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아리랑
소신(燒身) 아리랑
2024년 11월 29일 오후 6시 43분 안성시 칠장사 요사체에서 현승 스님이 향년 69세에 입적했다. TV 자막으로 현승 이름을 보고 나는 넋이 나갔다. 현승과는 이복형제였다. 현승의 모친이 나의 아버지 전처였고, 나를 낳아준 어머니 전금순은 현승의 계모요, 아버지의 후처였다. 어린 시절은 그냥 형과 내가 나이 차이가 좀 많은 형제로 알고 지냈는데, 형이 서북에서 원주 치악 고등학교를 마치고 D대학 불교철학과를 간 후에 형과 나의 출생의 비밀을 알았다.
칠장사 소신 현장에서 A4 2장 메모가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종단 안정과 정법 도생을 발원하면서 ‘현승 스님 입적’을 ‘소신공양’으로 발표했다. 소신공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 시절 국정교과서에 김동리의 ‘등신불’을 배울 때 알았지만 등신불에 나오는 소신공양 이야기와 나의 이복형 현승의 소신공양은 차원이 달랐다. 아니, 소신공양으로 하기에는 너무 미흡하고 천박한 것을 소신공양으로 명명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이 현승에게 그럴 만큼의 빚이 있나?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요사체에 휘발유를 뿌리고 자살한 중에 대하여 4시간 만에 조계종은 ‘자화장 소신공양’이라 밝히고, 대통령실은 무궁화대훈장 추서를 결정했다.
현승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2번이나 역임했다. 그렇게 조계종에서 큰일을 하기 전에는 군인 법사였다. 그의 속명은 함영국(咸泳國)이었다. 아버지 함태호와 어머니 김선미 사이에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다. 형은 함영세(咸泳世)였다. 쌍둥이 아들 중에 큰아들은 세계를 유영하고, 작은아들은 나라를 유영하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영세와 영국이 3세 때였다. 어느 날 치악산 구룡사 일해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강림에 왔다. 어머니는 스님에게 쌀이 없는데 시주를 옥수수로 해도 되냐고 물었다. 일해 스님은 보살님의 정성이 문제지 쌀이면 어떻고, 옥수수면 어떠냐고 했다. 옥수수 한 되를 시주받을 것을 담는 바랑에 넣었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어허 아들이 쌍둥이로고? 스님 어떻게 아이들을 보지도 않고 쌍둥이를 아시나이까?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안 보인다고 믿지 않으면 어찌 부처님의 설법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두 아들 중 한 명은 출가할 팔자이오니 소승이 데려가 잘 가르치겠소? 아니, 그럼 두 아들 중에 어느 아이를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작은아들을 데려갈까 합니다. 그렇게 스님과 어머니가 대화 중에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나왔다. 무슨 일이냐? 예, 아버님 치악산 구룡사에서 온 스님이 아들 두 명 중 작은 애가 스님이 될 팔자라고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뭐야? 이 탱중, 어디 남의 귀한 손자를 데리고 간다는 말을 함부로 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은 영세, 작은아들은 영국이라고, 할아버지, 아버지 욕심이 너무 과하십니다. 치악산 산신령이나 부처님이나 조부와 아비의 욕심이 큰 죄로 두 아들 중에 큰아들은 단명할 것이고, 작은아들은 출가하여 이 집 안 함 씨와 속세의 인연이 없는 아들로 사는 것이 득이 될 것입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스님은 떠났다. 그때까지 두 아들이 살아 있으면 함 씨 집안의 후손으로 키우시고 혹시라도 한 아들만 남으면 그대는 욕심부리지 말고 소승을 따라가게 하시지요?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치악산 구룡사 스님이 떠나고 아들이 둘이 똑같이 홍역을 앓았다. 열이 올라도 같은 시간에 오르고 내려도 같은 시간에 내렸다. 그런데 영세는 죽었고, 영국만 살아남았다.
약속대로 일주일 후 구룡사 일해 스님이 집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 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립문에 나가 합장의 예를 표하고, 옥수수 한 되를 시주했다. 작은아들 영국도 일해 스님에게 넘겼다. 그날 이후 영국은 절간 아이가 되었다. 절에서 스님이 임무를 분담해서 교육했다. 한글과 천자문 가감승제를 가르쳤다. 구룡사 스님들이 중․고등학교 과정을 분담해 가르쳤다. 원주에서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본격적인 불자가 되기 위해 D대학 불교철학과에 진학했다. 모든 교육과목을 이수하고 현승이라고 수계 받았다. 전후방 부대에 군내 사찰이 있는 곳을 10년 동안 군종 법사로 봉직했다. 예비역 소령 군종 법사로 전역하고 본격적으로 조계종 일했다. 총무원장에 도전하여 두 번이나 당선되었다. 불교 신도가 너무 나이 많은 신도만 있다고 젊은 대학생을 상대로 템플스테이 사업과 여름, 겨울 방학에 학생을 대상으로 ‘불교 캠프’를 개설했다. 효과 만점이었다.
조계종단 예산과 정부의 문화체육부 예산 중에 청소년 예산 일부를 지원받는 것을 성사시켰다. 이렇게 왕성하게 사업을 추진하던 스님이 2023년 11월 29일 오후 6시 43분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요사채에서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향년 69세였다.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이제는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요사채에 불이 났고, 불구덩이 속에서 타서 사망했다. 119나 경찰보다 국가정보원 직원 77명이 먼저 도착했다. 신창원 국가정보원 1 차장이 국가정보원장 직무대리를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칠장사에 현승 스님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거, 말이야 대공 용의점이 있나 확인하라는 것이다. 신 차장은 국가정보원 국내 팀 전원을 소집했다. 지금 즉시 안성 칠장사로 가서 그의 유품을 수습하라고 했다. 윤 대통령 후보 시절에 50억 원이라는 큰돈을 선거비용에 보태 쓰라고, 김 여사 측에 기부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윤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50억 원의 투자에 대한 이익금 환수에 들어갔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장군 진급 심사에 종교 간 균형 있게 진급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대령 중에서 군종 법사로부터 추천받은 명단을 영부인에게 전하고 꼭 장군 진급 심사를 시켜달라고 했다. 하지만 장군 진급 발표에 그 명단은 한 명도 안 되었다.
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경 국보인 숭례문에 60대 노인이 불을 질렀다. 불타버린 숭례문을 복구하는 데 5년 걸렸다. 2013년에 정부에서는 전국 문화재에 대하여 이런 화재 사고에 대비한 소방 방재시설 예산으로 연간 200억 원씩 10년에 걸쳐 2,000억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현승이 군종 법사 시절 목격한 것이 군대 공사는 수의계약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 사단장이나 군단장과 친한 공사업자가 수의계약으로 공사를 하면 부실 공사가 되더라도 무조건 공병대대나 공병여단장이 준공공사 합격을 해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그대로 답습했다. 전국 사찰 문화재에 스프링클러 시설이나 전기 과전류가 흐르면 누전차단기가 떨어지는 시설공사업체로 현승 스님에게 사전에 사례금을 보낸 업체가 수의계약으로 문화재 소방시스템 사업을 하면서 부실 공사가 문제가 되었다. 속리산 법주사, 치악산 구룡사 등 산속 높은 곳에 있는 사찰에 과전류가 흘러 누전차단기가 떨어지면 현장에 안전책임자가 점검하고 이상이 없으면 전원을 다시 올려야 전기가 켜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이 귀찮다고 항의가 일자 시공업체에서 누전차단기가 떨어지고 2분 30초가 흐르면 자동으로 차단기가 복구되도록 개선한다고 만들었다. 문제는 일시적인 과전류가 흘러 문제가 된 것은 그렇게 상전 되면 문제가 없으나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의 ‘각림사’에 차단기가 2분 30초 후에 상전 되었다.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났다.
각림사(覺林寺),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천년고찰이 전소되었다. 이 사건으로 시공업체가 현승 스님 속세의 인연 어머니 언니의 아들인 이종사촌 형이 구속되었다. 현승도 조계종 총무원장에서 사퇴했다. 그렇게 사퇴하고 은사인 일해 스님이 만든 ‘미정 불교문화재단’을 인수받아 문화사업을 했다. 전국 사찰에 납품되는 생수 ‘감로수’를 한 병에 100원씩 납품 통관료도 받았다. 일해 스님은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 아웅 산 순직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과 학술연구재단으로 ‘일해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그 일해라는 것이 전두환의 호(呼)였다. 사실은 전두환이 1 사단장 시절 부대의 사찰 불이사(不二寺)의 주지가 일해 스님이었다.
