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창고. 14

by 함문평

분(憤)

탕!

한발 발사했다.

손으로 권총을 막는 바람에 빗나갔다.

피를 흘리며 화장실로 도망쳤다.

뒤뚱거리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만 하늘이 준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영원히 민주는 올 수 없을 것 같아 비장한 각오로 방아쇠를 당겼다.

“정치를 버러지 같은 놈 말을 들어 하지 말고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부산 마산지역 시위를 노숙자, 건달불량배가 김 영삼 추종자 부추김을 받아 시가지로 나온 놈들이라 탱크로 밀어버리겠다고 보고했다. 총독은 그 말을 믿었다. 그렇게 많은 예산을 쓰고도 데모하는 놈들 파악도 못하느냐? 질책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도 유분수지.

“각하, 탱크로 밀어버리겠습니다.

탱크로 밀어버리면 바로 종결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빙그레 웃으며 눈초리가 올라갔다.

“임자 뜻대로 해?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명치 아래서 치밀어 오르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천자문도 못 읽어 본 놈이 충(忠)을 알기나 해? 충이 객지 나와 고생이 많구나? 나도 일본 교육을 받았지만 정신만은 조선의 선비정신을 간직하고 싶었다. 전방 군단에 근무 때도 공관에 퇴근하면 근무병에게 먹을 갈게 했다. 위국헌신(爲國獻身) 네 글자를 습자를 했다.

그를 제거해야 이 땅에 민주주의 새살이 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추종하는 신도들이 판치는 땅에서 민주라는 꽃을 피우기 전에 시들어 죽을 것이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틈만 나면 김일성을 들먹였다. 김일성 동상 세우는 것은 우상화이고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우상화가 아닌가? 학생들에게 뜻도 모르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고 오후 여섯 시만 되면 걸어가던 시민들을 멈추게 하고 저 멀리 동사무소에서 들려오는 애국가에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게 했다.

날아가는 새들도 애국가가 나오면 가지에 앉았다가 곡이 끝나면 다시 날았다. 군단장 시절에 공관 철조망을 반대로 설치했다. 외부에서는 안으로 철조망을 넘을 수 있지만 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Y자의 긴 쪽을 공관 안에 설치했다. 작전참모와 공병대장이 놀라서 아니, 외부 침입을 막는 철조망을 이렇게 하시면 안 된다는 것을, 열쇠 잃어버리면 철조망을 넘어서라도 들어갈 수 있게 반대로 치는 거라고 둘러댔다.

성탄절에 그가 전방부대에 위문품을 가져와 전달하면 9시 뉴스에도 헤드라인이고 대한뉴스에도 편집되었다. 연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위문 왔을 때 공관에 감금시키고 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즉각 방송으로 내보내려했다. 수첩을 분실하는 바람에 원문을 알 수 없지만 하야성명을 기억해 본다.

(하야성명)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동안 국민 여러분에게 잘 살아보세! 구호와 총화단결! 멸공통일, 반공을 국시로 불철주야 노력을 했습니다만 전국에 한국적 민주주의가 세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도 있고 학생들에게 검은 교복과 교련복으로 학교를 군대조직으로 만든 것을 후회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한 것 또한 영재들의 잠재력을 고정된 틀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본인은 자리에서 물러나 5.16직후에 민정이양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늦게나마 실천하고 평범한 농부가 되겠습니다.

