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창고 13

오목장군

by 함문평

<단편>

오목장군 림삼(林森)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개수마을길 산113에서 임공삼(林空森)이 태어나고 살던 곳이다. 1905년에 태어나서 1944년 12월 3일, 향년 39 세로 생을 마쳤다. 임공삼과 강릉 김 씨 부인 사이에 아들 임대성(林大成)과 딸 옥련(玉蓮)이 있었다. 대성과 옥련은 나이 차이가 8년이었다. 일부러 나이 터울을 띄우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개수 마을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임공삼이 서대문 형무소에 7년 동안 옥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1904년부터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있었다. 대한제국 이후 의병봉기가 1905년 원응팔의 의병봉기가 시초라는 것이 주류학설이었다. 이보다 약 1년 앞선 1904년 7월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 의병봉기가 있었다는 것이 21세기에 밝혀졌다. 1904년 의병봉기에 가담한 평창군 일대 임공삼도 가담했다. 독립 운동했던 가문의 후손은 가난하고, 친일파 후손은 등 따듯하고 배부르게 살고 있다.

나는 임옥련의 외손자다. 외할아버지 전범수와 외할머니 임옥련 사이 2남 3녀가 있었다. 어머니는 딸 셋 중 중 가운데였다. 두 외삼촌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큰 이모와 막내 이모만 생존해있다. 요즘은 외아들, 외동딸이 많아 이모 호칭을 아는 어린이도 드물지만 2남 3녀의 가운데 딸이 어머니였던 나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에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 큰 이모, 외삼촌 두 분 집을 오가면 방학이 다 지날 무렵 집으로 왔다. 밀린 방학숙제와 일기를 벼락치기로 이틀에 써서 제출했다.

요즘은 구하기도 힘든 옥수수 밥, 옥수수묵, 올챙이국수가 주식이어도 배부르기만 하면 행복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더 재미있었다.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기는 이존사촌 형들이 개울가나 논두렁으로 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다리를 껍질을 벗겨 구워주었다. 그 맛은 요즘 잘 팔리는 치킨 다리 보다 더 맛있었다. 밤이면 초가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참새를 잡아 구워주기도 했다. 참새 잡이는 재미있었다. 광솔 불을 지붕 처마 밑으로 비치면 뽀얀 참새 배가 보였다. 불빛에 참새는 놀라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는 것을 형은 손을 넣어 참새를 움켜쥐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 60이 넘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을 수 없고, 어머니 동라가시고 큰 이모 막내 이모만 남은 나에게 두 이모는 어머니 대신 만나는 어른이었다.

임옥련의 아버지가 림공삼이었다. 옥련의 오빠는 임대성이었다. 오빠와 나이 차이는 8세였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임공삼이 일본 경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7년 형을 복역하고 대화면 개수 마을로 돌아왔다. 그 후 강릉 김 씨 아내와 사이에 딸 옥련이 태어났다. 딸은 외모가 아버지를 닮았다. 임공삼은 자신을 닮은 옥련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1907년 7월 31일 일본이 만든 군대해산 조칙을 순종에게 재가를 받았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훈련원에 모이게 하고 무장해제했다. 일제의 군대해산에 대한제국 군인들은 분개했다. 민긍호가 중심이 된 강원 의병들이 8월 5일 원주 장날을 기해 봉기했다. 임공삼도 평창에서 원주까지 와서 민긍호 대장 군대에 합류했다. 30여 명의 의병이 사냥총을 들고 합류했다. 사냥총으로 멧돼지를 잡으면 사냥총이고 일본군을 잡으면 의병무기가 되었다. 원주의병은 민긍호를 중심으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과 농민,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부대는 원주, 평창, 강릉, 진부, 멀리는 제천, 충주, 장호원, 홍천지역으로 봉기가 번졌다.

