 청춘 이렇게 교도소서 사라진다.

보고 싶은 얼굴

아버지, 어머니, 은경, 미정,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은경 오각별 귀걸이 한 짝만 보면

부적처럼 생각이 달라진다.

나 강민철은 꼭 살아야 한다.

1988 년 1월 1일, 새해

교도소에서의 새해

별 의미 없는 새해다.

그래도

나는 여기서 포기해선 안 된다

이 귀걸이 오각별이

민철아 참아

그래야 나중에 은경에게

오각별 귀걸이 전해주지 한다.

버마 교도소에서 민철씀

1988 년 2월 16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전투원 강민철은 버마 교도소에서

청춘을 철창에 묻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데

지도자 동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나요?

이거 일본 제국주의 시대 무장 투쟁

조국해방전쟁시기와 지리산 빨치산 부대원들은

마음대로 활개 쳤는데,

이 전투원은 새장 속의 새처럼

주는 먹이 쪼아 먹듯

주는 교도소 1 식 3 찬으로

근근이 연명하는데

오늘 지도자 동지 생신이건만

제가 해드릴 것도

지도자 동지께 받을 것도 없는

무료한 하루가 저물었다.

그래도

지도자 동지 생신 축하드리고

언젠가 나를 이 철창에서

빼내주시기 바랍니다.

버마 교도소에서

강민철 전투원 올림

1988 년 9월 16 일. 제 24 회 서울 올림픽

제 24회 서울 올림픽 전야제가 방송되었다.

교도소에서의 남조선 올림픽 방송을 봤다

하나의 조선이라 생각하면 나도 기분이 좋다

두 개의 조선이라고 생각하면

배가 아프고 부럽다.

화려한 음악과 가수들 음악 율동

너무 현란하다.

1988 년 9월 17 일, 서울 올림픽 개막

제 24 회 서울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녹화방송 되었다.

서울 놀라운 모습이다.

굴렁쇠 굴리는 어린이가 참 귀여웠다.

평양에 있는 은경도 이 방송을 녹화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94 년 7월 8일

점심시간에 뉴스를 봤다.

특별 뉴스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일성 수령님이 서거하셨다.

눈물이 났다.

수령님은 내가 살아 돌아갔을 때

나에게 훈장을 주실 분인데

이렇게 서거하시면

난 뭐야?

고생한 보람도 없이......

말 그대로 개죽음이지.

개죽음.

개죽음.

개죽음.

개죽음.

1995년 12월 31일

또 한해가 간다.

83 년에 버마 감옥에 들어와

십년 지나 십이 년 되었건만

버마 잡범들은 하나 둘 나가는데

조국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통일의 초석이 되고자 미제국주위 앞잡이 전두환 일당을 처단하려다 피라미만 잡고 대어를 놓친 전투원 강민철은 조국에서 위문 한번 오는 법 없구나

이래서야 어디

후배 전투원들이 목숨 걸고 전투원 한다고 나서겠소.

지금 생각하니

사살 당한 신기철 동지

묵비권으로 사형 당한 진영관 소좌가

참으로 부럽소.

나도 묵비권으로 사형이나 당할 것을 이렇게 긴 세월 구차하게 교도소에서 늙어가다니 정말로 내 자신이 한심하오.

나도 감옥서 옥사하려 해도

나의 부적 은경이 귀에 걸었던

부러진 오각별 귀걸이가

내 맘을 흔들어 죽을 수가 없다.

칫솔이 다 닳았는데 새 칫솔 하나 얻으려면

버마 교회 교인들 면회나 기다려 봐야겠네.

버마 교도소 강민철 씀

2008 년 5월 18일, 랑군 교도소

25년이나 아버지 강민철은 버마 감옥에서 보냈다.

20대의 청춘, 겁이 없던 아버지 강민철도 50 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다.

나이 들면서 꿈에 흉몽을 많이 꾸었다.

꿈속에서 민철과 은경은 대동강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보통강 다리를 걸어갔다. 정체불명의 벤츠가 은경을 들이받았다.

민철은 악! 은경의 비명에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아니 은경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나?

민철은 고향 통천이 꿈에 나타났다.

마떼가 왔다.

마떼와 민철은 버마어로 말을 하거나 한국말로 말을 했다.

교도소에서 버마 말을 마떼가 민철에게 가르치고, 어느 정도 버마어가 수준에 오르자 민철이 마떼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버마 다른 죄수나 교도관이 들으면 곤란한 내용은 민철과 마떼는 한국말로 대화를 했다.

마떼, 어제 꿈을 꾸었는데, 평양에서 내가 애인과 나란히 길을 가다가 애인 은경이가 차에 받혀 죽는 꿈을 꾸었어.

꿈은 반대라고 하지? 아마 애인에게 좋은 일이 있나보다.

그래, 좀 좋은 일이 은경에게 있었으면...... 민철은 눈물이 흘렀다.

은경은 아직 나만을 기다리며 시집 안가고 있을까 장인 장모의 성화에 못 이겨 시집을 갔을까?

1983년 11월 10일 잡히던 날이 생각났다.

수류탄으로 자폭하려고 안전핀을 뽑았다.

머리 위로든 순간 펑! 터졌다.

최소한 안전핀을 뽑고 목표물을 정해 던지는 시간을 고려해 3-4초 후에 터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건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지는 순간 신관이었다.

민철은 은경을 생각하고, 은경 생각이 나자 주머니 은경의 ‘오각별 귀걸이’ 한쪽을 만졌다.

지금까지 사상교육 받은 대로 자폭하려던 생각이 이 오각별 귀걸이로 인해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자폭하라는 의지를 눌렀다.

그렇다 나 강민철은 이 오각별 귀걸이가 부적이 되어 죽음의 순간에도 나를 죽음에서 생으로 인도하는 부적이다. 나는 이 부적을 지니고 있는 한 죽어서는 안 된다. 꼭 살아서 은경에게 오각별 귀걸이를 마주 대 징표를 확인하고, 새로 구입한 오각별 귀걸이를 은경 양쪽 귀에 걸어주고 목덜미에 키스를 해야 한다.

나 강민철은 죽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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