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25 년을 보내다 보니 강민철도 ‘습관화된 무기력증’에 걸렸다.
밥을 먹어도 밥맛이 없다.
창밖을 봐도 희망이 없다.
흰 구름만 무심히 흘러갔다.
25년 수감기간 동안 교도소의 규정을 어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번 성탄절에 모범수로 풀려날 수 있을까?
이곳 교도소에서 풀려나면 평양으로 가야 하나 아니 남조선으로 갈까 이도 저도 아니면 미국으로?
일본으로 갈까?
이런저런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요즘 들어 민철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원래 통천에서 어린 시절 다부진 놈으로 동네 소문이 자자했다.
강창수 부대에서 잘 먹고 고난도의 훈련을 잘 넘긴 몸이지만 이국땅 버마에서 25 년의 수감생활이 그의 건강을 조금씩 조금씩 나쁘게 했다.
교도소에 랑군 국립의료원 구급차가 도착했다.
감옥에서 구급차가 강민철을 태우고 랑군 국립의료원에 도착했을 때, 민철의 몸은 맥박이 멈춰 있었다.
유언 한마디 없이 50 중반의 테러리스트 나의 아버지 강민철은 그토록 바라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2008년 5월 18일, 오후 4시 30 분이었다.
국립의료원 의사가 시체에 부분을 검사하고 사인은 간암이라고 진단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강민철의 유품은 망가진 한쪽 오각별 귀걸이, 그리고 랑군 관광기념품 판매점에서 1983년 10월 8일에 구입했던 오각별 귀걸이 3 세트, 나무십자가 묵주 하나가 전부였다. 아버지 강민철의 시신은 북한 대사관에서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한국 대사관에서도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국립 버마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해 인야인 호수에 뿌려졌다.
국가를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둔 아바이 유해는 몰라도 화장한 가루는 유족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아바이가 남한으로 변절한 것이 아닌데 나에게 혁명가 후손으로 국가가 뭐 해준 것이 없다.
결심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