의병들은 그 지역을 잘 아는 지형의 이점을 이용했다. 은밀하게 접근해 일본군을 타격하고 신출귀몰하게 달아났다. 일본이 작성한 <조선폭도 토벌지>를 한글로 번역해 인용한 <조선독립운동 제1권> 140 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민긍호는 큰 부대의 수괴가 되었다. 여러 개의 소집단으로 분할하고, 소집단의 대장을 지명했다. 30 명 정도 무리들이 제천, 충주, 영월, 죽산, 장호원, 충주, 홍천, 춘천 등 지역에서 은현 출몰하여 황군을 괴롭혔다. 특히 무기고를 약탈했다.

<조선폭도 토벌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일자 <지방소식>에 보면 민긍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유격전이 잘 보도되었다. 1907년 11월 23일 강원도 대화에 진을 친 일본군을 습격해 심대한 타격을 주고 신출귀몰하게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림공삼(林空森)은 강릉 김 씨 여자와 혼인했다. 얼굴 한번 본적 없이 부보가 정해주어 결혼한 것이었다. 1918년 정월에 결혼해 1919년 정월에 아들 림대성(林大成)을 얻었다. 3월에 평창 개수마을에서 만세운동 주동자로 잡혀 서대문 향무소로 압송되었다. 강릉 김 씨는 그 시절 여자지만 한문과 한글을 쓸 줄 알았다. 편지를 한자로 서대문형무소 조선인 림공삼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서대문 형무소 간수가 편지를 림공삼에게 주지는 않고 감방 문에서 편지를 읽어주었다. 감방 안에서 눈물을 펑펑 쏟고 소리 내어 울었다.

만 7년의 형기를 마치고 1926년 8월에 풀려났다. 평창군 개수마을로 돌아왔다. 지아비 없이 김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대성을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여덟 살 대성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큰 절을 했다. 아들에게 한글과 천자문을 가르쳤다. 천자문을 익히자 소학을 가르쳤다. 1927년 딸이 태어났다. 아들을 원했으나 딸이 태어났다. 이름을 구슬 옥(玉)에 연꽃 련(蓮), ‘옥련’으로 지었다. 딸 얼굴이 공삼을 쏙 빼닮았다. 밭일을 할 때도 평창읍내 장에 갈 때도 옥련을 목마를 태우고 다녔다. 대성은 20세에 강릉 최 씨 여자와 혼인했다. 첫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창식(昌植)’이라 지었다. 그 시대는 남자들이 첩을 얻는 것이 묵인되었다. 첩을 곡산 연 씨를 얻었다. 첩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다. ‘연식(延植)’으로 지었다. 창식과 연식은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였다. 옥련도 나이가 차서 18세에 20세 남자 전범수(全凡洙)와 결혼했다. 전범수는 강릉 사천 사람이었다. 전범수와 임옥련 사이에는 2남 4녀가 태어났다. 큰 딸 전찬옥, 큰 아들 전찬열, 작은 아들 전찬하, 둘째 딸 전선옥, 셋째 딸 전순옥, 막내 딸 전미옥이었다.

개수마을 의병장 림공삼은 1944년 12월 3일에 돌아가셨다. 많은 항일 의병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 후손은 부자로 살듯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가장 전범수는 전쟁이 나자마자 보급 근로대로 징발되었다. 군인들이 군장을 꾸리고 남는 물자는 보급 근로대가 지게로 져서 부대가 이동한 곳까지 나르는 일을 했다. 6.25 발발 때 찬옥은 17세, 찬열은 15세, 찬하 12세, 선옥 10세, 순옥 7세, 미옥 5세로 올망졸망한 자식을 데리고 림옥련은 충청북도 괴산에 산다는 전범수의 형 전인수(全寅洙) 주소만 들고 피난길을 나섰다.

맏딸 찬옥은 광주리에 살림살이 그릇을 이고, 찬열은 지게에 이불을 지고 그 위에 순옥을 앉히고 지게 목을 잡게 했다. 찬하는 지게에 쌀, 보리, 옥수수 등 식량을 지고 막내 딸 미옥을 그 위에 앉히고 이동했다. 둘째 딸 선옥은 나머지 지고가지 못하는 것을 커다란 보자기에 싸고 머리에 이고 갔다.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휴게소 자리가 6.25 때 전 쎄네 집이었다. 외양간 소 한 마리는 외양간에 마른 옥수수 대를 먹이로 가득 넣어주고, 혹시 다 먹으로 자유롭게 나가서 뭐라도 먹을 수 있도록 밧줄을 풀어주고 피난을 갔다. 소도 주인의 마음을 아는 듯이 소의 커다란 눈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간소를 피난가지 않은 이웃 할아버지가 집 앞을 지나가는데, 소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 보니 빈집에 소만 홀로 울고 있어서 소를 데려갔다. 새끼를 배었던 소는 전쟁 중에도 송아지를 낳았다.