국무총리가 본인을 대행을 하고 체육관 선출이 아닌 직접투표로 뽑는 대통령을 맞이하기 바랍니다. 국회의원들은 민주헌법을 만들어주기 바랍니다. 전방에서 이 추운 날씨에 국민의 안위를 위해 철통경계를 하는 국군장병 여러분!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하야성명을 녹음시키려 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동부전선은 양양군단만 방문하고 돌아갔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세월이 지나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현장을 방문했을 때 사고를 가장한 사망을 하였다면 온 국민들에게 추앙받았을 것을 기회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중앙정보부장에 지명되었다. 연락을 받고 놀랐다. 날아가는 새들도 동작 그만 하면 멈춘다는 자리를 맡다니 기쁘고 겁이 났다. 인간적으로 신뢰한 만큼 나도 그에 대한 신뢰는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이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저격을 했지만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해라면 믿어줄까? 이 정도에서 영구독재를 중단시켰으니 다행이지 유신시대가 새천년을 맞이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1970년대야 그럭저럭 국정지표니 국정철학을 발표하면 믿어주지만 1980년대는 총독이 국정지표를 언급한다고 젊은이들이 들어주겠어? 총독 긴급초치 1호,2호,3호,4호,5호,6호,7호,8호,9호까지 선포해도 데모주동자들은 늘어만 가고 부산 마산 시민들이 학생들 데모하는 곳에 빵과 음료수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민심이 정권보다는 학생들에게 있다는 뜻이고 민심은 천심인데 그걸 마지막까지 몰랐다.

캄보디아도 300만 명 탱크로 밀었다는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뜻대로 하라는 말에 원래 기고만장한 놈이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경호실 연병장에 국기강하를 한답시고 허름한 나라의 대사들과 장군 몇 명을 불러, 대위 출신이 장군을 부리를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고, 바위를 만나면 양 옆으로 갈라져 흐른다. 바위를 지나면 다시 하나로 합쳐서 흘러 작은 물이 큰 강에서 만나 먼 바다로 흐른다. 헌법이라고 하는 한자어 헌법(憲法)은 법(法)이 물수(水)에 거(去)가 합쳐진 말이다. 물이 흐르듯 가는 것이 법이고 법 중에 으뜸이 헌법이다. 헌법이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지만 이제와 굳어진 헌법을 으뜸법이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다.

무신천대학교 채 수석 교수의 강의는 거침이 없었다. 19XX년 무심천대학교 507강의실 헌법학 교실은 중앙정보부 충청지사의 주요 감시 교실이었다. 강의실이 넓으면 어느 구석에 도청장치를 설치할 수도 있었으나 채 교수 강의실은 작은 40 명 정도 들어가면 곽 차는 교실이라 교수가 교단에서 보면 맨 뒤까지 한눈에 보여 어디다 도청장치를 할 수가 없었다.

충청지사 무심천대학 파견관 김 사무관은 도청장치가 없으니 복도를 지나가면서 슬그머니 채 교수 강의실에 강의를 엿들어보거나 학생들을 접촉해 커피를 사주면서 노트를 빌려보는 방식으로 정보보고서를 작성했다.

김 사무관은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중위로 전역하여 중앙정보부 7급 특채로 들어갔다. 체육교육과를 나와 체력도 튼튼하고, 군대서도 단기복무자지만 장군 전속부관을 하고 전역했기 때문에 장군들 모시는 예의범절이 투철했고 상황판단도 빨랐다.

유신사무관이라고 육사 졸업하고 5년차 대위로 전역한 사무관이 득실거리는 부서에서 진급을 했다. 서기관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비석에 김XX 장군, 김 XX의사로 새기면 누군가가 와서 ‘장군’과 ‘의사’를 망치로 훼손했다. 탕! 탕! 거사가 없었다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어느 세월에 왔을까? 역사적 평가가 인색함에 서운하다.

1963년 초판본 <國家와 革命과 나>에 보면 5.16 민족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는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 혁명이며, 국가의 재건 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 혁명이인 것이다.(박 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27쪽)

솔직히 5.16에 처음부터 가담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주체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혁명 노선을 뒤늦게 합류한 사람으로 공부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읽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경상도 출신이고 사범학교 나온 사람이라고 각별히 생각해 좋은 보직을 주었다. 인간적인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살았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고마운 것과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가 추구하는 유신국가와 민주공화국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말이 좋아서 시월유신이지 유신헌법은 헌법도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에 있으나 누구 하나 유신헌법이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간첩으로 사형을 시키거나 무기징역을 대법원에서 판결을 했다. 유신헌법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공작을 했다.