전두환이 부대의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 상담을 했고, 일해 스님의 말을 듣고 나면 신기하게 해결되었다. 현승 스님은 좋게 말하면 실력 있는 스님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치적인 힘의 원리를 조기 터득한 스님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다른 스님은 한 번도 못 하고 입적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번이나 역임한 것은 분명히 조계종 내에서는 큰 업적과 실력과 인맥이 형성되었다. 대종사에 오른 스님이 자살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논평이 많았다.
현승이 입적한 칠장사에 국가정보원 인원 70명이 가서 대공 용의점을 확인했다는 것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대공 용의점이면 북한 간첩이 내려와 현승 스님을 독침으로 죽인 것도 아니고, 현승이 불교 재단의 돈을 북으로 반출한 것도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은 자살을 엄청난 규율에 반하는 행위다. 봉은사에 근무하던 스님이 왜 안성 칠장사까지 가서 자살했을까? 불교에 어떤 가르침을 남기지 않고 입적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소문만 여자 신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만 돌았다.
현승이 나의 형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알려주셨다. 어머니 말을 듣고 봉은사 근처의 ‘미정 불교문화재단’에 형을 찾아갔다. 형은 스님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담담했다. 나는 종교가 천주교다. 세례명이 마티아다. 천주교가 된 것은 성격이 사람 많이 모이는 것을 싫어해 소위 교육기관에서 종교를 기독교, 불교, 천주교 무조건 선택하라고 해서 기독교를 보니 100명 이상이었다. 불교를 보니 80명 정도였다. 천주교를 보니 13명이었다. 바로 천주교를 썼다. 일요일 좀 편히 쉬는 것이 종교행사인데, 이거 앉았다. 일어났다. 찬송가에 외우는 것은 왜 그리 많은지 싫어졌다. 하루 종교행사 마치고 구대장 조홍연 중위에게 행정반으로 갔다.
“충성! 50번 학생 장교 함일평 소위 구대장님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뭐야?”
“종교행사 천주교를 불교로 바꾸겠습니다.”
“이유는?”
“종교행사라는 것이 좀 훈련으로 지친 몸을 쉬러 가는 것인데, 천주교는 앉았다 일어나기 반복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불교가 편해서입니다.”
“함 소위, 이미 6중대 210명 중 기독교 110명, 불교 86명, 천주교 14명 윤승호 소장님께 보고 다 했는데, 정정 보고 하면 구대장이 뭐가 되겠어?”
“그래도 한 중생을 살리는 것이 부처님 듯 아니겠습니까?”
“좋다. 변경하는 대시 오늘부터 퇴소하는 날까지 화장실 청소 말뚝으로 할래? 아니면 그냥 천주교로 할래?”
“그냥 천주교 하겠습니다. 충성!” 그렇게 세례명 마티아 함 소위가 되었다.
그래도 형을 만나서는 불교식으로 합장의 예를 표했다. 형은 사북에서 안경다리 시위 이야기를 꺼냈다. 아우님은 원주에 나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라 안경다리 시위를 모르지? 예.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었어요. 현승 스님은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다큐멘터리 해설처럼 말했다. 1980년 4월 21일 오후 3시경이었다. 동원탄좌 사 북 광업소에서 광부 동향을 사찰하던 정보과 형사 이학선이라는 자가 있었다. 광부들이 정보과 짭새다! 하자 황급히 도망쳤다. 광부들을 향해 지프차를 돌진시켰다. 광부 원창호와 장호상이 지프에 받혔다. 운전하는 순경과 이학선은 그대로 도망갔다. 광부들이 경찰차가 사람을 쳤다고 분노했다. 분노한 광부들이 사북 지서로 몰려갔다. 지서를 파괴했다.
4월 21일 밤에 사북 광업소 회의실에서 관계기관 대책 회의를 했다. 장성경찰서장, 정선군 보안대장, 중앙정보부 정선지역 조정관, 정선경찰서 정보과장이 분노한 광부들에게 폭행당했다. 사태수습 광부와 공권력 대표자와의 회의에서는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안경다리에 모인 광부들을 해산을 시켰다. 광부들이 해산하자 계엄 당국은 용의자 명단을 작성했다. 계엄사령부는 보안부대장, 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모여 사북 사건 합동 수사단을 만들었다. 광부 중에 주동자급으로 몰려 잡혀간 사북 경찰서 조사실 내부에는 책상과 의자 옆에 각목, 포승줄, 고무호스, 곡괭이, 주전자가 놓여있었다. 강당에는 물고문을 위한 욕조도 설치되어 있었다. 잡혀간 광부들은 통닭구이 상태로 각목에 몸을 거꾸로 매달고 구타를 했다. 각목, 고무호스로 구타당한 광부들은 몸이 가지색으로 멍이 들었다. 약은 물파스, 안티푸라민이 전부였다. 사북 경찰서 담장 앞에는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광부의 아내들이 아이를 등에 업고 걷는 아이는 손을 잡고 경찰서 밖에서 서성거렸다. 면회는 없었다. 굳게 닫힌 철문과 담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안경다리 전투’는 400여 명의 경찰과 800여 명의 광부와 광부 가족 간의 충돌이었다. 안경다리 전투에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수천 명의 광부와 주민들이 안경다리에 가지 않은 사람도 사후에 연행되었다. 어용 노조위원장 이진기의 아내가 게시판 옆 기둥에 묶였다. 이 한 장의 사진이 사북사태를 덮어버렸다.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 요구가 사북 사건의 원인이지만 국가가 광부아내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45년이 지난 지금도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
형(현승 스님)은 1980년 사북서 경험한 것을 TV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해설을 하는 성우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우님은 사북서 중학교만 마치고 원주로 나가 공부하고 있을 때라서 고향이지만 사북 사건에 대해 잘 모르지요?”
“ 예.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는 했는데, 거의 불경한 이야기라 쉬쉬했어요.”
김재규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만 안 했어도 이 나라는 이미 선진국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형,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박정희 타령이야? 소리가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참고 들었다.
현승 스님은 당신이 사북 탄광에서 일할 때 국무총리실 노호식 서기관이 단장이 되어 정부 석탄산업 현장점검단이 내려왔다. 총리실 노 서기관이 4급으로 단장이고 총리실 사무관, 상공부 사무관, 보건복지부 주사, 석탄공사 부장, 과장, 대리 각 1명이 편성되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외교관으로 해외에 수없이 많은 나라를 다녔다. 그때 대사관에서 하도 꼼꼼하게 하급 공무원들에게 물어서 별명이 주사 대사라고 불렸다. 그러다 국무총리가 되니 역시 총리실에서 꼼꼼하게 일하다 보니 별명이 주사 총리였다. 군대로 치면 사단장이 하사처럼 좁쌀처럼 굴어서 김 하사라고 별명이 붙었던 ‘김희수 탄약 사령관’ 같았다.
김 탄약 사령관 시절 나는 해운대, 송정 일대가 200만 평 탄약부대 시절 경비중대장이었다. 사령관이 탄약부대 울타리를 걸어서 한 바퀴 다 돌았다. 3개 경비구역으로 나누어 나는 3 경비중대장이라 우리 구역만 안내 수행했다. 출발을 3 경비에서 해서 2 경비, 1 경비 역순으로 했다. 탄약사령부 본부 건물이 1 경비구역에 있었기에 그렇게 했다. 정말 몇십 년 그냥 방치된 철책선 오물을 그때 다 치우느라 경비 중대 장병은 고생은 했으나 다 치우고 나니 뿌듯했었다.
예고 없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얼떨결에 대통령이 되었다. 김재규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3개월 전 학생이 방학했을 때 박 대통령이 최 국무총리를 불렀다. 임자 급한 일은 아니지만 언제 시간이 되면 총리가 한번 직접 탄광을 방문해 보라고 했다.
“아니, 각하 탄광은 왜? 방문하라는 것입니까?”
“임자, 말이야, 우리가 막장, 막장, 뭐 막장 드라마 같다는 소리는 쉽게 하지만, 국민은 막장을 몰라. 총리가 막장을 방문해 막장을 국가가 개입해서 광부들이 일할 때는 일하더라고 일 마치면 제대로 씻고, 먹고, 잠자는 시설을 해주어야지 나라가 골고루 발전하는 것이지 이거 그대로 방치하면 광부는 조선 시대 노비나 쿤타킨테에 나오는 흑인 노예로 인생을 마감할 거야. 그러니 저 상공부 한심한 놈들에게 조사시키면 번지르르한 보고할 것이 뻔해, 총리가 직접 보고 보고해. 그러면 총리가 보고한 대로 조치해 주겠어?”