횡성휴게소 자리에서 안흥을 지나 주천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갔다. 가다가 힘들면 쉬고, 또 걷고를 반복하여 충청도 괴산 땅에 도착했다. 중간에 힘들다고 찬열이가 순옥이 여기 놓고 가면 안 돼요?라고 림옥련에게 말하자, 얘야? 힘들어도 동생을 데리고 가야지 어떻게 길에 버리고 가겠느냐? 고 했다. 힘들게 괴산 전인수 집에 도착했다.

결혼식 때 한번 본 형님 댁에서 염치불구하고 사랑방 한 칸에 여덟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다. 괴산에서 막내 미옥이 홍역을 앓다가 사망했다. 옥련은 쌀로 떡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하루 이고 나간 떡을 다 팔고 집에 오면 다시 쌀을 디딜방아로 빻고 떡을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전쟁기간을 지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범수도 전쟁이 끝나자 무사히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소가 없었다. 전쟁 통에 누가 소를 훔쳐갔구나 체념했다. 가을 들판이 누렇게 고식이 익어갈 때, 산 너머 갈곡리 노인이 어미 소와 송아지를 끌고 왔다. 림옥련 식구들은 죽은 줄 알았던 서를 보니 너므 반가웠고, 그 할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다. 옥련은 눈물을 흘리며 수없이 노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전범수가 나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인은 전쟁 통에 미군이 탄약을 지게로 운반해달라고 해서 져다주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집 앞을 지나는데, 소울음소리가 들려 외양간을 보니, 소가 산기가 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네 집으로 소를 몰고 가서 먹이를 먹이고,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이제 전쟁도 끝나고 혹시나 해서 왔는데, 피난을 나갔던 인원들이 다시 온 것을 확인하고 소를 돌려주려고 왔다.

전범수는 노인에게

“어르신! 감사합니다. 송아지를 제가 받을 테니 어미 소는 어르신 그동안 보살핀 노고에 답례로 가져가시죠?” 했다.

어른은

“무슨 소리? 임자가 어미 소를 가져야지?”

“아닙니다. 저희는 소를 난리에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사를 확인하고 이웃 어른 덕분에 무사히 새끼도 낳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결국, 외할아버지는 송아지를 어미 소는 노인이 끌고 재를 넘어갔다. 요즘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뉴스가 나오는데, 6.25 시절은 모두가 가난했지만 이런 미담도 있었다. 세상이 물질은 많아졌지만 인심은 사나운 세상이 되었다.

림공삼은 키가 6척 장신이었다. 요새 젊은 운동선수는 2미터 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시절은 6척 장신은 드물었다. 키가 큰 것도 소문이지만 힘도 셌고, 몸도 날렵했다. 시골 돌담은 맨손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잡으러 온 일본 경찰이 서너 명이 있어도 순식간에 오른 발로 한번, 왼발로 한번 차면 일본 경찰이 고꾸라졌다. 멱살을 잡고 길바닥에 개구리 패대기치듯 집어던졌다. 소문은 한 사람 건널 대마다 눈덩이처럼 커졌다. 림공삼이 4명의 일본 경찰을 처치한 것이 개수마을에서 대화읍내로 가면 열 명을 패대기쳤다고 말이 퍼졌다.

집에 이불이 바깥은 붉은 천, 속은 흰 천으로 위와 아래를 바늘로 꿰매고, 가운데는 두툼한 솜이 들어간 이불을 홍의장군 곽재우가 붉은 천을 뜯어 옷으로 입고 왜적을 물리쳤다. 조선민족은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가 이 땅에 왜적이 쳐들어오면 일반인이 이불의 붉은 천을 뜯어서 어깨에 두르고 의병으로 출동했다.