1979년 10월 중순에 부산 마산 지역에서 데모가 발생했다. 직책이 정보부장이라 잠행하여 사태를 파악했다. 신문보도에는 부마사태를 이 지역 공돌이 공순이들이 김 영삼의 사주를 받아 데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산역 광장을 볼 수 있는 허름한 골목에서 데모를 살폈다. 식당에서 국밥에 막걸리를 마시는 시민들과 대화도 했다. 신문보도와 반대되는 보고를 했다. 부산경찰서에 연행된 인원이 1000 명이라면 200 명 정도만 학생들이고 나머지 800 명이 부산의 일반시민이었다. 시민들은 김 영삼 사주를 받은 일도 없고 남조선 민주주의 해방전사도 아니다. 이런 것을 막으려고만 한다면 점점 전국의 대도시는 민중봉기로 발전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단추 구멍만한 눈이 오그라들었다. 잠시 후 나타난 멧돼지가 너스레를 떨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탱크로 쓸어버리면 됩니다.

제가 탱크부대 출신 아닙니까?

캄보디아는 300 만 명 학살했는데,

우리도 200 만 정도는 탱크로 밀어버리면 아무 문제없이 조용해질 겁니다.”

그 말에 얼굴이 펴졌다.

“임자처럼 강력하게 처리해야지 이거 정보부가 너무 물러서 탈이야.”

의전과장은 플라자 호텔에서 신 여인을 만났다. 내자 호텔에서 가수 심 씨를 만났다. 신양과 심 가수를 태우고 빨리 안가로 가야하는데 기타 줄을 갈아야 한다고 해서 가까운 악기점에서 줄을 갈고 도착하니 시작 5분전이었다.

두 박 비서관에게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고 하니, 박선호가 놀라는 표정으로 각하까지입니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저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실 놈들을 제압한다. 불응하면 발포해도 좋다. 알겠지? 예. 선호는 대답을 했는데 박 흥주는 답이 없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큰 사고가 없는 한 장군까지 갈 마음이 있는 장교인데, 거사 전에 변심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과 내 지시에 한 번도 아니라고 한 일이 없는 자라서 명령에 지옥까지 따라갈 거라 믿음이 반반이었다.

만찬장에서 병풍을 등 뒤로 중앙에 총독이 앉고 좌우에 두 아가씨가 앉고 반대쪽에 김 비서실장, 멧돼지와 내가 앉았다. 당연히 이야기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이야기를 했다. 기분 좋은 말만 할 것이지 멧돼지가 부마사태 이야기, 김 영삼 제명 이야기를 하면서 슬그머니 부아를 질렀다.

“형님, 각하를 똑똑히 모시지요?”이어 멧돼지를 향해

“이 버리지 같은 새끼!”

탕! 한 발을 멧돼지에게 쏘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총알이 손목에 맞았다. 그를 향해 한발 발사를 했다. 쏘면서 대국적으로 청치 하십시오! 했다.

“김 부장, 왜 이래?”

못들은 척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권총은 철커덕! 철커덕! 소리만 났지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의전과장에게 총을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 전기가 나갔다. 불 켜! 소리를 질렀다. 권총을 받아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제목부터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자가 투표를 해서 뽑아주는 머슴 대통령이 국가와 혁명 그 위에 나라는 식의 제목이 아주 민주주의하고는 어울릴 수 없는 제목이지만 통치철학을 알기 위해 여러 번 읽었다.

책 중간에 민족혁명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잠시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하늘의 새들은 남이나 북이나 자유로이 날아다니는데 사람은 두 놈 욕심으로 남과 북 일반백성을 힘들게 하고 있다. 언제 쯤 제대로 된 민주(民主) 구경을 할 수 있을까? 전율이 느껴지는 대목을 발견했다.

‘이 革命의 前程에는 定해진 時限이 없다. 제 3 공화국 수립만으로 革命이 끝나는 것도 아니요, 어디에서 어디까지라고 期限이 定해질 수도 없다.’

