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 장군
오목 장군(五木將軍)
어머니 형제 2남 3녀 중에서 두 외삼촌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큰 이모와 막내이모만 원주에 산다. 요즘은 다들 아이를 많이 낳지 않아서 이모, 고모 호칭을 모르는 세상이다. 두 이모가 조카를 부르면 달려갔다. 특히 요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이모는 뭐 하냐? 물으시고는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올챙이국수에 감자전에 막걸리 먹고 싶지? 내려오너라 하신다. 원주 일산동 구시가지 낡은 단독주택이 막내이모 집이다. 큰 이모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두 이모는 나를 불러 어린 시절 쌀이 부족해 먹던 올챙이국수를 해주셨다. 올챙이국수는 옥수수 전분이 끈기가 없어 밀가루나 메밀처럼 가늘게 면을 뽑을 수 없어, 굵게 뽑아도 올챙이 크기로 끊어졌다. 모양이 올챙이를 닮아 ‘올챙이국수’가 되었다. 올챙이국수를 먹으면서 두 이모는 외갓집 가문 이야기를 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외할아버지는 전쟁이 나자마자 보급 근로대로 징발되었다. 군인들이 군장을 꾸리고 남는 물자는 보국 근로대가 지게로 져서 부대가 이동한 곳까지 나르는 일을 했다. 6.25 발발 때 큰 이모 찬옥은 17세, 찬열은 15세, 찬하 12세, 선옥 10세, 순옥 7세, 미옥 5세로 올망졸망한 자식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에 산다는 외할아버지의 형님 전인수 주소만 들고 피난길을 나섰다. 맏딸 찬옥은 광주리에 살림살이 그릇을 이고, 찬열은 지게에 이불을 지고 그 위에 순옥을 앉히고 지게 목을 잡게 했다. 찬하는 지게에 쌀, 보리, 옥수수 등 식량을 지고 막내딸 미옥을 그 위에 앉히고 이동했다. 둘째 딸 선옥은 나머지 지고 가지 못하는 것을 커다란 보자기에 싸고 머리에 이고 갔다.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휴게소 자리가 6.25 때 외갓집이었다.
외양간 소 한 마리는 외양간에 마른 옥수수 대궁을 먹이로 가득 넣어주고, 혹시 다 먹으로 자유롭게 나가서 뭐라도 먹을 수 있도록 밧줄을 풀어주고 피난을 갔다. 소도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소의 커다란 눈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간소를 피난을 가지 않은 이웃 할아버지가 집 앞을 지나가는데, 외양간에서 소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 보니 빈집에 홀로 울고 있어서 소를 데려갔다. 새끼를 배었던 소는 전쟁 중에도 송아지를 낳았다. 영동선 하행 횡성휴게소 자리가 외가가 6.25 시기에 살던 곳이다. 새말에서 안흥을 지나 주천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갔다. 가다가 힘들면 쉬고, 또 걷고를 반복하여 충청북도 괴산에 도착했다. 중간에 힘들다고 찬열이가 순옥이 여기 놓고 가면 안 돼요?라고 말하자, 얘야? 힘들어도 동생을 데리고 가야지 어떻게 길에 버리고 가겠느냐? 고 했다. 힘들게 괴산 전인수 집에 도착했다. 결혼식 때 한번 본 형님 댁에서 염치 불고하고 사랑방 한 칸에 여덟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다. 괴산에서 막내 미옥이 홍역을 앓다가 사망했다. 옥련은 쌀로 떡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이고 간 떡을 다 팔고 집에 오면 다시 쌀을 디딜방아로 빻고 떡을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전쟁 기간을 지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도 전쟁이 끝나자 무사히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소가 없었다. 전쟁 통에 누가 소를 훔쳐 갔다. 체념했다. 가을 들판이 누렇게 곡식이 익어갈 때, 산 너머 갈곡리 노인이 어미 소와 송아지를 끌고 왔다. 옥련은 죽은 줄 알았던 서를 보니 너무 반가웠고, 그 할아버지가 고마웠다. 옥련은 눈물을 흘리며 수없이 노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전범수가 나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인은 전쟁 통에 미군이 탄약을 지게로 운반해 달라고 해서 운반해 주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 집 앞을 지나는데, 소가 우는 소리가 들려 외양간을 보니, 소가 산기가 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네 집으로 소를 몰고 가서 먹이를 먹이고,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이제 전쟁도 끝나고 혹시나 해서 왔는데, 피난을 나갔던 인원들이 다시 온 것을 알고 소를 돌려주려고 왔다. 외할아버지는 노인에게
“어르신! 감사합니다. 송아지를 제가 받을 테니 어미 소는 어르신 그동안 보살핀 노고에 답례로 가져가시죠?” 했다.
어른은
“무슨 소리? 임자가 어미 소를 가져야지?”
“아닙니다. 저희는 소를 난리에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사를 확인하고 이웃 어른 덕분에 무사히 새끼도 낳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결국, 외할아버지는 송아지를 어미 소는 노인이 끌고 재를 넘어갔다. 요즘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뉴스가 나오는데, 6.25 시절은 모두가 가난했지만 이런 미담도 있었다. 세상이 물질은 풍부지만 인심은 사나운 세상이 되었다. 평창군 대화면 개수마을이 외할머니 아버지 임공삼이 태어나고 살던 곳이다. 1905년에 태어나서 1944년 12월 3일, 향년 39세로 생을 마쳤다. 공삼과 강릉 김 씨 부인 사이에 아들 대성과 딸 옥련이 있었다. 남매 나이 차가 8년이었다. 일부러 나이 터울을 띄우고자 노력한 것이 아니라 개수 마을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 7년 동안 옥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있었다. 그전에 1904년부터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있었다. 대한제국 이후 의병봉기가 1905년 원응팔의 의병봉기가 시초라는 것이 지금까지 학설이었다. 이보다 약 1년 앞선 1904년 7월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 의병봉기가 있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1904년 의병봉기에 가담한 평창군 임공삼도 가담했다. 독립운동 가문의 후손은 가난하고, 친일파 후손은 등 따듯하고 배부르게 살고 있다. 요즘은 외아들, 외동딸이 많아 이모 호칭을 아는 이도 드물지만 2남 3녀의 가운데 딸이 어머니였던 나는 여름방학, 겨울방학이면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 큰 이모, 외삼촌 두 분 집을 오가면 방학이 다 지나 개학 임박해 집으로 왔다. 밀린 방학 숙제와 일기를 벼락치기로 제출했다. 구하기도 힘든 올챙이국수가 주식이어도 배부르기만 하면 행복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더 재미있었다.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기는 이종사촌 형들이 개울가나 논두렁으로 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다리를 껍질을 벗겨 구워주었다. 그 맛은 요즘 잘 팔리는 참맛 치킨보다 더 맛있었다. 밤이면 초가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참새를 잡아 구워주기도 했다. 참새 잡이는 정말 재미있었다. 불빛을 지붕 처마 밑으로 비치면 뽀얀 참새 배가 보였다. 불빛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있는 참새를 형은 손을 넣어 참새를 움켜쥐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 60 중반에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을 수 없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후 두 분 이모만 남은 나에게 어른이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으로 공삼이 일본 경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대화면 개수 마을로 돌아왔다. 그 후 강릉 김 씨 아내와 사이에 딸 옥련이 태어났다. 딸은 외모가 아버지를 닮았다. 자신을 닮은 옥련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1907년 7월 31일 일본이 만든 군대해산 조칙을 순종에게 재가를 받았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훈련원에 모이게 하고 무장 해제했다. 일제의 군대해산에 대한제국 군인들은 분개했다. 민긍호가 중심이 된 강원 의병들이 8월 5일 원주에서 봉기했다. 공삼도 평창에서 원주까지 와서 민긍호 대장 군대에 합류했다. 30여 명의 의병이 사냥총을 들고 합류했다. 사냥총으로 멧돼지를 잡으면 사냥총이고 일본군을 잡으면 의병 무기가 되었다. 원주 의병은 민긍호를 중심으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과 농민,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부대는 원주, 평창, 강릉, 진부, 멀리는 제천, 충주, 장호원, 홍천지역으로 봉기가 번졌다. 의병들은 그 지역을 잘 아는 지형의 이점을 이용했다. 은밀하게 접근해 일본군을 타격하고 신출귀몰하게 달아났다. 일본이 작성한 <조선 폭도 토 벌지>를 번역해 인용한 <조선 독립운동 제1권> 에도 등재되었다.