그것이 불과 몇 달 전 지시인데, 탄광 방문 일정도 잡기 전에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사북 탄광을 방문한다고 발표하면 군대서 사단장이 대대 방문해도 전 난리인데, 사북 탄광 갱도를 금으로 도금할 것이다. 최 대통령은 총리 시절 국무조정실에서 묵묵히 일을 잘하던 노호식 서기관을 불렀다. 노 서기관이 상공부, 보건복지부, 광업 공사 직급별 한 명씩을 파견받아 사북 광산을 실태조사하고 보고하라고 했다. 노 서기관도 물었다. 각하, 산적한 일도 많은데, 광산실태조사가 그리 중합니까? 응, 중해서가 아니고,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이 나에게 시킨 일인데, 이거 졸지에 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대통령이 탄광을 방문한다면, 갱도를 금으로 도금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소리소문 없이 노 서기관에게 지시하는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하고 일선에서 물러나 물려받은 미정 불교문화재단만 운영하던 중에 윤 대통령 후보자의 아내 김 여사가 찾아와 대선에 도와달라고 했다. 일단 선거자금에 보태라고 50억 원을 지원했다. 야당 모 국회의원이 사찰 입장료 받는 것에 대하여 봉이 김선달이라고 한 것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불교계 원로들에게 사과하러 온다는 것을 오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불교계의 표가 몇 십만 표는 달아났다.
윤은 당선되자마자 봉은사 옆 ‘미정불교문화재단’으로 찾아와 현승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거기까지였다. 해우소 가기 전과 가고 나서 사람 마음이 달라진다더니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현승에게 간절히 매달리던 대통령 후보와 부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과 영부인이 되더니 간절함은 사라지고, 떠받들어주기를 바라고 과거에 한 말을 망각했다. 대통령 부호 시절에 약속한 것을 지키라고 영부인과 대통령에게 말했으나 허사였다. 오히려 대통령은 현승에게 전화를 해서 자꾸 그런 요구를 하면 검사들을 시켜서 과거 현승에게 조사했던 파일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했다.
전국 사찰에 납품되는 생수 감로수 1병에 100원씩 통관료를 받는 것과 미정불교 재단의 매니저 윤보경 보살과의 부적절한 관계도 폭로하겠다고 했다. 그날 칠장사에서 요사채에 불을 지르기 전 국가정보원 홍석원 1 차장 지시로 국가정보원 직원 70명이 칠장사 주변에 모여들었다. 현승 자살에 대공 용의점을 살펴보라고 국가안보실장이 지시했다. 현재 아크로비스타라는 아파트 위치가 왕년에 무너진 삼풍백화점 터였다. 그때 백화점이 무너진 것이 간첩 소행이 아닌가? 확인해 보라는 수도방위사령관 지시에 정보사령부 예하 부대 신문 기정 부팀장이던 내가 팀장이 휴가라 대신 출동했다. 무너진 중간중간을 다니면서 샘플 채취를 했다. 간첩 소행이라면 화약이나 다이너마이트 도폭선, 원격조종기 등이 있어야 하는데 발견 못 했다. 함께 출동한 국가정보원 4급, 기무부대 소령, 수도방위사령부 정보처 소령 모두 대공 용의점 없다. 는 것에 동의하고 보고서도 대공 용의점 없다고 보고했다.
현승 스님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윤석두까지 역대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로 정치 승려라고 비판받았다. 대통령선거에 자신이 불고 신도 천만 명 중 절반은 밀어줄 수 있다는 호언장담으로 출마자의 환심을 샀다. 종단과 정치권을 넘나들며 각종 이익을 추구했다. 종교 취재기자 사이에서 고려 시대 신돈이 환생한 ‘요승(妖僧)’이라는 말도 들었다.
한때 북한도 방북했다. 문익환 목사, 임수경 방북으로 세상을 떠들썩한 방북도 있지만, 현승 스님의 방북은 국내 신문에 기사 한 줄 안 난 은밀한 방북이었다. 주식회사 삼매경이라는 곳이 대북 사업하면서 현승 스님을 방북 책임자로 지명했다. 그 일로 방북 후에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현승 스님이 자살을 미화하여 소신공양이라는 보도가 금방 나왔다. 대통령은 문화훈장 무궁화대훈장을 추서 했다. 일부에서는 자살한 놈에게 무슨 훈장이야 고 했지만, 조계종과 정부는 그냥 밀고 나갔다.
대한민국 훈장이 똥값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여기에 참가한 유공자에게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심일 무공훈장 등을 수여하도록 육군본부에 명단을 보냈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다음 인사참모차장이 훈장 수여 공적조서 담당이었다. 차장은 훈장이라는 것은 적과 싸워 무공이 있는 자에게 수여하는 것인데, 광주 시민과 광주 대학생이 데모는 했지만 적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말로 준장으로 옷을 벗었다. 다음에 온 차장이 공적조서를 만들고 12.12 군사 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진압 유공자에게 훈장이 수여되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시절에는 서정주라고 친일 하는 시를 많이 쓴 시인이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고의 성군이라는 시를 써서 59회 생일 축시로 바쳤다. 금관문화훈장이 수여되고 소설가 황순원은 은관 문화 훈장을 수여했다. 황순원은 훈장 수상을 거부했다. 그러니 자살한 현승 스님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이 나라 훈장은 이미 똥값이 된 지 오래였다. 똥값 훈장은 또 있다. 김천식이라고 도자기 명인이라고 하지만, 자기의 굽는 가마하나 없이 남이 만든 도자기를 저렴하게 구매, 약간의 그림과 코팅을 해서 천만 원, 이천만 원에 팔던 사람도 김영삼 정부 시절 명인이 되고 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승 스님이 북에 다녀온 것을 자랑스럽게 동생이니까 허물없이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 그 너머를 간파하고 있다. 21년 3개월의 정보장교 근무 중에 소대장 12개월, 중대장 36개월을 뺀 나머지 기간은 정보장교로 대대, 연대, 사단, 군단, 국군정보사령부, 국군심리전단에 근무했다. 근무 부대만 달랐고, 하는 일은 같았다.
우리나라 목사, 신부, 스님, 소설가, 시인이 북한을 한번 다녀오기만 하면 북한 찬양론자가 된다. 북한을 방북한 사람에게 별장에서 특별 접대한다. 그 접대를 모르게 녹화하고 남으로 출발하기 전에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남으로 와서 북한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강남 룸살롱에서 접대받는 것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다 접대받을 수 있지만, 북한 별장 접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북에 다녀온 사람이 북한을 죽을 때까지 찬양하는 것이다. 현승은 한때 미모의 배우가 봉은사를 찾아와 연예인을 위한 법문강연을 요청했다. 그 일로 현승 스님이 가수, 배우, 뮤지컬 배우 등을 대상으로 ‘화요 법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한 대통령 후보 양쪽에서 현승 스님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
봉이 김선달 이야기로 손가락질받은 국회의원이 조계종 원로에게 사과하겠다는 것을 현승이 거부했다. 선거 결과는 근소한 차이로 윤 대통령이 승리했다. 영부인이 현승에게 전화했다. 대통령 서거에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현승은 영부인에게 수시로 전화했다. 장관 인선에도 불교 신자를 몇 명 넣어달라, 장군 진급 심사에도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 각각 몇 명이 불자로 진급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경찰도 총경 승진에 불교 신자 2명은 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런 모든 이야기를 영부인이 대통령에게 했다. 대통령은 화난 상태에서 현승 스님에게 전화했다.
“아이고, 대통령님 병고 없으시죠?”
“별고 많아서 전화했다. 현승, 당신이 대통령선거에 애쓴 것은 인정하지만 어차피 하늘은 내 편이었어? 당신이 도와줘도 당선, 당신이 안 도와주어도 당선이야. 그리고 선거 지났으면 그냥 묻어가야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군인 진급에 불교 몇 명, 총경 진급에 불교 몇 명 그런 소리 하려면 당신이 대통령 할래? 한 번만 더 우리 아내에게 전화하면 말이야, 당신 전국 사찰에 감로수 납품하면서 한 병당 100원인가 200원인가 받은 거, 미모의 김경희와 동거한 거, 대북 송금 불법으로 한 거 다 검사들 시켜서 언론에 발표할 테니까 알아서 해, 알았지?”
“군사 독재 시절보다 더 심한 거 아닙니까?”
“심해도 할 수 없어, 당신 맘대로 해?”
그것이 이승에서 현승 스님과 대통령의 마지막 통화였다. 현승은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 바람 불면 쉬 흔들린다. 해우소 갈 때 마음과 해우소 다녀온 다음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대통령에게서 확인했다.
국무총리실에서 지시했다. 상공부, 보건복지부, 석탄공사 부장, 과장, 대리와 석탄 공사 감사 중 1명을 파견 보내라고 했다. 노 서기관은 파견 나온 공무원과 광업 공사 직원에게 현장 조사 취지를 말했다. 이번 조사는 최 대통령 지시 사항입니다만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최 대통령이 국무총리 시절에 지시받은 사항입니다. 가감 없이 진실한 조사를 해서 이 나라가 석탄산업이 막장 산업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일터로 만드는 기초조사를 한다는 마음으로 임해달라고 했다.
