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먹기 힘든 사람. 86

나를 키운 것은 조부

by 함문평

1980년대 대학생들은 백기완, 이영희 두 분의 책을 많이 읽었다. 이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 날개로 날듯이 우리의 지식이나 지성이 어는 한쪽에 쏠리지 말라. 좌우균등한 양식을 채우라고 해도 그의 저서는 좌파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혔다.

골 때리는 일은 판매금지처분 책이 음지에서 더 많이 팔렸다.


백기완 선생은 자신을 키워준 것은 어머니와 가난이라고 했다. 작가는 지금이 제일 가난하지 학생시절은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

왜냐하면 장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할아버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다. 20대 대학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를 키운 것은 휴강이었다. 1980년대 전두환 통치시기에 대학생은 386으로 지칭되는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휴강이 많고, 교수님 강의 취소되면 교재나 교수가 칠판에 써주거나 과대표를 시켜서 책 제목만 알려주면 책을 사든 빌리든 리포트를 썼다.


책살 돈이 아까운 친구는 도서관에 책을 다른 사람이 대출 중이면 반납을 기다려야 리포트를 썼다.

장손이라 할아버지가 매년 소 두 마리는 대학 등록금, 소 세 마리는 장손 생활비 및 문화비로 주셨다. 할아버지 개념의 문화비는 손자가 의, 식, 주에 들어간 돈 외에 책을 사거나 술을 마시거나 연애를 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다 문화비였다.

이유는 나의 할머니는 우암 송시열 후손이라는 것 외에는 미인이 아니고, 한자는 물론 한글도 아라비아 숫자도 몰랐다. 서울 대방동에서 수유리 4.19 묘지 근처 막내 작은집을 가도 혼자 못 가고 꼭 내가 같이 가거나 할아버지가 동행했다. 나의 증조부가 친구와 술 한잔 하시면서 사돈 합시다 해서 이루어진 결혼이라 할아버지는 맘에 없는 할머니와 평생 사셨다.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 형제 고모도 모르는 비밀 하나가 있다. 세계적 석학 임어당의 여동생이 할아버지 애인이었다. 만주, 상해, 북경, 심지어 하얼빈까지 할아버지가 아편 팔아 군자금 만든 것을 김구 선생과 김일성에게 은밀한 군자금 연락책이 그녀였다.

서로 사랑했기에 목숨 건 심부름도 해주고, 중국어 통역도 해주었고, 두 사람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광복이 왔을 때,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조선으로 가지 말고 대만으로 가서 살자고 하는 것을 미안하다. 그동안 말 못 하고 지낸 것이 있는데, 조선에 우리 부모가 정해준 아내가 있다.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부모가 정해준 여자보다 자기와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겠니? 하는 것을 나와 너 둘만 생각하면 맞지만 조선에 나를 기다리는 부모형제자매 마음은 없지만 부모가 정해준 여자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하고 귀국했다. 그 말은 정말 안호상이 문교부장관 시절 한국 방문하고, 비공식으로 임어당이 할아버지를 수소문해 만나서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영화가 되게 해 보라고 하셨는데, 아직 못했다.

할이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의 청춘 시절

나의 요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혼밥 먹기 힘든 사람.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