‘민긍호는 큰 부대의 수괴가 되었다. 여러 개의 소집단으로 분할하고, 소집단의 대장을 지명했다. 30 명 정도 무리가 제천, 충주, 영월, 죽산, 장호원, 충주, 홍천, 춘천 등 지역에서 신출귀몰하여 황군을 괴롭혔다. 특히 무기고를 약탈했다.
<조선 폭도 토 벌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6 일자 <지방 소식>에 보면 민긍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유격전이 잘 보도되었다.
1907년 11월 23일 대화에 진을 친 일본군을 습격해 심대한 타격을 주고 신출귀몰하게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그는 1919년 3월에 평창 개수 마을에서 만세운동 주동자로 잡혀 서대문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강릉 김 씨는 그 시절 여자지만 한문과 한글을 쓸 줄 알았다. 편지를 한자로 서대문 형무소 조선인 임공삼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서대문 형무소 간수가 편지를 그에게 주지는 않고, 감방 앞에서 편지를 읽어주었다. 눈물을 펑펑 쏟고 소리 내어 울면서 편지 낭독을 들었다. 형기를 마치고 1926년 8월에 풀려났다. 평창 개수 마을로 돌아왔다. 지아비 없이 김 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대성을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여덟 살 대성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큰절을 했다.
아들에게 한글과 천자문을 가르쳤다. 천자문을 익히자 소학으로 넘어갔다. 1927년 딸이 태어났다. 아들을 원했으나 딸이 태어났다. 구슬옥(玉)에 연꽃 련(蓮), ‘옥련’으로 지었다. 딸 얼굴이 공삼을 쏙 빼닮았다. 논밭에 나갈 때도 평창읍내 장에 갈 때도 옥련을 목말 태우고 다녔다. 대성은 20세에 강릉 최 씨 여자와 혼인했다. 첫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창식(昌植)’이라 지었다. 그 시대는 남자들이 첩을 얻는 것이 묵인되었다. 첩을 곡산 연 씨를 얻었다. 첩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다. ‘연식(延植)’으로 지었다. 창식과 연식은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였다. 옥련도 나이가 차서 18세에 20세 남자 전범수와 결혼했다. 그는 강릉 사천 사람이었다. 임옥련 사이에는 2남 4녀가 태어났다. 큰딸 전찬옥, 큰아들 전찬열, 작은아들 전찬하, 둘째 딸 전선옥, 셋째 딸 전순옥, 막내딸 전미옥이었다.
그는 1944년 12월 3일에 돌아가셨다. 많은 항일 의병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 후손은 부자로 살듯이 이 땅은 불공정이 가득한 나라다. 임공삼은 키가 6척 장신이었다. 요새 젊은 운동선수는 2 미터 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시절은 6척 장신은 드물었다. 키가 큰 것도 소문이지만 힘도 셌고, 몸도 날렵했다. 시골 돌담은 맨손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잡으러 온 일본 경찰이 서너 명이 있어도 순식간에 오른발로 한번, 왼발로 한번 차면 일본 경찰이 고꾸라졌다. 멱살을 잡고 길바닥에 개구리 패대기치듯 집어던졌다. 소문은 한 사람 건널 대마다 눈덩이처럼 커졌다. 공삼이 4명의 일본 경찰을 처치한 것을 개수 마을에서 대화 읍내로 가면 열 명을 패대기쳤다고 말이 퍼졌다.
집에 이불이 바깥은 붉은 천, 속은 흰 천으로 위와 아래를 바늘로 꿰매고, 가운데는 두툼한 솜이 들어간 이불을 홍의장군 곽재우가 붉은 천을 뜯어 옷으로 입고 왜적을 물리쳤다. 조선 민족은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가 이 땅에 왜적이 쳐들어오면 일반인이 이불의 붉은 천을 뜯어서 어깨에 두르고 의병으로 출동했다. 어깨에 붉은 천을 두른 것은 의병이고, 그 천이 없는 자들은 왜적이거나 군관이었다. 피아 식별 띠가 붉은 천이었다. 그러니 의병과 관군이 대적하거나, 의병과 왜적이 대적하면 일단 피아식별부터 의병이 빨랐다. 개별전투의 승패는 ‘피아 구분’이 우선이다. 소문도 빨리 퍼졌다. 의병들은 자기 집 이불 붉은 천을 뜯어서 어깨에 두르고 나타났다. 1918년 9월 17일 자 대한매일신보 지방소식란을 보면 강원도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 의병 수백 명이 원주, 평창, 강릉 일대의 경찰지서를 불 지르고 무기를 탈취했다고 보도되었다. 김성삼 등이 경의선 철도를 폭파하기도 했다. 의병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8월 16일 원주 진위대장 홍유형이 상경했다. 특무정교 민긍호는 진위대 병사를 이끌고 각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의병들에게 일본군 무기고를 털어 1,000여 점의 소총과 4만 발의 실탄으로 무장시켰다. 이들은 군청, 경찰서, 우편취급소,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고 원주, 횡성을 장악했다. 화가 난 일본군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의병들도 이인영이 전국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13도 창의진을 구성해 서울진공작전을 호소했다. 1도 창의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관서의병대장 방인관, 만경 의병대장 정봉준, 영남의병대장 신돌석, 황해 의병대장 권중희, 호남의병대장 문태서, 호서의병대장 이강년이다. 뜻은 거창했으나 서울진공작전은 교묘한 일본의 방해전술로 실패했다.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휘하의 공삼도 3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원주를 경유 개수 마을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거사 소식이 개수마을에도 3일 후에 퍼졌다. 서너 명의 의병이 산 넘고 개울 건너 공삼 집으로 모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흰 광목을 구하고, 파랑, 빨강, 검은색 물감을 구해왔다. 서투른 솜씨지만 태극기를 그렸다. 평창 장날에 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누군가 선창 하면 뒤따르는 사람들이 후창을 했다. 그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지도자 33명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지만 그 긴 문장을 시골 사람들은 전문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 긴 선언서보다 ‘대한 독립 만세’ 여섯 글자가 모든 것을 표현했다. 인민들 어깨띠 흰 천에 대한 독립 만세라는 글씨를 썼다.