어깨에 붉은 천을 두른 것은 의병이고, 그 천이 없는 자들은 왜적이거나 군관이었다. 피아 식별 띠가 붉은 천이었다. 그러니 의병과 관군이 대적하거나, 의병과 왜적이 대적하면 일단 피아식별부터 의병이 빨랐다. 개별전투의 승패는 ‘피아구분’이 우선이다. 림공삼은 개수마을과 강릉, 횡성, 원주 일대까지 활동했다. 소문도 빨리 퍼졌다. 의병들은 자기 집 이불 붉은 천을 뜯어서 어깨에 두르고 나타났다. 1918년 9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 지방소식란을 보면 강원도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의병 수백 명이 원주, 평창, 강릉 일대의 경찰지서를 불 지르고 무기를 탈취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무렵 김성삼 등이 경의선 철도를 폭파하기도 했다. 의병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8월 16일 원주 진위대장 홍유형이 상경했다. 특무정교 민긍호는 진위대 병사를 이끌고 각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의병들에게 일본군 무기고를 털어 1,000여 점의 소총과 4만 발의 실탄으로 무장시켰다. 이들은 군청, 경찰서, 우편취급소,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고 원주, 횡성을 장악했다. 화가 난 일본군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의병들도 이인영이 전국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13도 창의진을 구성해 서울진공작전을 호소했다. 1도 창의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관서의병대장 방인관, 만경의병대장 정봉준,영남의병대장 신돌석, 황해의병대장 권중희, 호남의병대장 문태서, 호서의병대장 이강년이었다.

(한국 의병사 하권)

뜻은 거창했으나 서울진공작전은 교묘한 일본의 방해전술로 실패했다.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휘하의 람공삼도 3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원주를 경유 개수마을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거사 소식이 개수마을에도 3일 후에 퍼졌다. 서너 명의 의병이 산 넘고 개울 건너 림공삼집으로 모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흰 광목을 구하고, 파랑, 빨강, 검은색 물감을 구해왔다. 서투른 솜씨지만 태극기를 그렸다. 평창 장날에 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누군가 선창하면 뒤따르는 인민이 후창을 했다. 그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지도자 33명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지만 그 긴 문장을 시골 사람들은 전문을 읽을 수도 없었지만 그 긴 선언서보다 ‘대한독립 만세’ 여섯 글자가 모든 것을 표현했다. 대한독립 만세를 앞에서 선창하면 뒤따르는 인민들이 후창을 했다. 인민들 어개 띠 흰 천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글씨를 썼다.1919년 6월 5일 림삼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26년 8월 16일 석방되어 개수 마을로 돌아왔다. 서대문 형무소자리 역사공원 근처의 유관순 열사 동상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마지막 유언)

그렇다. 1919년에서 1945년 광복이 되기 전까지 이당의 많은 열사들의 심정은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었다. 강원지역에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우리들도 뭉치지만 왜놈잡기 쉬울 건 가

원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 건가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윤희순 안사람 의병가 중에서)

일본총독은 3.1운동을 보고 놀랐다. 간담이 서늘했다. 조선 인민이 이렇게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문’낭독만하고 밥만 먹고 헤어진 민족 대표 33인은 겁날 것이 없었다. 무서운 일은 농민, 노동자, 보부상, 백정, 갖바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총동원해서 진압하려해도 병력을 어디로 집중할 수 없게 전국이 산발적으로 일어나 속수무책이었다.

‘대한 독립 만세!’여섯 자를 외치는 것이 태화관에 모여 유식한 한자어를 써가면서 길게 작성한 ‘독립선언서’보다 훨씬 파괴력이 컸다. 전국에서 200만 명 이상이 만세 운동에 나섰다고 일본이 비밀로 만든 ‘조선 비적 토벌지’에 기술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태풍처럼 조선 땅을 쓸고 간 후에 조선총독과 경찰, 군인 상층부가 모여 회의를 하고 만든 정책이 이른바 ‘문화정치’라고 변명했다. 이름이 문화정치라고 조선의 문화를 존중해서 문화를 보존하는 정치가 아니었다. 이른바 민족 지도자 33인을 포함하여 전국 시도에 좀 배운 사람,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을 회유 협박해서 일본에 협조자로 만들고 그들에게 약간의 특혜를 주었다.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 소설가 이광수, 시인 최남선, 천도교 최린과 이종린들을 접촉하고 약간의 금전으로 매수했다.