탄광 입구에는 석탄 운반 레일이 갈려 있다. 서울서 내려온 현장조사팀은 사복을 벗고 광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안전모와 헤드라이트도 장착했다. 광차가 지상에서 레일을 달릴 때는 몰랐는데 갱내로 들어가자 숨이 막혔다. 머리가 띵했다. 매일 일 년 365일 여기서 일하는 광부가 옆에 있어 현자조사팀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힘겨운 것을 참았다. 10분 정도 달리자 광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지하로 내려간다고 안내하는 사북 영업소장이 말했다. 승강기로 7-800m는 내려갔다. 석탄 캐는 곳이 동해 해수면보다 200-300m 더 낮은 곳이라고 사북 영업소장이 말했다. 이런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고 기차로 서울로 운반해서 삼천리 연탄, 삼표 연탄회사가 19공으로 찍어낸 것을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처음 경험하는 공무원이나 석탄공사 직원은 숙연해졌다.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기가 멈춘 곳에서 광부와 현장조사팀이 함께 내렸다. 막장은 더웠다. 지하 7-800m에서 지열이 갱으로 몰려왔다. 광부가 현승 스님은 석탄을 캤다. 현승은 헬멧에 부착된 헤드라이트가 흐리자 얼른 허리에 차고 있는 예비 배터리 일종인 ‘캡부’라고 불리는 충전기를 교체했다. 불이 환하게 밝아졌다. 착암기로 선두에서 막장의 탄을 착암기로 갈랐다. 뒤따르는 광부가 덩어리를 바구니에 담아 되로 내보냈다. 석탄 가루가 현승 얼굴과 눈에 날아들었다. 묵묵히 작업했다. 착암기 소음으로 옆 사람 옆 광부, 현장조사팀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탄을 캐는 최전방 막장은 쉬는 공간도 없고 화장실도 없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광부들은 그 자리에 털썩 앉아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었다. 현승도 자신의 도시락을 먹고 서울 양반들은 사북 영업소서 만든 도시락을 말단 주사가 분배했다. 제일 먼저 노 서기관에게 주었다. 현승 도시락은 반찬이 김치와 마른 멸치 고추장인데, 노 서기관 도시락은 반찬이 계란프라이, 장조림, 김치였다. 노 서기관이 오우 마른 멸치 나도 좀 먹읍시다 하면서 계란 프라이 반을 숟가락으로 나누어 현승 도시락에 올리고 마른 멸치 한 숟가락을 퍼 갔다. 현승은 프라이 반쪽이 세월이 45년이나 흘렀어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대변은 갱내서 막장 광부가 일하는 것에 지장이 안 되는 곳으로 나와 일단 싸고 신문지에 말아두었다가 오후 채탄이 다 끝나면 들고 지상으로 올라올 때 가지고 나와 지상 화장실에 버렸다. 오후 일을 다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노 서기관이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원래 그날 저녁을 사북 영업소장이 서울서 내려온 현자조사팀을 위해 사북 읍내 거구장이라는 식당서 만찬을 준비했다. 노 서기관은 현승과 점심에 마른 멸치와 계란프라이 바꾸어 먹은 인연으로 저녁도 같이 먹기로 했으니 전혀 부담 느끼지 말고 만찬을 하라고 했다.
거구장과 좀 떨어진 강림식당으로 갔다. 강림식당은 현승의 계모이고 나의 어머니의 언니, 나에게는 큰 이모가 하는 식당이었다. 이모와 어머니가 어떻게 이곳 사북 탄광에 오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냥 거기 사니까 사는 줄 알았다. 강림식당은 꼭 김치도 강림에서 가져온 배추로 만들었다. 돈만 내면 사북도 배추 천지거늘 큰 이모는 곡 강림 배추를 고집해서 큰 이모부가 일주일에 한 번 강림에 가서 배추를 사서 사북으로 가져왔다.
강림식당서 현승은 큰 이모라고 불렀다. 사실 계모의 언니라 그냥 사장님! 해도 큰 이모는 상처받지 않을 것을 큰 이모라고 서울서 내려온 국무총리실 4급 서기관을 손님으로 맞이해 영광이라고 했다. 손이 커서 돼지고기도 커다랗게 넣고 두루치기를 했다. 메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두루치기 세 종류인데 현승 스님이 학생 시절 강림서 두루치기를 잘 먹은 것을 알고 있기에 돈 내는 노 서기관에게 묻지도 않고 두루치기에 밥 두 공기 소주 한 병을 내놓았다.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가자 노 서기관은 본격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특수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다른 광부가 있어 물어보지 못했는데, 광부 일은 몇 년이나 했습니까?”
“1년 1개월입니다.”
“나이가 젊은데, 왜 이 힘든 막장 생활을 하는가요?”
“평생 하라면 못하지요, 사실은 여기 광산에 위장 취업한 땡중입니다. 속세의 이름은 함영국이고요, 불교철학과 가기 전에 치악산 구룡사에서 수계를 받았습니다. 법명은 현승입니다.”
“아니, 그럼 언제 사북을 떠날 예정인가요?”
“편지를 써서, 그동안 현장에서 수행한 것을 보고 하고 지도교수 겸 수행 모범 스님인 일해 스님이 서울로 오너라 하면 올라갈 것입니다.”
“어쩐지, 다른 광부보다 젊어도 너무 젊고, 이 힘든 막장서 일하는 사람치고 표정이 밝아 이상했습니다.”
“총리실서 나오셨다니까 한 말씀드리자면, 광부 임금은 늘 제자리입니다. 이유는 그래도 전국서 밀려드는 구직자가 차고도 넘치니 임금 올릴 생각을 안 합니다. 낮에 갱내를 보셨겠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나무 기둥 보셨죠? 일 년에 몇 번 갱내에 광부가 매몰되어 죽어도 뉴스 때 그때 잠시 안전 어쩌고 떠들지, 두 달만 지나가면 원위치입니다.”
광부들은 3교대 방식으로 일했다. 일요일도 국경일도 없었다. 그냥 3교대 조를 짜주는 대로 노예처럼 일했다. 밤 11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일하는 조를 ‘병반(丙班)’이라고 했다. 갑, 을, 병, 정의 셋째라 병이다.
광부가 가장 싫어하는 반이지만 순서가 되면 누구나 해야 했다. 광부로 정년퇴직 후 오갈 곳 없어서 다시 온 광부를 덕대 광부라고 불렀다. 광산을 떠나 타지서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 다시 돌아온 사람 역시 덕대 광부라고 불렀다. 안경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늘 먹물 같았다. 노 서기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노 서기관은 광산회사의 간부거나 동원탄좌 영업소장이면 할 수 없는 진솔한 이야기가 고맙다고 현승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노 서기관이 일어나자고 했다.
서기관님 <탄광 아리랑>을 아시나요? 그런 아리랑도 있어요? 정선아리랑은 들어봤어도 탄광 아리랑은 금시초문입니다. 정선아리랑 곡조에 부르면 딱 맞습니다.
<탄광 아리랑>
태백산 기차 소리는 매봉산을 울리고
막장 발파 소리는 내 마음을 울리네
가기 싫은 병반 생활 어느 누가 알겠소
토끼 같은 자식 생각에 또 한잠을 자누나
오늘 떠날지 내일 떠날지 일 수 없는 막장에
돈 떨어지면 술집 여자도 학대뿐이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모르는 사람들은 현승 스님이 칠장사에서 가부좌 상태로 반듯하게 죽엇다는 소릴 하는데, 거짓말이다. 형승 스님의 계모요 나의 모친에게 들은 바로는 엄청 겁이 많았다고 한다. 그 말로 미루어 현승은 칠장사 요사채에서 문고리를 잡고 엉덩이를 뒤로 길게 뺀 채로 검게 탔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나약함을 알기에 문고리를 철사로 묶은 후에 불을 질렀다.
검정 교복 동창생
고교 동창 정규석은 강남구 일원동에서 <흑석 보신탕>을 운영했다. 보신탕을 먹지 못하는 손님을 위해 삼계탕을 병행했으나 매출 비율은 95% 보신탕 5% 삼계탕이었다. 서울 대부분 보신탕집이 모란시장에서 개고기를 납품받았으나 흑석 보신탕은 정규석 사장 제일 큰형이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서 개를 800평 야지에 펜스치고 방목했다. 완전 방목이 아니고 통나무로 소 여물통처럼 만들어 개가 먹을 수 있게 땅바닥에 주변에서 수거한 잔반을 공급했다.