(國家와 革命과 나 27 쪽)

정해진 시한도 없고 기한도 없이 永久革命이라는 뜻이다.

혁명이라고 강요하니 혁명이지 쿠데타이고 영구집권을 한다는 것을 요상하게 쓰고 있었으니, 세상은 요지경하는 노래를 부른 신신애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일하다 나이 들어 늦게 가수가 되어 세상은 요지경을 불렀으니 다행이지 조금만 일찍 가수를 했다면 세상은 요지경 하는 노래는 금지곡이 되거나 신신애가 남산에 불려가 고초를 당했을 것이다.

영구집권 시나리오를 모르고 3선만 하면 물러날 것으로 국민들은 믿었다. 참으로 국민들은 순지하기도 하지. 순진한 국민들 사이에 3선 이후를 통찰한 사람은 김 대중이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김 대중이 목포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낙선을 중앙정보부가 그렇게 종용한 이유가 바로 총독의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이다.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 여사가 사망하고 영애가 정신이 우울한 시기에 최 태자마마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 (1975.2. 최 태민이 박 근혜에게 보낸 편지 중)

영애가 읽고 최 태자마마를 청와대로 불러들여 영혼과 육체를 지배받게 되었다. 세상을 풍자하는 은어 중에 ‘육박전’이라고 있다. 국어사전적 의미는 ―서로가 맞붙어서 치고받는 싸움이다―하지만 1973 년의 육박전은 육영수와 박 정희의 부부싸움을 육박전으로 항간에 소문이었다. 신민당 국회의원이 정 인숙 사건의 풍자 노래를 불렀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어요.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것을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어요.

직격탄을 날렸다.

총리는 이런 노래를 들어보았는지 따졌다. 예. 들어봤습니다만.......

1978 년 5 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 최 태자마마는 영애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기업에 전화를 해서 기부금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을 조사해서 최 태자마마와 영애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명목은 구국여성봉사단의 발전기금이라고 했으나 거의 세금 수준이었다. 안내면 세무조사를 받을 판이라 기업들은 눈치껏 돈을 구국여성봉사단에 바쳤다. 심지어 유정회 국회의원을 태자마마에게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 서기관을 불러 최 태자마마와 여성구국봉사단을 조사하고 영애 관련 사항을 보고서로 만들었다. 보고를 받고 시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 태자마마와 영애 앞에서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 중앙정보보가 간첩이나 잘 잡으라고 모욕을 주었다.

최 태자마마도 절대 기업이 스스로 발전기금 낸 것이지 강압적인 전화 하지 않았다고 하고 영애도 모함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더구나 육 여사가 없는 상태에서 영애 눈물을 보니 얼마나 애처로웠을까? 이해는 가지만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고 하는데 이건 아니었다.

희망이 없음을 알았고 1 인 혁명을 결심했다. 조선시대의 사육신 교훈에서 보았듯이 혁명을 여러 명이 하면 보안을 지킬 수가 없다. 배반자가 나와서 혁명전야에 혁명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이런 보안 취약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혼자 계획하고 거사 직전 심복에게만 알리고 심복 중에서도 반대자는 그의 손으로 제거, 혁명을 해야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중앙정보부장 수첩 맨 뒤에 낙서를 했다. 치졸하지만 몇 자 적었다.

나의 자유

―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

자유 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 민주주의 회복하였네

나 사랑하는 三千七百萬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주었네

(이하생략)

의전과장이 여인들에게 각자 자필로 이름을 쓰고 지장을 받았다.

첫째, 각하가 말을 시키기 전에는 먼저 말을 하지 말 것.

둘째, 여기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말 것.

셋째, 안가에서 보고 들은 것은 일절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합니다. 작성 후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신 양을 그 옆에 앉혔다. 나이와 이름을 물어보고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을 했다.

만찬장 흥이 무르익었다.