1919년 6월 5일 공삼은 일본 경찰에 잡혔다. 1926년 8월 16일 석방되어 개수 마을로 돌아왔다. 서대문 역사공원 근처의 유관순 열사 동상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으나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마지막 유언)
그렇다. 1919년에서 1945년 광복이 되기 전까지 조선 땅에 많은 열사들의 심정은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었다. 조선에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우리들도 뭉치지만 왜 놈 잡기 쉬울 건가
원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건 가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윤희순 안사람 의병가 중에서)
일본 총독은 3.1 운동을 보고 놀랐다. 간담이 서늘했다. 조선 인민이 이렇게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문’ 낭독만 하고 밥만 먹고 헤어진 민족 대표 33인은 겁날 것이 없었다. 무서운 일은 농민, 노동자, 보부상, 백정, 갖바치 같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총동원해서 진압하려 해도 병력을 어디로 집중할 수 없게 전국이 산발적으로 일어나 속수무책이었다.
‘대한 독립 만세!’ 여섯 자를 외치는 것이 태화관에 모여 유식한 한자어를 써가면서 길게 작성한 ‘독립선언서’보다 훨씬 파괴력이 컸다. 전국에서 200만 명이 만세운동에 나섰다고 일본이 비밀로 만든 ‘조선 비적 토 벌지’에 기술했다.
3.1 만세운동이 태풍처럼 조선 땅을 쓸고 간 후에 조선 총독과 경찰, 군인 상층부가 모여 회의를 하고 만든 정책이 이른바 ‘문화정치’라고 변명했다. 이름이 문화정치라고 조선의 문화를 존중해서 문화를 보존하는 정치가 아니었다. 이른바 민족 지도자 33인을 포함하여 전국 시도에 좀 배운 사람,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을 회유 협박해서 일본에 협조자로 만들고 그들에게 약간의 특혜를 주었다.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 소설가 이광수, 시인 최남선, 천도교 최인과 이종린들을 접촉하고 약간의 금전으로 매수했다. 그때부터 나온 것이 ‘민족개조론’이다. 조선 민족은 더러운 존재니까 선진 일본 황족을 따라 배워 우리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족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 이들 민족 지도자들의 주장이었다. 지도자급은 이렇게 변절했으나, 개수 마을 ‘임공삼’은 그런 시류에 영합하는 일 없이 의병 활동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역사 기록이나 각종 행사에 민족 대표 33인이 공을 독차지했다. 조선총독부가 지도층을 공략한 문화정치의 후유증은 오늘도 친일파 후손에 국회의원 몇 선을 하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역대 참모총장 90%가 친일파 거나 일본군,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공삼은 1944년 12월 3일 돌아가셨다. 1년만 더 살았다면 1945년 8월 15일 눈물의 광복을 보았을 것을 한만은 39년 일생을 1944년 12월 3일생을 마쳤다. 일본인이 저술 <조선 폭도 토 벌지>라는 것에서 ‘임공삼(林空森)’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 강원도 평창군 개수 마을에 임공삼(林空森)이라는 자가 있다. 키가 크고, 힘도 세고, 칼도 잘 쓰고, 총도 백발백중의 실력자다. 사람들이 신출귀몰한 그에게 현상금 3원을 걸었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임공삼을 보고도 신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 이모는 조카가 대학도 나왔으니, 수고스럽지만 독립기념관에 가서 자료조사를 해서 외할아버지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달라고 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작성 양식을 출력했다. 내 이름으로 하면 임공삼과 촌수가 너무 멀어서 전찬옥, 순옥 두 이모의 이름으로 가족관계 증명서를 첨부하고, 독립유공자 심사 신청했다. 조선폭도토벌지에 임공삼 이야기가 나온 것은 죄다 복사했다. 그가 일제 30년 식 보기병총(步騎兵銃)으로 일본군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모든 자료를 수집해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청인을 전찬옥, 순옥 이모의 주민등록 번호와 가족관계 증명서를 jpg파일로 만들어 첨부했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국가보훈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제출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6개월 정도 지나니 국가보훈처가 공삼에 대한 국가유공자 선정이 승인되었다는 통지문을 받았다. 2024년 8월 16일 평창군 개수 마음에서 1944년 12월 3일 사망한 공삼에게 국가독립유공자 승인 소식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중학 시절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 중에 예의 없는 사람을 ‘이 축 글도 모르는 놈’, 또는 ‘천자문도 모르는 놈’이라고 하는 것을 들어서 축 글이라는 것이 엄청난 고난도의 글인 줄 알았다. 대학에서 민속학 개론을 수강했다. 교수가 첫 시간에 가르쳐준 것이 축문이었다. 그에게 민속학을 배웠다는 제자가 어디 가서 동네 시제나 고사에 축문을 낭독하면 그 축을 이해하고, 혹시라도 축문을 부탁하면 사양하지 말고 당당하게 축문을 써주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 유세차(維歲次) 甲辰年 八月十六日 林公森의 손녀 全燦玉, 順玉은 삼가 할아버지께 일제 강점기 행적을 찾아 국가보훈처로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갑진년(甲辰年)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기에 이에 알려드리옵니다. 이승에서의 한 많은 기억은 잊으시고 천상에서 자상스러운 독립유공자임을 기뻐하소서.라고 썼다. 신기한 일이었다. 축문을 작성하고 개웅산 아래 집필실에서 잠시 졸았다. 그 짧은 졸음에 꿈을 꾸었다. 꿈에‘오목장군 임 삼(林森)’이 나타났다. 좋아하는 지평막걸리를 소가 끌고 가는 우마에 한가득 실렸다. 개웅산 정상의 우마 길을 따라 내려오더니 집 앞에 멈췄다. 꿈에 개수 마을 집 앞 소나무에서 북으로 10 미터 지점에 커다란 항아리에 소총 4정을 묻었다는 말을 육 척 장신이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잠에서 깼다. 