그때부터 나온 것이 민족개조론이다. 조선민족은 게으로고 더러운 존재니까 선진 민족 일본 황족을 따라 배워 우리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족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이들 민족지도자들의 주장이었다. 지도자급은 이렇게 변절했으나, 개수 마을 ‘림공삼(林空森)’은 그런 시류에 영합하는 일 없이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역사 기록이나 각종 행사에 민족대표 33인이 공을 독차지했다. 조선총독부가 지도층을 공략한 문화정치의 후유증은 오늘도 친일파 후손에 국회의원 몇 선을 하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역대 참모총장 90%가 친일파거나 일본군,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림공삼은 1944년 12월 3일 돌아가셨다. 1년만 더 살았다면 1945년 8월 15일 눈물의 광복을 보았을 것을 한만은 39년 일생을 1944년 12월 3일 생을 마쳤다. 어머니 형제 중에서 두 외삼촌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맨 위 전찬옥 이모와 막내 순옥 이모만 살아있다. 요즘은 다들 아이를 많이 낳지 않아서 이모, 고모 호칭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모 호칭을 부르는 마지막 세대다보니 두 이모가 조카를 부르면 달려갔다. 원주 일산동 낡은 단독주택이 막내 순옥 이모 집이다. 큰 이모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두 이모는 조카인 나를 불러 어린 시절 쌀이 부족해 만들어 먹던 올챙이국수와 옥수수묵을 해주셨다.

올챙이국수를 먹으면서 두 이모는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일본인 표현으로 <조선폭도 토벌지>라는 것에서 ‘림공삼(林空森)’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 강원도 평창군 개수 마을에 림공삼(林空森)이라는 자가 있다. 키가 육척장신이고, 힘도 세고, 칼도 잘 쓰고, 총도 백발 백중의 실력자다. 사람들이 신출귀몰한 그에게 현상금 3원을 걸었다. (조선 폭도 토벌지, 오카모도 편)

두 이모는 조카가 대학도 나왔으니 수고스럽지만 독립기념관에 가서 자료조사를 해서 외할머니의 아버지 림공삼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달라고 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작성 양식을 출력했다. 내 이름으로 하면 림공삼과 촌수가 너무 멀어서 전찬옥, 순옥 두 이모의 이름으로 가족관계 증명서를 발급했다. 그 근거로 림공삼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조선폭도토벌지에 림공삼 이야기가 나온 것은 모두 복사를 했다. 그가 일제 30년 식 보기병총(步騎兵銃)으로 일본군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모든 자료를 수집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청인을 전찬옥, 순옥 이모의 주민등록 번호와 가족관관계증명서를 jpg파일로 만들어 첨부했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국가보훈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제출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6개월 정도 지나니 국가보훈처가 림공삼에 대한 국가유공자 선정이 승인되었다는 통지문을 받았다.

2024년 8월 16일 평창군 개수리에 1944년 12월 3일 사망한 림공삼에게 국가독립유공자 승인 소식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중학 시절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중에 경우 없는 사람을 ‘이 축 글도 모르는 놈’, 또는 ‘천자문도 모르는 놈’이라고 하는 것을 들어서 축 글이라는 것이 엄청난 고난도의 글인 줄 알았다. 대학에서 민속학 개론을 수강했다. 교수가 첫 시간에 가르쳐준 것이 축문이었다. 나에게 민속학을 배웠다는 사람이 어디 가서 동네 시제나 고사에 축문을 낭독하면 그 축을 이해하고, 혹시라도 축문을 부탁하면 사양하지 말고 당당하게 축문을 써주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 유세차(維歲次) 甲辰年 八月十六日 林公森의 손녀 全燦玉, 順玉은 삼가 할아버지께 일제시대 행적을 찾아 국가보훈처로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갑진년(甲辰年)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기에 이에 알려드리옵니다. 이승에서의 한 많은 기억은 물리치시고 천상에서 자상스러운 독립유공자임을 기뻐하소서라고 썼다.