심 가수가 자신의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부르고 앵콜 송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멧돼지가 <도라지>를 불렀다. 남 효주가 들어와 의전과장이 보자고 해서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손가락을 동그랗게 표시하면서 준비 다되었음을 알렸다. 머리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신 양이 <사랑해>를 부르겠다고 해서 심 가수가 기타 반주로 음을 맞추었다. 김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좀 잘 모시십시오! 했다.

“버러지 같은 놈” 하면서 한방을 쏘았다.

총독을 향해 한방 쏘았다.

밖으로 나가 권총을 새로 받아 안으로 들어와 확인 사살했다.

로마를 위해 시저를 죽여야만 했던 부루투스 심정이랄까. 모르는 사람들은 죽이려면 총독만 죽이지 멧돼지를 왜 죽이냐 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내 마음은 총독도 미웠지만 이 놈은 인간도 아니라고 여겼다.

만찬장 안에서 총소리를 듣고 밖에서는 박 선호와 박 흥주가 경호실 부하들을 제압했다. 정 인형과 박 선호는 해병대 동기였다. 총소리가 나자 박 선호가 총을 꺼내 꼼짝 마! 했다. 안 재송은 사격 선수답게 민첩한 동작으로 총을 뽑았다. 박 선호가 안 재송을 쏘았다.

염두판단은 사살하고 육군참모총장으로 혁명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육군참모총장에게 미리 말했다가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시도 전에 반역이 될 것 같아 미처 말하지 못하고 거사를 했다.

혁명위원회라는 것이 국무회의를 거쳐 계엄을 선포하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 실패였다.

미완성 혁명이지만 총독을 없앤 것만으로도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고 40년 후면 재평가하리라 믿었다.

김 비서실장에게

“형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하십시오!”

“응, 알았어.”

만찬장을 나왔다. 목이 말랐다. 물을 찾았다.

김 비서실장은 피투성이를 국군지구병원으로 후송했다.

당직 군의관이 맥박을 확인했다.

응급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병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비서실장이 환자 한명을 데리고 왔는데 원장님이 오셔야할 것 같습니다 보고를 했다.

원장이 환자 얼굴을 확인했다.

배를 걷었다.

반점이 보였다.

총독임을 알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국군지구병원은 보안사와 직통연결 전화가 있었다. 보안사 참모장에게 각하 서거를 알렸다.

1979년 10월 어느 날 유신선포 7 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청와대 영빈관에는 3 부 요인들과 유정회 국회의원들이 가득 찼다. 도열해있던 일행은 등장에 박수를 쳤다. 유신 결단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칭송의 건배를 했다.

부산에서는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민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교정에서 시작된 시위는 교문을 나와서 시가지 행진으로 번지면서 시민들이 가세했다.

학생회장이 <민주구국투쟁 선언문>을 낭독했다.

‘반만년 역사 위에 이처럼 무자비하게 수탈을 하는 집단이 또 있겠는가? 일제의 수탈은 왜놈이 조선을 지배하느라 그런다고 하지만 이건 같은 민족 더구나 국민들이 투표로 뽑아준 공직자가 국민 위에서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수탈하고 잘못은 노동자 농민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YH 여공들의 죽음과 그녀 외침을 보라! 김 영삼 제명을 보라!‘(이하생략)

영빈관에서 흥이 무르익어 유신이 영원할 것처럼 유신의 영원함을 위하여! 외치면서 축배를 서너 잔 마셨을 때 내무장관이 다가가서 귓속말로 보고를 했다. 순간 얼굴이 검은 얼굴이 더 흙빛이 되었다. 만찬은 중단되었고 비서진과 관계기관 대책회의 참석자들이 총독 서재에 모였다. 부산에 계엄을 선포하기로 했다.

국무총리는 형식을 지키느라 밤 11시 30 분에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했다.1979. 10.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의결했다.

박 흥주를 대동하고 부산으로 잠행했다. 데모는 마산과 창원으로 퍼졌다. 10월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도 위수령이 발동했다. 서울에서 1 공수여단과 포항 1 해병사단에서 1개 여단이 부산으로 이동했다. 대학을 대대 단위로 나누어 점령했다.