흑석 보신탕이 잘 된 이유는 개고기 맛을 한번 와서 먹어본 사람은 다른 보신탕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명한 카피처럼 모르고 못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와본 사람은 다시 온다.라는 수준이 되었다. 고향에서 농사지으면서 개 300마리를 키웠다. 개 숫자가 200 이하로 내려오면 강아지를 사서 300으로 맞추었다. 매주 10마리씩 개를 도살해서 버릴 것 버리고 냉동탑차로 흑석 보신탕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잘되던 식당이 어느 해인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몇십 년을 잘 사용한 청와대가 흉 지라고 대통령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첫 법안을 발의한 것이 ‘개식용 금지법’이었다. 전국의 보신탕집은 직격탄을 맞았다. 매출 95%를 유지하는 보신탕은 수요가 없고 5%의 삼계탕으로 <흑석 보신탕>을 더 유지할 수 없어 폐업 신고를 한다고 했다. 폐업 1주일 전에 흑석 고등학교 13기 총무 박해성이 송년회를 흑석 보신탕에서 한다고 했다. 한상신은 예비역 육군 소령이다. 병과가 정보라서 소대장, 중대장을 뺀 나머지 기간은 서해안 백령도에서 동해안 통일전망대까지 북한의 전파가 잘 잡히는 고지는 다 근무했다. 하지만 중령 진급에 3진 아웃이 되어 만 45세가 되는 생일이 들어있는 다음 달 말일에 전역했다. 전역 후 백수 기간은 초, 중, 고, 대학 아무런 동창회도 참석 못 했다. 사회에서 경험할 만큼 경험하고 최저 시급 일자리를 얻어 일하는 중에 고등학교 3학년 2반 강두연을 만나 고교동창회를 알고 총무가 박해성인 것을 알고 전화했다. 해성이가 송년회 문자를 보내주어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고3 담임 김용언 선생에게 체육복 체육 시간 아닌데 입었다고 두들겨 맞은 강두연, 미친개 별명이 있는 조태이 선생에게 슬리퍼로 맞은 이용렬, 육군 중사로 전역한 신직수, 해군 중사로 전역한 박해성, 육군 대령으로 전역한 윤승호, 공군 대령으로 전역한 홍승연, 육군 중령으로 전역한 전풍호까지 왜 그리 군 간부 출신이 많은지 예비역 육군 소령은 명함도 내밀 수 없을 만큼 쟁쟁한 동기들이었다. 한의사 김선호, 세무사 금동해, 치과의사 강상규, 대학 총장 안상규 등등이 앉아 있고 사이사이 여자가 있었다. 이거 부부 동반인데 나 혼자 싱글로 왔나 싶었다. 총무에게 갔다.
“야, 박해성 총무, 부부 동반이면 부부 동반이라고 알려주었어야지? 이게 뭐야, 다들 쌍쌍으로 앉았는데, 나만 싱글이잖아?”
“야, 한상신 길거리 가서 아무 여자나 하나 데려와, 너 ROTC 하면서 5분 대기했다며?”
“ 야, 그때가 언제인데 1984년이다.”
여자들이 까르르 웃고 난 후에 총무 박해성이 알려주었다. 부부가 아니고, 흑석동에서 우리 흑석 고등학교 있던 자리에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짓고 학교를 서울시에서 강남으로 이전하라고 해서 이전했다. 강남교육청에서 흑석 고등학교만 오면 승인 못 해주고 흑석 여자고등학교까지 남녀 공학으로 와야 허가한다고 해서 1996년에 이전하면서 후배들이 남녀 공학 흑석 고등학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동네가 도곡동인데 도곡동에 웬 흑석 고등학교냐고? 도곡동 학부모들이 데모해서 어쩔 수 없이 흑석 고등학교를 J 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지었으니 학교 이름을 J 대학교 부속 고등학교로 했다. “
“아하, 미안해, 알지도 못하고 총무를 나무라서, 그건 그렇고 왜 자리를 가운데 조홍연 예비역 대령, 윤승호 예비역 대령을 앉히고 이 모임 결성에 애쓴 신직수, 박해성이는 저 말석이야?”
“직수는 육군 중사, 해성이는 해군 중사 출신이야?”
“야, 여기가 재향군인회장 선거 장소야? 군대 계급은 군대 모임에서나 계급순으로 앉으라고 해 여기는 흑석 고등학교 80 모임이야?”
“야, 그래도 계급 높은 사람 중앙에 앉히는 것이 예의 아니냐?”
“야, 내가 대방동 S 중학교 총무 8년 차인데, 처음 동기회 사당동에서 한다고 나갔더니 중앙 자리 4석을 비워둔 거야, 야 여기는 왜 비원 붙어서 앉으라고 했더니, 육사 40기, 학군 22기, 3사 19기 대령 자리라고 해서 오는 순서로 앉으라고 했다. 늦게 온 그 4명이 가운데 자리 안 비웠다고 꾸중하는 것을 내가 야, 여기가 재향군인회 모임이야? 중학교 모임은 동등하게 중학생 때 기분으로 오는 대로 얹으면 되지 왕년에 군대 생활과 지금 이 자리가 무슨 상관이냐고 호통쳤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8년 동안 총무 했다. 넘겨주려고 했더니 자기는 하고는 싶은데 아내와 자식들이 반대한다고 나더러 종신 총무 하라고 해서 내가 새장가들면 총무 면하게 해달라고 했다.”
청룡대학부속고 와 부속 여고 학생 시절은 별도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후배들이 남녀 공학이 되어 이렇게 송년회를 남녀로 하게 되니 새로운 기분이었다. 총무 박해성이 윤승호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자기 근황을 말하라고 했다. 윤승호, 이미정, 안경진, 배순선, 이상희, 유지인, 김선호, 유혜숙, 강두연, 이주석, 양경숙, 신직수, 박은경, 변형구, 윤보경, 전풍호, 차수란, 김영섭, 노명래, 박해성, 정규석, 곽희진, 마지막으로 한 상신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동기회에 처음 나온 한 상 신입니다. 예비역 소령이고 사는 곳은 개봉동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노래 한 곡 해야지?”
“제가 노래 못하는 거 알면서 노래시키는 것은 가혹행위입니다.”
“상신아, 너 음악 점수 양 실력을 여기 여자들은 모르니까 낭만에 대하여 한번 해봐?”
“여기 식사 마치고 2차로 노래방 가면 거기서 하겠습니다.” 내 소개가 끝나자 총무 박해성이 건배 제의했다.
“다들 잔을 들어주십시오. 오늘 이 자리는 정말 오랜만에 많은 동기가 모였습니다. 이 집 정규석 사장이 오래도록 잘하던 식당이 정부가 개 식용 금지법을 만들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 흑석 보신탕은 문을 닫아도 정 사장 앞날에 새로운 사업 잘하도록 건배를 합시다. 정 사장 새 사업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소리가 흑석보신탕 천정을 울렸다. 우리가 위하여! 크게 하니 건너편 방에서도 위하여! 하였다. 돌아가면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옆에 정규석 옆 곽희진이 오늘 처음 보는데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하면서 다른 친구의 건배사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곽희진 어디서 봤을까? 생각을 더듬었다. 그런데 희진이가 나에게 물었다.
“저기 한상신 너 혹시 고1 때 버스를 111 타야 하는데 211을 잘못 타고 한강 다리 건너서 어떤 여학생과 택시 타고 오지 않았어?”
“응, 너였구나, 그날 택시 기본요금 600원인데 흑석고 정문 앞에 오니 840원이라서 그냥 천 원 한 장을 네 가방 위에 올려놓았는데.”
“지각해서 혼났지?”
“혼났다. 수학 김경빈 선생 시간인데, 들어가니 왜 늦었냐고 하면 그냥 늦잠 잤다고 할걸, 순진하게 버스 211을 잘못 타서 한강 건너 오산고 가는 첫 정류장서 하차해서 택시 타고 왔다고 하니, 혼자?라는 물음에 예. 해야 했는데, 어떤 여학생과 타고 왔어요. 하니 여학생 이름과 연락처 받았냐고 해서 아니요 했다가 이런 바보 멍청이가 있나? 어떻게 한강 다리가 얼마나 긴데 그걸 택시로 오면서 여학생 이름과 전화번호도 모르고 왔냐고 앞으로 어디 가서 최경조 제자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응, 너구나, 궁금했는데.”