신기한 일이었다. 축문을 작성하고 개웅산 아래 집필실에서 잠시 졸았다. 그 짧은 졸음에 꿈을 꾸었다. 꿈에 ‘오목장군 림삼(林森)이 나타났다. 좋아하는 지평막걸리를 소가 끌고 가는 우마에 한가득 실렸다. 개웅산 정상의 우마 길을 따라 내려오더니 나의 집 앞에 멈췄다. 신기한 일이고 깜짝 놀랐다. 꿈에 개수 마을 집 앞 소나무에서 북으로 10미터 지점에 커다란 항아리에 소총 4정을 묻었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잠에서 깨었다.

책상에서 축 글을 쓰다가 막걸리 한잔 마시고, 또 써야지 하면서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뚜껑을 닫지 않은 지평 막걸리와 한잔 마시고 빈 잔인 누런 찌그러진 막걸리 잔에 파리들이 둘레를 기어가고 있었다. 참 묘하지, 꿈에 우마에 잔뜩 실린 지평막걸리는 무슨 의미이고, 개수 마을 소나무로부터 북으로 10미터 지점 땅속에 묻은 소총 4자루는 무엇일까? 꿈에 나타난 오목장군 림삼은 림 씨 후손들이 못하는 일을 딸 옥련의 외손자가 하니 기특해서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다.

막내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꿈 이야기를 했다. 개수 마을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앞 소나무에서 북으로 10미터 지점에 ‘五木將軍 林森’이라고 이름이 새겨진 총 한 자루와 이름 없는 총 3 정이 함께 묻혀있다니 파봐야겠어요. 평창군과 평창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소형 포크레인 02를 준비해주세요라고 했다. 막내 이모가 큰 이모에게 연락하고, 두 이모부를 동원해서 개수 마을 소나무에서 북쪽 10 미터 지점을 포크레인으로 팠다.

평창군청 국가보훈업무담당자, 평창경찰서 정과 형사, 두 이모와 이모부 입회하에 땅을 팠가. 과연 커다란 항아리가 나왔다. 항아리를 꺼내자 그 속에 30식 기보병총 4정이 있었다. 한정에는 ‘五木將軍 林森’이라고 칼로 새긴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칼로 새긴 상태에서 불로 지져서 새겼기에 세월이 지나도 손상됨 없이 잘 보였다. 강원일보가 특종 보도를 했고, 서울의 5대 일간지와 KBS, MBC, SBS,JTBC, MBN등이 인용 보도를 했다.

조용하게 이모 두 분과 조카가 조촐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보고식을 계획했으나 졸지에 평창군수와 경찰서장, 교육감, 국회의원까지 참석하는 큰 행사가 되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온 천지 오목장군 림삼 기보병총 발견 뉴스가 나가자 림대성의 아들 림창식, 림연식이 찾아왔다. 창식의 아들 림중묵도 찾아왔다. 이들은 림공삼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으니 이모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보상금이나 받은 줄로 알고 얼마를 받았는지 자신들에게도 나누어달라고 했다.

그 말에 내가 화가 났다. 야, 니들 조상 림창식, 림연식, 림병철 조상이지 전찬옥, 순옥 조상이야? 니들이 정신 차리고 40년 전에 독립유공자 신청했으면 얼마간의 금전적 보상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그 보상 기간 이외의 국가유공자 신청으로 국가독립유공자로 승인된 것으로 감사하게 여겨야지 무슨 돈 타령이냐?고 호통을 쳤다.

참 신기한 것은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 소중함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 고향 의병에 대한 구전으로 이야기를 알고 있는 노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향토 의병이야기를 보존해야하는데, 의병 후손들은 배움도 없고 사는 것도 어렵게 살고 국가보훈부에서 이런 것을 수집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남북통일도 1950년 6.25릏 어린 시절에 경험한 사람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이 소중하지 그런 사람들 다 돌아가시고 나면 통일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통일에 대한 감격도 별로 없을 것이다. 개수 마을 소나무 근처를 파고 발견한 소총 4정과 항아리는 강원도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도에서 개수 마을 소나무 일대와 집과 800여 평을 매입했다. ‘임공삼 의병공원’으로 공원을 조성했다.