시민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박 흥주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 하는 말에 흥주가 광복동으로 가자고 하니 거기는 데모가 심해 갈 수 없다고 했다. 박 흥주는 기사에게 가다가 막히면 거기서 내리더라도 데모 장소 가장 가가이 가주세요 했다. 택시 기사는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출발하자마자 계속 총독 욕을 했다.

“손님, 각하가 요즘 미친 거 아닌 교? 부산 시민을 홍어 좆으로 보면 큰 코 다칠 기라 예, 우리 부산 시민이 투표로 뽑아 준 영샘이를 누구 맘대로 제명하는 교? 공화당, 유정회 그 새끼들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선별수리가 뭡니까?”

그렇게 욕을 듣다보니 택시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왔다.

시민들은 데모하는 사람은 데모를, 일반인은 데모데들에게 빵과 우유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민심이 정권보다는 데모하는 학생들 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1979년 12월 11일 남한산성이라 불리는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신문 촌평코너에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했다. 개도 주인을 물지 않거늘 각하의 심복이 시해한 것을 두고 그런 평을 했다. 변호인들이 수십 명이 변호하겠다고 사설 변호인단을 구성한 것을 모두 물리치고 국선 변호인을 택했다. 유신총독시대에 대학생들은 데모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 운동하다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많은 변호를 해주었다. 만물상이 익명으로 기사를 쓴다고 나를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생각을 했다.

세월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비유하자면 쥐 100 마리 사는 동네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어서 쥐들이 고양이가 우리를 잡아먹는데 고양이 오는 것을 빨리 알 수 있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주자. 방울소리 듣고 발리 도망갈 수 있다고 했다.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찬성을 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토의를 했다. 쥐들은 모두 핑계를 댔다.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유신총독헌법이라는 것이 국민들의 기본권을 많이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총독 앞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첨의 말만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의 심정으로 국민들의 제한된 기본권을 돌려주기 위해 총을 들었고 총독을 쏘았다. 하지만 그를 죽이고 총독을 할 생각은 없었다.

198X 년 5월 24 일 나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한 일이지만 죽음이 내일이라 생각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시간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갔다.

어린 시절 구미에서 지내던 일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에 차출된 일, 해방 후 국군 소위가 되었고 남들 중위로 진급할 때 파면당한 일 다시 복직되었다.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거 파면 당해서 김천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를 할 때 박 선호가 제자였다.

해병대 장교를 우수하게 근무했으나 해병대가 해군에 흡수 통합되면서 편제가 사라진 박 선호는 전역을 했다. 전역 후에 개인사업을 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의전과장으로 끌어들였다. 말이 의전과장이 하는 일이 채홍사였으니 여러 번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더욱 못한다. 나의 제자고 인내력이 있어서 참고 할 수 있는 동안은 하라고 달래 온 것이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고 인생에 가정법이 없다고 하지만 그를 내가 의전과장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평범한 가장으로 오순도순 살아갈 것을 내가 그의 인생을 망친 것이다. 박 흥주 역시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실력자라 내가 여기 중앙정보부로 차출을 안했다면 동기들 중에서 장군이 나온다면 1차에 나올 인재를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이다. 교도가 나를 불러냈다. 남한산성에서 호송차를 타고 서대문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대법원 판결까지 3 심의 재판을 받았으나 한 번의 재판이 남아있다. 역사의 재판이다.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으나, 역사의 심판은 오판이 없다.

민주회복이 그때는 완전하게 회복하고 국민들의 역사의식도 높아지고 역사가들이 역사책에 의인으로 기록하자고 할 것이다. 그날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현리 군단장을 할 때 유신헌법이 공포되었다.

연말에 위문을 오면 공관에 구금을 하고 하야성명을 녹음을 해서 방송국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해 연말 부대방문을 그냥 넘어갔다. 전역을 해서 건설부장관이 되었다. 그때도 건설현장에 일대일로 만났을 때 저격을 하려 했으나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잡은 것이 10.26 만찬이었다.