책상에서 축 글을 쓰다가 막걸리 한잔 마시고, 또 써야지 하면서 막걸리 한잔을 마셨다. 뚜껑을 닫지 않은 지평막걸리와 한잔 마시고 빈 잔인 누런 찌그러진 막걸리 잔에 파리들이 둘레를 기어가고 있었다. 참 묘하지, 꿈에 우마에 잔뜩 실린 지평막걸리는 무슨 의미이고, 개수 마을 소나무로부터 북으로 10 미터 지점 땅속에 묻은 소총 4자루는 무엇일까? 꿈에 나타난 오목은 임 씨 후손들이 못하는 일을 딸 옥련의 외손자가 하니 기특해서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다. 막내 이모에게 전화했다. 꿈 이야기를 했다. 개수 마을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앞 소나무에서 북으로 10 미터 지점에 총 4정이 함께 묻혀있다니 파봐야겠어요. 평창군과 평창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소형 포클레인을 준비해 주세요라고 했다. 막내 이모가 큰 이모에게 연락하고, 두 이모부를 동원해서 개수 마을 소나무에서 북쪽 10미터 지점을 팠다. 평창군청 국가보훈업무담당자, 평창경찰서 정과 형사, 두 이모와 이모부 입회하에 땅을 팠다. 커다란 항아리가 나왔다. 항아리를 꺼내자 그 속에 30식 기보병 총 4정이 있었다. 한 정에는 ‘五木將軍 林森’이라고 칼로 새긴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칼로 새긴 상태에서 불로 지져서 새겼기에 세월이 지나도 손상됨 없이 잘 보였다. 강원일보가 특종 보도를 했고, 서울의 5대 일간지와 KBS, MBC, SBS, JTBC, MBN 등이 인용 보도했다.
조용하게 이모 두 분과 조카가 조촐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보고식을 계획했으나 졸지에 평창군수와 경찰서장, 교육감, 국회의원까지 참석하는 큰 행사가 되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온 천지 ‘오목장군 임삼 기보병총’ 발견 뉴스가 나가자 임대성의 아들 임창식, 임연식이 찾아왔다. 창식의 아들 임중묵도 찾아왔다. 이들은 임공삼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으니 이모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보상금이나 받은 줄로 알고 얼마를 받았는지 자신들에게도 나누어달라고 했다.
그 말에 내가 화가 났다. 야, 니들 조상 임창식, 임연식, 임병철 조상이지 전찬옥, 순옥 조상이야? 니들이 정신 차리고 40년 전에 독립유공자 신청했으면 얼마간의 금전적 보상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그 보상 기간 이외의 국가유공자 신청으로 국가독립유공자로 승인된 것으로 감사하게 여겨야지 무슨 돈타령이냐? 고 호통을 쳤다.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 소중함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 고향 의병에 대한 구전으로 이야기를 알고 있는 노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향토 의병 이야기를 보존해야 하는데, 의병 후손들은 배움도 없고, 사는 것도 어렵게 살고 국가보훈부에서 이런 것을 수집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남북통일도 1950년 6.25를 어린 시절에 경험한 사람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통일이 소중하지 그런 사람들 다 돌아가시고 나면 통일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통일에 대한 감격도 별로 없을 것이다. 개수 마을 소나무 근처를 파고 발견한 소총 4정과 항아리는 강원특별자치도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개수 마을 소나무 일대와 집과 800여 평을 매입했다. ‘임공삼 의병공원’으로 공원을 조성했다.
이모는 행패를 부린 임중묵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고 했다. 어린 시절 친일파 후손들은 평창에서 원주로, 춘천으로, 강릉으로 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에 합격하면 대학을 보냈다. 임중묵은 할아버지가 의병장을 했지만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돈 벌러 남의 청과 상회 심부름, 자장면 배달, 구두닦이 등 청춘 시절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자동차 정비를 잘했으나 공부를 한 것이 없어서 자격증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평생을 무자격증으로 정비를 하다 보니 월급은 늘 최저시급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평창군수와 끈이 있는 건설사가 수의계약으로 수주를 따냈고, 공사 대금을 부풀려 이익을 챙기고 이익의 일부를 자치단체장으로 바로 보내는 것이 아닌 한 다리 건너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는 소양강 처녀 뱃사공 동상을 만들 때, 원주에 민긍호 의병대장 동상을 만들 때, 횡성에 3.1 공원을 만들 때 모두 그랬다. 그 일이 어디 강원도 뿐이겠는가 서울은 서울시장 바뀔 때마다 공사업체가 바뀌고 이명박이 서울시장일 때, 청계천 공사, 이명박 대통령 때 4대 강 공사 수조 원의 공사, 공사비 중 상당 금액이 이명박 한 다리 건너에 전해졌다. 그 정도면 고위직을 지냈으면 연금만으로도 편히 살 텐데 그런 리베이트를 받는 것을 보면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
임공삼이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하였고, 후손인 임대성, 임창식, 임연식, 임중묵은 힘겹게 살았다. 대성은 한량이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도박으로 야금야금 탕진했다. 더 있으면 집안이 다 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임공삼은 옥련을 일찍 시집을 보냈다. 20세가 되던 해 전범수와 결혼시켰다. 전범수는 강릉 사천면 병산이 집이었다. 병산에서는 나름 부유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전범수와 임옥련은 결혼을 하고 지금 영동고속도로 하행선 횡성휴게소 건물 자리가 신혼집이었다. 1944년 12월 3일 공삼이 사망했다. 젊은 시절 서대문 형무소에서 7년 수감되어 온갖 고문의 후유증인지 알 수 없으나 육 척 장신에 신출귀몰했던 그도 맥없이 사망했다. 산소는 평창군 대화면 개수 마을 산 113번지에 모셨다. 누런 종이에 붓으로 쓴 ‘오목 일기’를 옥련에게 전해주었다. 그 일기를 막내 이모에게 주었다. 막내 이모 전순옥은 20년 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모는 자신이 시인이기에 물려받은 ‘오목 일기’를 기초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 줄 못 썼다. 고 한다.