1977년 3월 중학을 졸업하고 청룡대학교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요즘은 교통카드로 환승도 카드만 찍으면 되지, 그 시절은 학생 회수권 10월을 버스 갈아탈 때마다 내야 했다. 그 회수권 한 장 아끼려고 용마중학교 야구장 좌익수 끝부분 담장 아래 집에서 대방 전철역까지 걸어서 갔다. 거기서 111 버스를 타고 흑석동 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늦어서 가방을 들고뛰었다. 버스 11만 보고 탔다. 노량진에서 효사정으로 갈 버스가 한강을 넘는 것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내리게 자리 좀 바꿉시다. 외치면서 버스 안내양 있는 곳에서 저기요, 버스 111을 타야 하는데 211을 잘못 탔는데 회수권 한 장 돌려줄 수 있나요? 했더니 말로는 안 돼요? 하면서 눈을 찡긋했다. 한 장을 내 손에 주었다. 안내양이 천사로 보였다. 옆에 호떡 모자 흑석 여고 학생이 양 볼이 빨갛게 저도요 했다. 안내양은 나에게 주고 그녀에게 안 주면 말썽이 될 거 같아 역시 슬며시 손에 회수권 한 장을 주었다.
한강을 건너 오산고 방향으로 회전하는 첫 번째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귓불이 빨간 여학생이 우리 택시를 타고 가요? 했다. 내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본요금 600원 시절 청룡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 오니 840원이 나왔다. 회수권 10장 값을 그녀 책가방 위에 올려주고 내렸다. 헐레벌떡 뛰어 1학년 3반 교실에 갔다. 수학 최경조 선생님이 열강 중인데 앞문을 열고 죄송합니다. 했다.
“왜 늦었어?” 물음에 그냥 늦잠 잤어요. 할 것을 버스 111타야 하는데 211타고 한강 건너에서 택시를 타고 왔어요. 혼자? 예. 하면 간단한 것을 바보처럼 저 위 여학교 학생과 같이 타고 왔어요.
“이름은?”
“몰라요?”
“야, 너 바보 아니야? 한강 다리가 얼마나 길고 10분이면 수원 비행장서 폭격기가 이륙해 평양에 폭탄을 투하할 시간인데, 여학생 이름, 전화번호 정도는 알아야 기본 예의지 그 여학생이 널 얼마나 바보 멍청이라고 평생 원망하며 살겠니?” 하셨다. 손바닥 내밀어? 손바닥 10대 맞을래? 그 여학생 다음 수학 시간까지 알아 올래? 그냥 10대 맞겠습니다. 여학교 앞에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공통수학 정석 한 문제 더 풀어야지요? 했다. 그 말에 손바닥을 플라스틱 자로 대리는 것을 생략하고 들어가! 하셨다. 그러니 수학 공부를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해 중간고사에 최 선생님이 1번부터 24번은 객관식 25번은 주관식으로 출제했는데 600명 중에 주관식을 풀이와 답을 감정 없이 완벽한 답을 쓴 사람은 나 혼자였다. 별명이 수학 1/600이었다.
송년회를 마치고 2차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노래방을 예약했다. 다들 노래방으로 갔고, 나는 정규석 사장이 남으라고 해서 남았다. 정규석이 말했다. 너 오늘 곽희진 만나 놀랐지? 응. 희진이는 육사 나온 장교와 결혼했는데, 아들 하나 태어난 상태서 남편이 전방 수색 정찰하다가 북에서 떠내려온 목함지뢰에 순직했다. 연금이 나오기는 하지만 중위 때 사망해 대위로 추서 된 상태의 연금이라 서울서 아들 공부시키려면 학원비를 감당 못 해 내가 식당 하면서 주방보조로 채용했다고 했다.
처음 왔을 때는 고무다리에 사기 접시와 쇠그릇을 함께 들고 가다 떨어뜨려 고가의 사기 접시를 다 깨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보통 음식점 사장 같았으면 그릇값을 변상하거나 해고했을 텐데, 20년을 데리고 지냈다고 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흑석 보신탕을 폐업하는데, 자기는 폐업 신고하고 실업급여로 버티다 다시 아이템 찾아서 창업할 것이지만 희진이가 걱정이라고 했다. 모두 노래방으로 이동하고 흑석 보신탕 사장 정규석, 그의 아내, 주방장, 희진, 나 다섯이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장과 규석 아내는 퇴근하고 셋은 노래방으로 이동했다.
노래방은 신직수, 박해성이 단골로 이용하는 <유정 노래방>이었다. 20명 들어가는 대형 방이다. 나는 정말 음치였다. 어느 정도 음치냐 하면 시골 강림초등학교 5학년 때 합창대회가 있었다. 5학년 때의 일이다. 58명 중에서 50명 합창단원을 뽑는 데 떨어진 8명 중 1인이었다. 떨어진 8명 중에 4분의 4박자, 4분의 3박자를 지휘봉으로 젓는 것으로 지휘자 1명을 뽑았다. 여기서도 떨어졌다. 우리 7명은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7형제가 되어 교문을 나왔다.
마을 입구에서 아주머니들이 합창 연습 안 하고 오느냐고 물었다. 앙큼하게 예, 우리 7명은 1차에 합격했고 51명은 계속 연습 중이라고 앙큼한 거짓말을 했다.
노래방에서 직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해성은 <비 내리는 영동교>, 규석은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다. 남학생들은 고교 시절 음악 점수 수, 우, 미, 양, 가할 때 양이라는 것을 알기에 생각해서 들었다. 흑석 여고 출신들은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었다. 음정 박자 다 틀려도 끝까지 완창 했다. 가사에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를 첫사랑 희진이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로 개사하여 불렀다.
여학생들이 희진 이을 내가 노래를 부르는 옆으로 끌고 와서 마이크 하나를 주고 둘이 듀엣으로 부르게 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를 첫사랑 상신이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로 불렀다. 두 시간 동안 노래 못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순서가 되면 한 곡 입력하고 부르라는 통에 <하숙생>, <돌아가는 삼각지>, <가는 세월>을 불렀다. 100점 맞은 친구들이 스크린에 부착한 만원 지폐가 12장이나 되었다. 총무 해성이가 떼었다. 친구들 일부는 3차를 가고 나와 몇 명은 집으로 향했다.
희진이가 물었다.
“집이 어디야?”
“개봉동? ”
“개봉동 어디쯤인데?”
“응, 진로아파트에서 공군부대 가는 중간 빌라야.”
“그러면 내가 고척동 돔 야구장 근처거든, 너 진로 아파트에 내려주고 고척으로 넘어갈게, 내차 털랴?”
. 희진 차는 모닝이었다. 차가 작아 불편해도 참아? 군대서 지프차를 21년 탄 사람이다. 아무리 불편해도 지프보다 승차감 좋다. 하긴 그래. 고척 스카이 돔 근처에서 흑석 보신탕으로 이 모닝 몰면서 일했는데, 이제 벼룩시장이나 알바천국을 뒤져야 한다고 했다.
“장교, 대위 미망인인데 연금 먹고살 만큼 나오지 않니?”
“군대 생활을 21년 3개월 했다면서 연금 얼마나 나와?”
“응, 260만 원.”
“260으로 서울서 살기 쉬워? 아니지? 너는 계급이 소령이니 그 정도지 내 남편 (고) 석동연 대위는 말이 대위지 중위로 사망해 1계급 추서된 대위라서 연금 산정이 마지막 봉급 기준이라 얼마 안 돼.”했다.
서울서 학원 보내고, 태권도 도장 보내고, 그 비싼 대학등록금 내느라고 등허리가 휘었다. 그래도 정규석 사장이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고 그릇이나 깨 먹는 여자를 잘 참고 써준 것이 엄청 고맙다고 했다. 네가 오는 놀란 것처럼 나도 20년 전에 첫 동기회 모임에 나가서 놀랐다. 흑석동 <안동장>에서 모였는데, 남자, 여자 앉아서 부부 동반인데 나만 미망인이라 혼자 온 줄 알고 총무 주인연을 불러 따졌다. 부부 동반이라고 말했으면 안 나오거나 인력사무소에 일당 주고 남자 하나 데려왔을 거라고 하니 인연은
“야, 저놈들 남편 아니야. 흑석고 출신이야!” 했다. 앞으로 부부 동반 모임을 함으로 그 옛날 김경미 수학 선생님이 지각한 내 볼을 잡아당기듯 당겼다. 모닝은 개웅산 아래 진로아파트 옆 빌라에 나를 내려주고 고척동으로 갔다. 밤에 자려고 누우니 천장에 희진 얼굴이 어른거렸다.
검정 교복에 흰색 카라가 눈부셨던 1977년 3월 어느 날 달리는 택시에서 옆자리서 본 그녀 빨간 볼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내 가슴이 쿵쿵 울리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속으로 지각 하루 하면 어때, 어차피 지각인 거 택시야 천천히 달리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내 속도 모르고 택시 기사는 전속력으로 한강 다리 건너 효사정 돌아 84번 회차지 흑석 고등학교 정문에 나를 내리게 했다. 우리가 졸업하고 얼마 후에 흑석 고등학교를 헐어버리고 의과대학 부속병원과 장례식장을 크게 지었다. 그 시절 우리는 남녀 칠 세 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었지만 강남으로 이사 간 학교 후배들은 지남철(男女十六歲指南鐵)이 되었다.