이모는 행패를 부린 림중묵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고 했다. 어린 시절 친일파 후손들은 평창에서 원주로, 춘천으로, 강릉으로 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에 합격하면 대학을 보냈다. 림중묵은 할아버지가 의병장을 했지만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돈 벌러 남의 청과상회 심부름, 자장면 배달, 구두닦이 등 청춘시절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자동차정비를 잘했으나 공부를 한 것이 없어서 자격증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평생을 무자격증으로 정비를 하다 보니 월급은 늘 최저시급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평창군수와 끈이 있는 건설사가 수의계약으로 수주를 따냈고, 공사 대금을 부풀려 이익을 챙기고 이익의 일부를 자치단체장으로 바로 보내는 것이 아닌 한 다리 건너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는 소양강 처녀 뱃사공 동상을 만들 때, 원주에 민긍호 의병대장 동상을 만들 때, 횡성에 3.1공원을 만들 때 모두 그랬다. 그 일이 어디 강원도뿐이겠는가 서울은 서울시장 바뀔 때마다 공사업체가 바뀌고 이명박이 서울시장일 때, 청계천 공사, 대통령 때 4대강 공사 수조원의 공사, 공사비 중 상당 금액이 이명박 한 다리 건너에 전해졌다. 그 정도면 고위직을 지냈으면 연금만으로도 편히 살아 갈 텐데 그런 리베이트를 받는 것을 보면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

림공삼이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였고, 후손인 림대성, 림창식, 림연식, 림중묵은 힘겹게 살았다. 림대성은 한량이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도박으로 야금야금 탕진했다. 더 있으면 집안이 다 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림공삼은 옥련을 일찍 시집을 보냈다. 20세가 되던 해 전범수와 결혼시켰다.

전범수는 강릉 사천면 병산이 집이었다. 병산에서는 나름 부유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전범수와 림옥련은 결혼을 하고 지금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횡성 휴게소 건물자리가 신혼집이었다. 1944년 12월 3일 림공삼이 사망했다.

젊은 시절 서대문 형무소에서 7년 수감되어 온갖 고문의 후유증인지 알 수 없으나 육척장신에 신출귀몰했던 그도 맥없이 사망했다. 산소는 평창군 대화면 개수 마을 산 113번지에 모셨다. 누런 종이에 붓으로 쓴 ‘오목 일기’를 옥련에게 전해주었다. 그 일기를 막내 이모에게 주었다. 막내 이모 전순옥은 20년 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모는 자신이 시인이기에 물려받은 ‘오목 일기’를 기초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 줄도 못썼다.

가뭄이 든 가을 들판에서

-전순옥-

논밭일 잘하시는

아버지 안계시고

말 잘 듣는 누렁이 황소 없는데도

들판엔 황금 벼이삭 가득 가득 하구나

기계로 농사짓는 좋은 세상 되어서

바둑판 들을 보며 해님도 미소 짓네

농부의 노래 가락이 그리운

이 가을

어머니 살아생전 하셨던 이야기

양수기 이름도 못 들어본 시절

천수답 논을 비를 기다리다

바닥은 다 갈라지고 못자리 모내기도

못하고 그런 논에

가을을 맞이하여

벼에 알이 두 세알씩 매달린 것을

어머니는 수수깡 집게로

낱알들을 훝으니

새해 볍씨 종자만큼 나왔다

그해 경칩날 개구리는

울 힘도 없이 봄이 갔겠지

산비둘기는 그봄에

비 오기를 기도하다

목이 쉬었겠지

그해 겨울 어머니는

5남매 자식을

무엇으로 배를 채워주었을까

그 겨울 어머니 눈물

이제야 보이는 구나

이 짧은 시 한편에 6.25전쟁 후 힘겹게 살아온 이야기가 다 담겼다. 일기에 개수 마을 소나무 근처에 소총을 묻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일기 한 대목이다. 강원도 관찰사 황철은 일본에 부역한 놈이다. 의병들을 식사 대접을 한다고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밥을 배부르게 먹었는데 하는 말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조선에 도움이 안되고 일본의 화만 돋구어 조선 인민이 점점 도탄에 빠진다. 돌아가면 더 이상 의병짓을 하지 말고 농사를 짓거나 농사일이 싫어 꼭 군인을 하고 싶으면 일본군에 귀순하기 바란다고 했다. (강원지사 황철 업적 중에서)