가뭄이 든 가을 들판에서
-전순옥-
논밭 일 잘하시는
아버지 안 계시고
말 잘 듣는 누렁이 황소 없는데도
들판엔 황금 벼이삭 가득가득하구나
기계로 농사짓는 좋은 세상 되어서
바둑판들을 보며 해님도 미소 짓네
농부의 노래 가락이 그리운
이 가을
어머니 살아생전 하셨던 이야기
양수기 이름도 못 들어본 시절
천수답 논을 비를 기다리다
바닥은 다 갈라지고 못자리 모내기도
못하고 그런 논에
가을을 맞이하여
벼에 알이 두 세알씩 매달린 것을
어머니는 수수깡 집게로
낱알들을 훑으니
새해 볍씨 종자만큼 나왔다
그해 경칩날 개구리는
울 힘도 없이 봄이 갔겠지
산비둘기는 그 봄에
비 오기를 기도하다
목이 쉬었겠지
그해 겨울 어머니는
5남매 자식을
무엇으로 배를 채워주었을까
그 겨울 어머니 눈물
이제야 보이는 구나
이 시 한 편에 6.25 전쟁 후 힘겹게 살아온 이야기가 다 담겼다. 일기에 개수 마을 소나무 근처에 소총을 묻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일기 한 대목이다. 강원도 관찰사 황철은 일본에 부역한 놈이다. 의병들을 식사 대접을 한다고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밥을 배부르게 먹었는데 하는 말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조선에 도움이 안 되고 일본의 화만 나게 만들어 조선 인민이 점점 도탄에 빠진다. 돌아가면 더 이상 의병짓을 하지 말고 농사를 짓거나 농사일이 싫어 꼭 군인을 하고 싶으면 일본군에 귀순하라고 했다.
임공삼과 함께 황 철과 식사 자리에 참석했던 민긍호는 일기에 글을 남겼다.
― 어제 황제의 전위(傳位)가 황제의 뜻에서 한 일인가? 군부(君父)는 협박을 받아 지위를 잃고 동포는 재앙을 입어 어육이 되었으며, 국토는 일본에 복속되었는데, 인민이 감히 죽기를 아낄 수 있으랴. 이것이 우리가 의병을 일으켜 결사보국(決死報國)하는 까닭이다. 어찌 군사를 일으킬 명목이 없다고 하는가? 지금 촌락이 불타버리고 백성이 흩어진 것은 다 무도한 일인들의 행위다.
막내 이모에게 받은 누런 공책 속에서 ‘오목 일기’를 발견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소 후에도 일거수일투족을 일본 경찰이 감시하고 있어서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개수 마을 돌담을 훌쩍 뛰어넘어 다녔다. 임공삼을 호위하는 김홍기, 조필원, 지승룡은 늘 지근거리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일본 경찰이 다가오면 3 명 중 한 명이 고의적으로 시비를 걸고 시간을 벌면 임공삼과 2명이 달아났다. 은밀하게 주민들이 돈을 모아준 것으로 일제 기보식 소총을 구입했다. 사람들이 임공삼의 이름에 공(空)을 없는 것으로 해석해서 임삼(林森)으로 나무 목(木)이 5개라고 ‘오목장군’으로 불렀다. 발굴된 소총에 ‘五木將軍林森’이라고 소총에 새겼다. 1944년 12월 3일 한 달 전에 김홍기, 조필원, 지승룡 등 3명의 친한 의병동지들의 총을 함께 묻었다. 평창군 대화면 개수 마을 일대가 ‘임공삼 의병기념공원’으로 조선되었다. 사람들은 정식 명칭 ‘임공삼의 병공원’이 있음에도 ‘오목(五木) 공원’으로 불렀다. 2024년 12월 2일 원주로 내려갔다. 낮에는 평창 임공삼 의병기념공원에서 ‘임공삼 의병장 서거 80주년 기념행사’에 두 이모와 참석했다. 막내 이모 집에서 올챙이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오늘 행사한 내용을 정리해서 지역신문 ‘횡성일보’에 사진과 기사를 막내 이모 전순옥 이름으로 송고했다.
에이전트 오렌지
(Agent Orange)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는 박형수가 중사로 맹호부대 기갑연대 7중대 포 반장으로 참전했을 때 처음 봤다. 밀림에 우거진 활엽수를 제거하기 위해 고엽제를 살포했다. 200리터 드럼통 상단에 노랑 띠가 둘러있었고, 미군들은 에이전트 오렌지를 줄여 에이오(AO)라고 불렀다. 그 시절은 그냥 낙엽을 제거하면 베트콩이 숲 속에 은신처가 사라져 좋다고만 생각했다.
예비역 박 상사 쌍둥이 손녀가 TV 스포츠 뉴스에 보도되었다. 국기원 주체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에 박예빈, 박다빈 쌍둥이 자매가 결승에 올랐다. 박 상사는 채널을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스포츠 소식만 봤다. 예빈이 다빈이 태권도 겨루기 모습이 몇 초 지나간 것이 몇 분 이상 되는 잔상이 남고 흐뭇했다. 눈물이 났다. 스포츠 뉴스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결승전에서 만난 쌍둥이를 엄마 아빠는 누구를 응원할 것인지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박 상사는 화가 났다. 미친놈이지 뉴스를 보도하려면 최소한 예빈이 다빈이 집을 방문해 사실 확인을 하고 보도해야지 어린 자매에게 아비도 어미도 없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운 것을 모르니까 저렇게 보도했다. 박형수의 아들 박영준은 십 년 전에 배순선과 결혼했다.
결혼하여 서울 대방동에서 전세살이로 신혼생활을 하면서 쌍둥이 딸 예빈과 다빈을 낳았다. 딸이라 이름을 나무 목면의 심을 ‘식(植)’으로 하려고 하니 일식(一植), 이식(二植), 도식(道植), 지식(智植), 예식(禮植) 별의별 이름을 지어도 흡족한 것이 없었다. 옥편을 뒤적이면서 여자 이름으로 부르기 좋은 이름을 족보 무시하고 지었다. 언니는 예빈(藝斌), 동생은 다빈(茶斌)으로 지었다. 쌍둥이 손녀가 두 돌이 지나고 3세 때 영수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몸속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 물에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는 것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부검하고 유서 판독도 했다. 참으로 끔찍한 내용이었다. 아버지 박형수 상사가 월남전 참전했고, 고엽제에 오염된 것을 모르고 결혼했다. 그 시절은 고엽제에 대한 의학 보고도 별로 없었다. 소문으로 기형아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아들은 멀쩡했다. 결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고엽제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니 내 병은 이 나라 어느 병원에 가서도 처방도 모르고 치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유서였다. 국가에서는 유서를 공개하면 나라에 파장이 너무 클 것을 우려 유족에게 돌려주기만 하고 유족도 일절 발설하지 말 것을 서약서를 받았다. 더구나 아들이 도박하는 줄 몰랐는데, 도박으로 진 빚이 5억이나 되었다. 그러니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영수가 도박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프 배팅을 하거나 다이(Die)를 외쳐야 할 순간에 몸에 가려운 증세가 나타나거나 눈이 경련을 일으켜 도박에서 더 많은 실패를 한 것이라고 유서에 담겨있었다. 투 페어(Two Pair)가 쓰리 오브 카인드(Three of Kind)로 보여 풀하우스(Full House)를 노리고 하프 배팅 하고 나면 아투 페어(A Two Pair)였다. 그러니 스트레이트나 플러시에게 늘 최종에서 잡혔다.