바로 옆 역사 100년을 자랑하는 S 여고 학생들도 부러워한다. 옛날 학설은 남녀 공학이면 학생들 성적이 떨어진다고 했다. 후배들이 남녀 공학으로 이전하여 선배인 우리 기수보다 공부도 잘하고 축구도 잘했다. 그런데도 강남 일부 극성 학부모들이 축구부를 없애자고 학부모들끼리 서명을 받아 교장 선생에게 제출했다. 난감한 교장 이복현 선생님은 신직수, 박해성, 정규석 3명을 교장실로 불렀다. 학부모들이 축구부 없애자는 서명받은 용지 300장을 보여주었다.
“선배로서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됩니다. 우리 흑석동 시절에는 축구부, 테니스부, 조정부, 밴드부, 산악부 등이 있어서 학교가 지덕체 전인교육을 했는데, 강남으로 왔다고 테니스, 조정, 밴드, 산악 다 없애고 축구 하나 남았는데, 그것마저 없애면 부고 총동문회 살아가는 인생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공자님 시대는 축구가 없어서 공자가 인생삼락을 말을 했지만, 공자가 재림하여 요즘에 나타난다면 축구를 포함하여 인생사락(人 生四樂)이라고 할 것입니다.”
“80 선배가 주축이 되어 축구부 유지하게 총동문회 차원에서 학부모를 설득해 봐? 교장은 모른 척한다.”
그렇게 교장실에서 나온 3명은 흑석동에 중국집 <안동장> 옆에 있는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총동문회 사무실로 갔다.
총동문회 회장인 권영범 선배와 국회의원 서청원을 만났다. 선배님, 저희 80 세 명이 도곡동 학교 교장 선생님 뵙고 왔는데요, 학부모들이 축구부 없애라고 난리입니다. 서명받은 용지가 300장입니다. 총 동문회장님이 축구 국가대표 출신 조영증 선배와 청소년 대표했던 김석원에게 전화했다. 학교 축구부 없애라는 학부모 연대 서명을 교장실에 제출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됩니다. 순식간에 역대 축구선수 전원에게 연락이 갔고, 일정을 잡아 안동장에서 탕수육에 연태 고량주를 마시면서 마라톤 회의했다. 축구부 없애자는 학부모들 주장에 중대부고 총동문회 입장문을 작성했다. 들어가야 할 문구만 나열해서 육군 소령인 나에게 입장문을 작성하라고 했다.
이유는 왕년에 1979년, 1980년 흑석동 노량진 일대 유신반대 데모 유인물 초안을 내가 쓴 것을 선배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 수필이 아니고 학부모들 기를 죽여버릴 강력한 문구는 데모 유인물 잘 쓴 상신이가 최고야, 하면서 시킨 것이다. 당시 나는 열쇠부대 철책 우측연대 정보 과장이었다. 축구사랑 김용언 단장과 신직수, 박해성, 정규석이 왔다. 대광 보신탕에서 수육과 전골을 냄비로 받아와 정보과장 관사에서 보신탕 전골로 소주를 마셨다. 소주는 충성마트에서 면세로 가져왔다.
축구부를 없애라는 학부모 주장에 대한 총동문회 입장
흑석동 학교가 강남으로 이사를 해서 치열한 대학입학 경쟁에 인접 학교와 비교하여 축구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떨어진다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 강남과 송파까지 각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 통계를 봐도 하등의 문제가 없는데, 학부모들의 과잉 관심, 과잉 반응에 대한 총동문회 결의안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1. 축구 경기에 재학생 응원을 금한다. 축구 경기가 서울에서 열리거나 울산에서 열리거나 제주에서 열려도 총동문회서 응원 가고, 재학생 운동장 접근을 금한다.
2. 축구부 운영에 들어가는 경비는 일체 총동문회와 축구부 OB 모임에서 한다.
3. 재학생 축구부 부모들도 일체 학교 방문을 금한다. 이유는 부유한 집 아들은 출전을 많이 하고, 가난한 집 아들은 벤치만 지킨다는 세상의 속설을 우리 학교 축구부는 일체 용납 안 한다. 이상의 우리 결의에도 학부모회에서 계속 축구부 폐지를 주장할 시는 총동문회 차원에서 법원의 판결을 시도할 것이다.
2025년 1월 3일
청룡대학교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총 동문회장 권영범
사무총장 박해성
축구사랑회장 김용언, 국회의원 서상원, 강원도 정무부시장 함석헌, 치과의사 강성규, 고려대 교수 윤승호, 예비역 소장 전충식, 예비역 대장 정채선, 대한축구협회 이사 오 충성, 대한축구협회 심판 배철수, 대한항공 기장 김진호, (전) 국가대표 조영중, 80 졸업생 축구선수 안경진, (동) 김태권, (동) 김영철, 두연 철강 대표이사 강두연, 삼희실업 대표이사 이상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김희현, 주석무역 대표이사 이 주석, 한의사 김선호, 창신 스튜디오 대표 김창석, 인연 공방 대표이사 주인현,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위원장 조홍연, 명 대기획 대표이사 노명래, 재미 한인협회장 김영섭(이하생략) 이상 3,727명.
효과는 만점이었다. 재학생 운동장 동원이 없다고 못 박고, 선수 학부모 학교 출입도 금지했다. 요즘은 전국 축구선수 3학년이 가장 가고 싶은 학교 1위가 되었다. 이유는 전국 어디를 가도 운동장에 총동문회 선배들이 나와 응원하는 것이 부러웠다. 1979년 12월 12일 서울역에서 흑석동까지 걸어왔다. 그날은 영문도 몰랐는데, 세월이 흘러 12.12 군사 반란이라는 것을 알았다. 걸어온 후유증으로 발에 물집이 잡혔고, 삭신이 쑤셔 며칠 공부를 못했다. 1980 대학시험 본고사에서 낙방하고 재수했다. 1981년 설날에 흑석동 선생님께 세배를 갔다. 수학 김경빈 선생님은 댁이 면목동이라 다음날 가기로 전화하고 흑석동 선생님에게만 세배했다. 미친개 별명인 조태이 선생님 세배를 마치고 안동장 골목 맨 끝에서 두 번째 김태원 선생댁에 갔다. 문패가 김태원이 아니고 오대영이었다. 일단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예, 여기 흑석동 졸업생인데요, 김태원 선생님에게 세배하러 왔습니다. 아, 김 선생님은 강남구 논현동으로 이사 가셨어요? 혹시 주소 아시나요? 정확한 것은 모르겠고요, 논현동 232번지 3인지 8인지 그러니 3부터 8까지 다 뒤져보세요. 찰칵 인터폰을 내렸다. 우리 일행은 논현동에 가서 3부터 8까지 초인종을 다 누르고 8에서 선생님을 만나 세배했다. 떡국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그간 이야기를 들었다. 1980년에 정의 사회 구현이라고 흑석동 입구에 커다란 입간판이 설치되었다. 파출소별로 삼청교육대 입소 인원이 할당되었다. 선생님은 정의 사회 구현 학교 선생님 궐기 대회에 불참했다. 그 사유로 삼청교육대 입소했다가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퇴소했다.
