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추억. 88
검정 교복으로 경기도와 서울시 경계선 상의 헌병 검문소 통과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매형은 병장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갔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횡성에서 결혼하고 잘 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 셋이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은 흑석동에서 좀 큰 집이었다. ㄷ 자 모양 집에 대문 열자마자 왼쪽은 우리가 사는 방, 지나서 가운데 마당이 있고, 한가운데 상수도 아닌 수동 펌프가 있었다. 그 펌프를 지나면 주인이 사는 안채가 있고, 안채에서 우리 방과 마주 보게 방 하나, 부엌 하나가 있었다.
여기는 경주에서 올라와 모 대학교 교육학과에 다니는 누나와 84번 버스 화계사에서 흑석동 왕복하는 버스 안내양을 하는 그녀의 언니가 함께 생활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1년 전 어느 일요일 누나가 나를 불렀다.
학생 죽어라고 좁은 방에서 공부만 하면 안 된다고 자기와 산책을 하자고 했다. 달마사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여자 혼자 가면 불량배 만나면 대처하기 곤란하니, 나보고 애인처럼 손을 잡고 가자고 했다. 산길이라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반복해서 달마사까지 올라갔다.
달마사 조금 아래 블록담장 집이 있었다. 밖에서 담장 안으로 돌을 하나 던지니, 안에서 누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정상적인 가정집도 아니고, 공장도 아닌데, 여러 명의 형, 누나들이 말없이 분주하게 무엇인가를 했다.
쉬었다 합시다! 소리와 빵과 콜라를 나누어 주어 하나 얻어먹고 나왔다. 누나는 오늘은 약속 위치만 알아보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필요하면 검정교복 입고, 빈가방으로 약속 장소로 오라고 하면 여기로 오라고 했다.
중간고사 기간에 누나가 약속장소로 오라고 했다. 저 월요일부터 시험인데요, 했더니 과목을 물어봤다. 수학하고 한문이요. 야, 너 수학 잘하고, 한문은 할아버지가 한글 보다 천자문을 먼저 가르치셨다며?
예, 그래도 시험공부는 해야 되는데, 했더니 심부름 마치면 예상문제 만들어준다고 했다.
교복 입고, 모자 쓰고 빈가방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니 나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학교 남, 녀 학생이 교복에 빈가방으로 와서 각자의 누나, 형이 담아주는 유인물을 가방에 담고 산을 내려갔다. 나는 신촌 연세대학교 근처 모 다방에 전달자였다. 들어가면서 사장님 부탁하신 물건 왔어요! 외치면 다방 마담이 특별 대우해 주었다.
특수임무를 마치고 오니, 누나가 수학 예상문제 10개를 풀라고 주었다. 세상에 월요일 수학시험에 24문제 중 9문제가 같거나 등호 다음 숫자만 다르게 나와서 놀랐다. 그리고 1979년 고3이 되었다. 예비고사, 본고사 준비를 나름 4당5락이라고 했으나 전후기 다 떨어졌고, 2월 졸업식에 죄없는 교복을 북북 찢어버렸다.
어쩌다 신촌에 가면 그때 다방이 핸드폰가게로 변했지만 검정교복의 유용함, 경찰 불심검문 생략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