이런 유서를 언론에 발표하면 국가 망신이라고 쉬쉬했다. 그것이 30년 전 이야기다. 박 중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1965년 10월 20일 지금은 호찌민으로 불리는 사이공에 도착했다. 1진으로 간 전우들 대부분이 2진이 도착한 배를 타고 귀국했으나 횡성군 촌구석에 내 땅 한 평 없이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에게 여기서 고생해서 번 돈으로 논 10 마지기라도 사드리려고 연장 복무했다. 월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면 강림에서 논 10마지기는 샀을 것이다. 그런 돈을 아버지는 받아서 도박으로 날렸다.
보내준 전투수당을 도박으로 날린 것도 분했지만 박 상사를 더 열받게 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 파병 전우에게 1인당 전투수당을 500달러를 미국이 한국으로 보낸 것을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50달러만 지급했다. 현역 상사로 근무 시는 몰랐는데, 원사 진급을 포기하고 상사로 전역하니 미국 국회청문회에서 박동선과 김형욱이 증언을 하고 프레이저 보고서인가 만든 하원 의원이 상세하게 미국 국방성 기밀해제 시기에 맞게 모든 것을 보고서에 넣었다.
주월 한국군 초대 사령과 채명신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지급 전투수당을 장병에게 나누어주라고 건의한 것을 박정희가 묵살하자 자신이 죽으면 파월 일반병사 묘역에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을 한 것이 소문으로 돌던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서 떠날 때는 중사로 떠났는데 무공을 세워 현지서 상사로 특진했다. 맹호부대가 마지막으로 철수하고 참전군인에 대한 재분류되었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이라 원주 1군 사령부 예하 부대를 신청했다. 군대 백도 없고 뇌물을 안 써서인지 멀고 면 남쪽 경상북도 2군 사령부 예한 영덕, 강구, 안강 해안부대로 전출되었다. 특이한 것은 강원도는 깻잎으로 절임 깻잎을 해 먹는데 여기는 콩잎을 절임으로 했다. 처음은 콩잎을 누가 먹어했으나 옆집 아주머니가 멀리 강원도서 이사 왔다고 절임 콩잎을 경상도 특별 반찬이라고 한 접시 주어 딱 한 장만 먹어야지 하고 먹었는데, 어라 중독성이 있어 또 한 장, 또 한 장 하다 보니 그걸로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문제는 박 상사보다 부사관학교 선임들이 중사가 많았다. 노골적으로 경례를 해도 건성으로 손바닥이 보이게 경례했다. 세월이 흘러 연금 수령 나이도 지났고, 원사 진급 대상 20명 중에 19명이 다 부사관학교 선배였으나 대대장, 연대장이 월남전 참전 유공자 박 상사가 원사가 안 되면 누가 원사가 될 것이냐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바람에 선임들이 더 박 상사를 미워했다.
원사 진급을 포기하고 전역했다. 전역이 아니라 퇴역했다. 일반인은 전역과 퇴역을 국어사전 찾아보기 전에는 모른다. 전역은 전역 후 잠수함 강릉 무장 공비 사건이 나서 동원령이 선포되면 동원부사관으로 가는 것이 전역이고 퇴역은 동원령 할아버지가 선포되어도 동원 안 되는 것이 퇴역이다.
퇴직금을 연금 안 받는다고 일시금으로 받아 고향 횡성으로 갔다. 퇴직연금 일시금으로 소 10 마리 논 10마지기 밭 6,000평을 샀다. 땅 한 평 없이 평생을 소작농으로 살다 간 아버지 어머니가 불쌍했다. 월남전 전투수당 받은 것을 도박으로 다 날리지만 않았으면 강림에서 부자 소리 듣고 살 수 있는 것을 아버지는 월남전 전투수당을 다 도박으로 날렸다. 강림에서 강림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친 아들이 원에게 나가 치악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3 때 음대를 가고 싶다는 것을 말렸다. 촌에서 논 10마지기와 밭 6천 평 농사짓는 집 아들이 음악, 그것도 성악을 과외 한번 받은 적 없는 아들이 지원해 봐야 덜어진다고 말렸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 잘되는 경영, 경제학을 지원하라고 했다. 대학 졸업하고 서울 대림동에 있는 대림 탄소강에 취직했다. 대림 탄소강 옆 대동상사에 근무하던 여자 배순선과 눈이 맞아 연애했고 결혼을 했다. 음대 가려는 것을 말렸더니 직장 생활하고 바쁜 와중에도 대림동 교회 성가대에 들어갔다. 타고난 목청이 좋다고 성가대 지휘자가 환영했다. 회사생활과 교회 성가대로 바쁘게 지낸 아들이 쌍둥이 자매 손녀가 3세 때 한강에 투신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범생으로 학교 다녔고 직장에서도 맡은 일 잘하고, 가정에서 좋은 남편 쌍둥이 자매의 좋은 아빠였던 아들이 한강에 투신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얼마 후 며느리 배순선은 쌍둥이 자매를 나에게 맡기고 재가했다. 쌍둥이 자매는 전교생이 20명인 강림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교장 겸 저학년 담당 이종은 선생과 상급 학년을 담당하는 이미정 두 분 선생이 강림초등학교를 유지했다. 이미정 선생은 자신이 학생 시절 태권도를 잘한 기억을 더듬어 초등학교 태권도부를 만들어 가르쳤다.