학교에서는 해직 처리되었고, 노량진과 서울역 두 곳 학원 국어 강사가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 안부를 물었다. 신직수는 육군 부사관 학교에 갈 것이라고 했고, 박해성은 해군 부사관 학교에 간다고 했다. 한 군은 하고 물으시길래, 저는 재수로도 대학에 덜어져 할아버지가 3수 하라고 횡성한우 3마리 팔아서 농협 통장으로 입금해 주셨다고 했다. 선생님은 재산이 많은가 봐 한 군 조부께서? 예. 원주 동신운수가 강림까지 운행하는데, 한재석 옹 땅을 밟지 않고는 버스 운행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고 했다. 선생님은 3수는 꼭 명문대를 고집하지도 말고, 한 군이 이과반을 졸업했다고 꼭 의대나 공대 고집하지도 말게나 하셨다. 선생이라고 살아보니 행복은 말이야 학생 시절 성적순도 군대 가서 군번 순도 아닐세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때 논현동에서 세배 후에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논현동 세배하고 3수에서 전기 대학을 모 의과대학에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소 4마리를 팔아 농협 통장에 넣어주시고 4수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정권을 차지하고 군대 입대 나이를 콱! 줄여버렸다. 3 수중에 신체검사를 받고 1982년 논산 28 연대로 예비통지서를 받았기에 4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장손을 데리고 미아리고개로 갔다. 요즘도 미아리고개에 만신이 많이 있지만 1982년 1월은 더 많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 만신 집 어느 집에 사람이 많이 드나드나 내려 보더니 한 곳을 데리고 들어가셨다. 요즘도 복채 5만 원이면 큰돈인데 할아버지는 그 시절에 만 원짜리 5장을 봉투에 담아 들어가자마자 만신에게 주면서 하소연했다. 우리 집 장손인데, 이번 후기 대학에 떨어지면 남녀 십육 세면 너다. 만신은 장손 이리 오라고 하더니 오방색 기를 둘둘 말고 하나를 뽑으라고 했다. 방울을 한참 흔들더니 사는 곳에서 남으로 멀리 가되, 바다는 안 된다고 했다. 학과는 한문을 많이 사용하는 학과를 가야 한다고 했다. 흑석동에서 할아버지와 나는 지도를 펴고 바다는 제외라 부산, 인천, 여수 등은 빼고 남쪽 바다 없는 동네 무심천사범대학 역사 교육과, 국어교육과 2장 원서를 써서 원서 마감날까지 눈치를 보다가 역사교육과 경쟁이 높아져 국어교육과를 냈다. 웬걸 내가 낸 후에 원서가 몰려와 역사교육과보다 국어교육과가 경쟁이 높아졌다. 시험이라야 면접인 그날 아침에 할아버지가 이걸 꼭 몸에 지니고 면접을 보라고 했다. 부적이었다. 면접은 국어교육과 박명순, 이 경우, 양태순, 김진석, 김진기 교수들이 커다란 강의실 의자를 다 뒤로 물리고 질문했다. 한심하다는 듯이 아니 서울서 3수를 해서 여기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왔느냐? 더구나 고등학교는 이과 공부한 사람이 왜 문과로 지원했느냐? 질문했다. 교수님, 답변 길게 해도 됩니까? 얼마나 긴데? 제가 3수 할 수밖에 없는 인생 이야기라고 했다. 5분 동안 해보라고 했다. 다른 학생들은 2~3분 안에 끝나고 나갔는데, 5분이면 긴 시간을 주신 것이다. 12.12 군사 반란 때문에 인생 고인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잘 들었다고 하시면서 입학하게 되면 절대 데모는 하지 말라고 하셨다.
입학했다. 5공 시절 대학생 공통점이 교수가 강의하는 날 반 휴강이 반이다. 반반 치킨은 맛이나 좋지, 수업반 휴강 반은 대학등록금을 50% 할인도 안 했다. 수업을 못 한 교수는 중간고사 대신 책을 지정해 주고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했다. 리포트가 학점 기준이 되었다. 리포트를 다 작성하고 나면 도서관 유리창 너머 무심천 강변을 바라보며 글을 썼다. 소설 수준도 못 되는 글이지만 안 쓰고는 먹먹한 가슴을 달랠 수 없었다.
동기회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부고> 알려드립니다. 청룡 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80 동기생 박해성이 금일 10시에 영면에 들었습니다. 빈소는 흑석동 청룡 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장례식장 2호입니다. 동문 단체 조문은 내일 저녁 6시입니다. 내가 희진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단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나도 문자 받고 전화할 참이었는데 해성이 부고로 전화했지? 그래, 몇 시에 출발할까? 내가 너 픽업하러 개웅산 아래 네 집으로 몇 시에 갈까? 한 시간 걸리니까 5시에 만나자? 알았어. 그렇게 약속하고 낮잠을 자려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문상을 그냥 단체 조문으로 하지 말고 둘이 낮에 먼저 하자고 지금 온다고 했다. 나를 태운 모닝이 가다 서고를 반복하며 남부순환도로를 달려 노량진을 경유 흑석동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빈소에는 해성의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문상을 마치고 아내와 두 딸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나는 초면이지만 희진은 아내와 딸을 잘 아는 사이였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빈소를 나왔다. 주차장에서 모닝 조수석에 앉았다. 너 3수 해서 간 곳이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야? 응. 82학번? 응. 응이 뭐야 선배한테 나는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80학번이다. 정말? 그럼, 학과장 박명순 한문학 이경우, 고전문학 양태순, 시론 윤영천, 현대문학 김진기, 김진석, 민속학 차용주 등 교수님마다 특색 있고 명강의 교수였다. 앞으로 단둘이 만나면 선배로 모셔,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선배? 님이 빠졌다. 그렇게 농담을 하는 사이 경부고속도로 요금소를 통과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한 손은 핸들을 잡고 한 손은 내 손을 주물렀다. 어머, 너는 손에 남자가 여자 손보다 부드럽다. 장손이라 그래. 서울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왔는데, 시골 초등학교는 여름방학 숙제가 학교 퇴비장에 퇴비를 한단 베어 제출하면 학교 소사가 몇 학년 몇 반 누구인지 기록하고 제출 안 한 사람은 개학해서 담임에게 명단을 주면 개학 후라도 퇴비를 제출했다. 여동생들도 각자 퇴비를 직접 베어 제출했는데, 장손이라고 할아버지가 퇴비 숙제를 해주셨다. 그녀가 운전하면서 내 손을 만지는 감촉이 뭐라 표현할 수 없게 기분이 좋았다. 달리는 모닝에서 그녀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흑석동 청룡 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교 국문과가 떨어져서 재수한다고 하니 부모님이 너 혼자가 아니고 아래 동생들이 쭉 있는 상태서 재수하면 동생들도 떨어지면 다 재수를 시켜야 한다. 집안 형편이 재수를 시켜 대학에 보낼 정도가 안되니 후기 대학에 합격 못 하면 바로 어디 총무 사원이라도 취직을 하라고 했다. 후기대 원서를 어디 쓸까? 고민하다가 서울서 통학 가능한 무심천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합격했다. 합격했는데 대학 재단 분규가 일고, 문교부에서 관선이사 파견에 학장이 전두환 동기가 학장으로 왔다. 대학 3학년 때 학교 통학버스로 40명 여학생을 모집해 육군사관학교 생도 중에 축제 파트너가 없는 생도의 파트너 40명에 포함되었다. 여학생 40명과 생도 40명이 추첨으로 짝이 되었고, 밤늦게 축제를 마치고 통학버스로 무심천사범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때 파트너가 (고) 석동연 대위다. 축제 이후 석 생도가 주말이면 청주로 토요일에 내려왔고, 일요일에 복귀했다. 국어교육과 졸업하고 임용고시 한번 보지도 못하고 군인 석 중위 아내가 되었다. 사단 수색대대가 뭐 하는 곳인지 설명도 듣기 전에 석 중위는 비무장지대 순찰 중에 장마에 떠내려온 목함지뢰가 터져 현장에서 즉사했다. 졸지에 미망인이 되었고, 아버지가 사망한 두 달 후에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 교육을 위해 무조건 서울로 왔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아버지 없는 아들이라도 기죽지 않게 하려고 학용품은 매년 2월에 남대문 오메가 문구에 가서 가장 좋은 것으로 1년 쓸 분량을 한꺼번에 샀다. 그때 우연한 기회에 청룡 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동창회 결성을 알게 되었다. 후배들이 남녀 공학이 되어 선배들도 자기들 졸업기수 대신 2월 기준으로 졸업 연도로 남녀가 동기가 되었다. 부고 80이라는 기수로 남녀가 모였고, 사정을 알게 된 정규석 흑석 보신탕 사장이 희진을 주방보조로 채용했다. 처음은 학동사거리에서 순댓국집을 했다. 부지런한 정 사장과 주방장 정 사장 아내 손 씨가 좋아 엄청 돈을 벌었다. 일원동에 <흑석 보신탕>을 한 것은 7년 차였다. 6년 동안 엄청 많은 돈을 벌었으나 국회에서 ‘개 식용 금지법’을 만든 후 점점 매출이 줄고 폐업까지 했다. 그런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무심천 강변에 도착했다.
꽃 다리 옆 주차장에 주차했다. 계단을 이용해 무심천으로 내려갔다. 학생 시절 1980년 시절보다 물도 깨끗하고, 중간에 운동시설도 많이 있었다. 희진은 내 손을 잡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한상신, 선배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인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눈을 감는다. 실시!”
“실시!” 눈을 감자 그녀는 내 목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내 심장도 쿵! 쿵! 울렸다. 눈을 감으니 그 옛날 111 버스를 타야 할 것을 211을 잘못 타고 한강 건너에서 택시를 타고 올 때 빨갈 볼의 그녀가 떠올랐다. 나는 그녀 허리를 당겼다. 희진의 혀가 내 입 깊숙이 들어왔다. 한 3분 정도 지났을 때, 이제, 그만하시지요? 했더니, 동작 그만! 그대로 멈춘다. 실시! 실시! 그녀는 상신이 너는 마지막 키스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는 40년을 키스에 목마른 여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