안 중근이 하얼빈에서 이등방문을 저격한 것과 총독을 저격한 것은 같은 차원의 거사였다.

이등박문을 저격한 이유가 15 가지였다면 나 또한 열다섯 가지 죄상을 말할 수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을사 5 조약과 정미 7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조선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한 죄,

조선과 일본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조선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는 천황을 기만한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일본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때문이다.

총독을 죽인 열다섯 개의 이유는 구악을 일소한다고 신악을 만든 것,

목포에서 김 대중 당선을 막기 위한 부정 선거를 저지른 죄,

3 선 개헌을 한 죄,

유신헌법을 만든 죄,

긴급조치를 발령한 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학생을 죽인 죄,

김 신조를 핑계로 만든 실미도 부대원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은폐한 죄,

월남파병 군인들에 대한 전투수당 절반을 갈취한 죄,

유정회 허수아비 국회의원을 만들어 거수기로 만든 죄,

100 명이 넘는 여자들을 강간한 죄,

부일장학회 영남대학교를 강탈해 정수장학회를 만든 죄,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일협정에서 저자세로 체결한 죄,

대한민국 영토를 미군기지로 전락시킨 죄, 전·노·김·백·손 다섯 명을 시발로 사조직이 군대의 단결을 저해한 죄, 영애와 태자마마 보고에 대해 친국형식을 빌어 3 자 대면을 시켜 나를 모욕을 주고 태자마마 영애의 나쁜 짓을 계속하게 한 죄이다.

198X년 5월 2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바로 집행이 되었다. 졸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어도 어느 누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12·12로 신군부가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을 세상은 알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문보도를 통제해서 기사가 나가지 않았지만 일본은 지도자로 보안사령관이 부상한다고 했다.

새벽 3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차량이 새벽 4시 조금 넘어 서대문에 도착행대. 지하실 독방에 그를 이감시켰다. 그의 죄수 번호는 101번이었다. 아침 7시에 사형집행실로 이동했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 묻기에 전날 변호사에게 녹음으로 유언을 남겼다라고 대답했다. 간단하게 한마디 남기라고 했다.

“국민을 위해 할 일 하고 갑니다. 민주회복을 위한 거사가 성공했기에 여러분들은 민주주의를 향유하기 바랍니다. 민주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유신총독 괴물 헌법 아래 시름시름 병들고 말살되었습니다. 74년도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다 소리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일하다 사라지는 마지막 사형수가 될 것이다. 이후 어느 누구도 자유가 흐르는 민주의 강물을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다. 민주의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민주국가가 될 것이다. 여러분, 자유 시민으로 사십시오.”

유언은 물거품이 되었다. 12·12로 육군참모총장을 구속시킨 이후 서서히 최 대통령을 하야하게 압박을 가했다. 원유 도입선 확보 명목으로 대통령을 해외 순방을 보내놓고 광주에 시민과 학생들 데모 진압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은 소문이 소문을 낳고 유언비어가 되어 광주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행을 했다. 광주 진압은 부산 마산 사태에 부산을 신속 진압을 하지 못해 이웃 창원 마산까지 번졌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수부대 2 개 여단을 투입하여 전광석화 같은 진압을 했다.

최 대통령은 1 년 이내에 민주적인 절차로 헌법을 새로 만들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출하는 것만 관리하고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그 1년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하야했다. 민주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지도자를 뽑고 물러나겠다는 소박한 꿈은 사라졌다. 다시 장충체육관에서 총독이 선출되었다.

서울의 봄이라고 했지만 수상한 봄이었고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고 공공연하게 말을 했다. 서울 인근의 대학생들과 재야 시민 단체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시국대회를 열었다.

하나회 정부가 총독의 시대 보다 좋다고 볼 수 있을까? 유신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가 서울 하늘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눈물겨운 것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한 줄의 만화가 많은 국민들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질긴 것인데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인가? 죽을 만큼 고문을 했으니 죽은 것이다.

국선 변호인이 나를 접견 신청해서 나가기는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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