이변이 생겼다. 국기원 주최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에 4강에 오른 박다빈, 박예빈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상대를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강림초등학교 쌍둥이 자매가 결승에 올랐다는 소식에 강림면 출신 재경향우회 최수남 회장이 내일 국기원에 강림초등학교 박예빈, 박다빈이 결승에 진출했다. 금, 은메달이 강림초등학교입니다. 강림향우회 회원 여러분 시간 되시면 10시 결승전 응원 바랍니다라고 단체 문자를 보냈다. 우리나라 친목 단체 중에서 결속이 가장 잘되는 곳 1위가 해병전우회 2위 고대교우회, 3위가 호남향우회라고 한다. 누가 그런 말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해병전우회보다 인원이 적을 뿐이지 단결력 높은 것이 재경 강림향우회다. 강림향우회를 처음 만든 것은 김두한을 필두로 종로에 내려오던 조직 깡패 계보 마지막이 낙화유수다. 낙화유수 아래 기수에 권성돈이라고 있다. 촌에서 이름에 돼지 돈을 쓰면 돈을 잘 번다는 속설로 성돈으로 지었다. 성돈이 낙화유수 아래 기수로 종로를 누볐다. 그 후 강림에서 몸이 날렵한 사람이 야금야금 올라왔다. 뭐 벌교에서 주먹 자랑 마라는 말이 있지만, 벌교 주먹이 강림에 오면 권성돈 때문에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쌍둥이 자매가 어린이 태권도 대회 금, 은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오자 강림초등학교 교문, 강림면사무소 현과 강림 노인정에 현수막이 붙었다. ‘경축, 강림의 딸 박예빈 박다빈 전국 어린이 태권도 대회 금, 은메달 획득’이라고 걸렸다. 춘천방송국에서 취재도 했다. 지도교사 이미정 선생에게 전교생 20명인 학교에서 전국대회 금, 은메달을 획득한 원인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비결은 없습니다. 배우는 학생 20명을 4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이 환생한 어린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지 모르는 첫사랑 남자가 태권도를 잘했다.
그 시절은 운동선수가 어른들에게는 힘들고 고생만 한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이 친구는 부모 몰래 태권도를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고3 때 바로 춘천교대 대학생이 되었는데, 3 수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갔어요. 그 친구 어록이 이 세상 교육의 기본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차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20명을 잃어버린 첫사랑 대하듯 가르쳤습니다. 아이들도 아직 첫사랑을 모르는 나이지만 나의 사랑에 보답한 것입니다. 기자는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무슨 뜬 구름 소리냐? 는 표정이었다.
강림초등학교는 쌍둥이 자매의 태권도 우승으로 전국에 소문이 났다. 이미정 교사가 태권도 지도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으로 알고 전국에서 태권도 유학을 왔다. 20 명이던 학교가 48명으로 전교생이 늘었다. 이미정 교사는 교장 선생님께 건의하여 횡성교육청에 젊은 선생 한 명을 보충해 달라고 했다. 처음은 태권도를 2개 반으로 나누어 가르치려고 했다. 아이들을 타 지역서 전학을 시킨 학부모들이 항의하면서 이미정 선생에게 자기 아이를 배우게 한다고 하면서 야외용 앰프와 무선 마이크를 학교에 기증했다. 하는 수 없이 운동장에 전교생 48명을 양팔간격으로 세우고 젊은 선생님은 태권도 부사범이 되어 학생들 줄 사이를 다니면서 자세 교정을 하고 단상 위에서 이미정 선생이 구령과 시범 동작을 보였다. 금메달, 은메달 쌍둥이 자매는 시범 조교가 되었다.
학생 수도 늘고 태권도 전국대회 메달리스트가 조교인 태권도반은 날로 발전했다. 쌍둥이 자매가 졸업하고 강림중학교 진학한 해는 전국태권도 대회에서 초등부와 중학생부 금, 은메달을 수확했다. 쌍둥이 자매는 강림중학교를 졸업하고 안흥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태권도부가 없었다. 박 상사도 쌍둥이가 손자라면 무리해서라도 계속 태권도를 가르쳤겠지만 손녀라 태권도를 포기하고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쌍둥이 자매는 원주에 있는 간호조무사 학원을 마치고 간호조무사가 되었다. 다빈은 대방동에 있는 내과의원에 예빈은 대림동에 있는 정형외과에 취직했다. 자매가 거주할 청년 주택을 신청했다. 탈락이었다. 탈락이유는 쌍둥이 자매를 3세에 버리고 재가한 배순선 재산세와 월간 납부 건강보험료가 80만 원이 넘는다고가 이유였다. 화가 났다. 청년 주택 심사하는 곳에 80 노구를 이끌고 찾아갔다. 별 효과는 없겠지만 베트남 전쟁 참전 유공 휘장과 무공훈장을 들고 갔다. 서울시 주거 안심 센터 한쪽 사무실에 청년 주택 부스가 있었다.
박예빈, 박다빈이 내 손녀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무공훈장도 받은 예비역 박형수 상사다. 예빈이 다빈이 아빠는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다. 엄마 배순선은 쌍둥이 자매가 3세에 재혼을 했다. 돈 많은 늙은이 후처가 되었고 늙은이 사후에 상속으로 엄청난 재산세와 건강보험료 80만 원 넘게 내지만 쌍둥이 자매가 초등학교 입학 때 가방 하나 공책 하나 사준 일이 없고 딸이 엄마라고 안 부르고 그년이라고 부른다. 그런 여자가 세금 많이 낸다고 청년주택 떨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청년 주택 심사담당자는 어르신 사정은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현행법과 시행령, 심사 규정 모두 그렇게 세부적인 것까지 확인은 아니고 법적으로 드러나는 세금과 건강보험료납입기준입니다. 상부에 이런 사례가 있다고 보고할 테니 오늘은 돌아가시라고 해서 돌아갔다. 주월 맹호부대 기갑 제2대대 7중대 중사 박형수는 포 반장이었다.
우리는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 군인이 되자. 우리는 월남인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따이 한이 되자. 우리는 우방 군에게 군기 엄정하고 신의 있는 코리안이 되자는 주월 한국군 신조를 나이 90에도 줄줄 외운다. 하지만 그 시절 신조를 외우는 것과 실제 행동에서 신조를 지키는 군인도 있었지만 아닌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신조를 지켰지만 어디 가나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는 있는 법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 중에서도 고가초소 바로 아래 월남 여자를 달러 몇 푼 주고 오입을 하는 일도 있었고, 현지처를 만드는 간부도 있었다. 심지어 현지에서 아이까지 낳고도 철수할 때 베트남에 두고 온 경우도 있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로 통일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했다. 베트남에는 미군과 한국군 현지처와 태어난 2세들이 고아가 되었다. 박 상사 군대 동기 박해임 상사는 90 나이에도 베트남 하이퐁 마라톤에 참가하고 완주메달 한 개를 여분으로 가져와 박 상사에게 주었다. 박해임은 마라톤을 마치고 맹호부대 격전지를 다녀왔다. 사진을 박 상사에게 보여주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맹호부대가 싸우던 전적지 주변이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쌍둥이 자매는 초등학교 때 어린이 태권도 대회에서 금, 은메달을 땄지만 촌에서 아비, 어미 없는 손녀를 태권도를 계속시키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간호조무사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기특했다.