림공삼과 함께 황철의 식사자리에 참석했던 민긍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어제 황제의 전위(傳位)가 황제의 뜻에서 한 일인가? 군부(君父)는 협박을 받아 지위를 잃고 동포는 재앙을 입어 어육이 되었으며, 국토는 일본에 복속되었는데, 인민이 감히 죽기를 아낄 수 있으랴. 이것이 우리가 의병을 불러 일으켜 결사보국(決死報國)하는 까닭이다. 어찌 군사를 일으킬 명목이 없다고 하는가? 지금 촌락이 불타버리고 백성이 흩어진 것은 다 무도한 일인들의 행위다.

(이하생략), (민긍호 전기 중에서)

막내 이모에게 받은 누런 공책 속에서 림공삼 일기를 발견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소 후에도 일거수일투족을 일본 경찰이 감시하고 있어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개수 마을 돌담을 훌쩍 뛰어넘어 다녔다. 림삼을 호위하는 김홍기, 조필원, 지승룡은 늘 지근거리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일본 경찰이 다가오면 3 명 중 한 명이 고의적으로 시비를 걸고 시간을 벌면 림삼과 2 명이 달아났다.

은밀하게 주민들이 돈을 모아준 것으로 일제 기보식 소총을 구입했다. 사람들이 림공삼의 이름에 공(空)을 없는 것으로 해석해서 림삼(林森)으로 나무 목(木)이 5개라고 ‘오목장군’으로 불렀다. 그렇게 ‘五木將軍林森’이라고 소총에 새겼다. 1944년 12월 3일 한 달 전에 김홍기, 조필원, 지승룡 등 3 명의 친한 의병동지들의 총을 함께 묻었다. 평창군 대화면 개수 마을 일대가 ‘림공삼 의병기념공원’으로 조선되었다. 사람들은 정식 명칭 ‘림공삼의 병공원’이 있음에도 ‘오목(五木)공원’으로 불렀다.

2024년 12월 2일 원주로 내려갔다. 낮에는 평창 림공삼 의병기념공원에서 ‘림공삼 의병장 서거 80주년 기념행사’에 두 이모와 참석했다. 막내 이모 집에서 올챙이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오늘 행사한 내용을 정리해서 지역신문 ‘횡성일보’에 행사 사진과 기사를 작성해서 막내 이모 전순옥 이름으로 송고했다. 이모에게 커피 한 잔 해달라고 했다. 얘야, 이 밤에 커피 마시면 잠 못 자는 거 아니야? 아이고 이모, 커피 마신다고 잠 못 자는 사람은 낮에 성실하게 일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개수 마을 의병공원에서 행사했고, 행사 기사 쓰고 얼마나 하루 치열하게 살았는데, 커피 마신다고 잠을 못자겠어요 했다. 나는 커피를 이모는 생강차를 이모부는 쌍화차를 마시면서 TV를 봤다.

정규방송을 하다말고 윤석열 대통령이 화면에 나오면서 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모부는 저거 ‘가짜뉴스’ 아니야? 했고, 이모는 큰이모에게 전화했다. 큰이모와 막내 이모 통화에도 이거 미친 짓 아니냐고 했다. 하필 오늘 ‘의병장 림공삼 서거 80주년에 계엄이 웬 계엄이냐고 한탄하셨다. 이런 나라꼴 보려고 목숨 바쳐 일본 놈 때려잡고 독립운동을 했나 외할아버지가 이 꼴을 보시면 한탄하실 것이라고 막내 이모는 몇 번을 말했다. 끝. (원고 분량 :20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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