억울하지만 쌍둥이 자매는 청년 주택을 포기하고 각자 저축으로 서울에서 원룸이라도 얻기 위해 월 70만 원씩 적금을 부었다. 고엽제가 자식에게도 영향이 미친다는 말은 들었지만, 박 상사가 원주보훈병원에 고엽제 후유증을 검사해 달라고 했으나 몸의 반점이 고엽제 후유증인지 강림에서 농사지은 농약의 후유증인지 인과관계를 특정 지을 수 없다는 의사 소견이었다. 박상사 후배 원삼영 중사는 고엽제로 판정되어 보훈병원에서 모든 것을 무상으로 치료받고 보훈연금도 월 400 만 원을 받았다. 물론 400 만 원 안 받고 고엽제 환자 아닌 것이 좋지만 박 상사처럼 퇴역한 군인에게 몸에 반점이 나는 상태라면 억울했다. 박 상사를 속상하게 한 것은 죽은 아들이 유서에 고엽제 후유증을 의심하는 내용을 썼다. 한 번도 아들에게 월남전에서 고엽제 살포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얼마나 괴로우면 그런 유서를 쓰고 자살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박 상사가 베트남 전에 참전해 받은 전투수당을 아버지는 강림에 논을 사라고 했더니 모두 도박으로 날렸다. 그것이 미워 박 상사는 화투도 포커도 안 배웠다. 반대로 박 상사 아들은 화투도 포커도 잘했다. 생물학적으로 한세대를 건너가는 유전이 있다. 쌍둥이 자매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도박을 싫어했다. 쌍둥이 자매의 할아버지는 사실 태어나기는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쌍둥이 형이 3세 때 홍역으로 죽었다. 쌍둥이도 한세대 건너 유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꿈을 꾸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맹호부대가 큰 승리로 기록된 작전ㅇ이었다. 헬기 수십대가 하늘을 날아갔다. 나중에 그것이 안케패스 작전이란 것을 알았다. 베트남 밀림 지역 무성한 잎들이 다 떨어졌다. 앙상한 나무가 마치 지리산 고사목(枯死木)처럼 변했다. 베트콩은 숨을 곳이 사라졌다. 급한 마음에 땅을 파고 참호를 만들었다. 참호전투는 1950년에 6.25 전쟁에서 단련된 맹호부대 전우 상당수는 참호 전투경험자라 베트콩은 대적 수준이 못 되었다.
그때는 미군이 밀림 나뭇잎을 없애주어 전투에 도움이 된다고 엄청 고맙게 생각했다. 월맹이 공산화로 통일하고 맹호부대가 철수했다. 철수한 이후 서서히 고엽제 환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단순 피부병으로 생각했다. 피부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약으로 아무는 듯하다가 다시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아무리 군사비밀이라고 해도 그렇지 혈맹, 동맹국이라고 하면서 미군은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하니 옥외활동을 금지하라고 하면서 한국군에는 알려주지 않고 살포했다. 맹호부대원은 그냥 무성한 수풀이 고사목으로 훤하게 보이니 베트콩 은신처가 없어지니 좋았다. 땅굴을 파고 참호전투에 돌입했다. 한국군은 3년 동안 6.25 전쟁으로 참호전투에 단련된 인원이 절반이고 베트콩은 간부들 이외 병사는 참호전투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 맹호부대와 베트콩의 참호전투는 헤비급과 플라이급의 권투 경기 수준이었다. 명수는 학생시절 수학과 음악을 잘했다. 박 상사는 수학과를 가라고 했는데, 음악 그것도 성악을 하고 싶다고 해서 돈도 없고 성악 개인교습 한 번도 안 한 네가 원서를 내봐야 떨어진다고 경영이나 경제학과 가라고 했다. 가고 싶은 성악과 신학과가 아니다 보니 대학 4년을 건성으로 다녔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눈이 맞은 여자 최영경과 연애를 했으나 그녀 부모가 가족 사항을 물어보고 사귀지 못하게 막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자재 도매하는 곳에 취직했다. 인접 회사 경리직원 배순선과 연애했고 결혼했다.
마의상법에 머리를 흔드는 여자는 남자의 앞길을 막는다는 말이 있지만 수천 년 전의 마의상법이 21세기는 안 맞을 것이라고 결혼을 시켰다. 아들이 성악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을 막았더니 결혼하고 교회 성가대 일을 직업과 가정 보살피는 것보다 더 열심히 했다. 설과 추석에 며느리가 오면 아내에게 하소연이 어떻게 남자가 가정일이나 회사 일보다 성가대에 목숨을 거냐고 하면 아내는 아비가 하고 싶은 것은 음대 성악과나 신학대에 가서 목사님 하고 싶었는데, 성악은 돈이 많이 들어 안되고 신학은 집안이 몇 대가 불교 집안인데 무슨 신학이냐고 막아서 반감으로 그런 것이니 좀 참으면 정상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구랬는데 쌍둥이 자매가 태어나고 3세 때 아들이 자살했다.
교회 성가대에서 합창 중에 솔로로 멋지게 고음을 부를 때는 테너 엄정행이나 신영조가 성가대에 합류했나 의심이 될 정도로 성가대에 지난 주일에도 노래 부르던 사람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어 대림동 교우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떠나자 며느리는 쌍둥이 딸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세요 하고는 재혼을 했다. 재혼해서 먹고살만하면 딸이 입학하면 책가방이나 학용품이라도 사 올 줄 알았는데 전혀 지우개 하나 사 온 적이 없었다.
맹호부대는 베트남 정부의 전투부대 파병 요청과 미국이 한국군에도 전투 수당을 지급한다는 것과 무기를 무한으로 공급해 준다는 약속받고 1965년 10월 22일 베트남 항구도시 퀘논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후손 마을에서 첫 전투에 승리했다. 이때 참전한 한국군 부사관과 장교 중에 6.25 참전경험이 있는 간부가 많았다. 특히 6.25에 북한군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다시 한국군에 편입해 싸웠던 박경석 중령은 북한군의 진지구축과 소부대 대부대 전술을 10 사단잔 전문섭을 따라다니면서 사단장이 지시한 사항을 기억하고 있어 월맹군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풍손 마을 전투에서 승리 후에 1966년 3월에는 고보이 지역에서 사단규모의 대부대 작전을 펼쳐 승리했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 역시 6.25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사령관이 직접 전투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휘하 여단장에게 지침을 정확히 하달했다. 특히 박경석 중령은 북한군 10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사단장 전문섭이 너무 어린 청년이 계급장은 소위라 가짜 소위로 알고 직접 사단장이 심문했다.
가짜 소위 아니냐? 는 장군의 질문에 박 소위는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똥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데 장군 계급 가짜니까 소위 계급장이 가짜로 보이는 것 아닙니까?라고 발칙한 답변을 했다. 전문섭 10 사단장은 허허 웃으면서, 해방군관 기백이 대단하구먼 하면서 자신의 전속부관 소위가 있음에도 박 소위를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 해방군관이라고 부르면서 은근히 북한군으로 전향을 유도했다. 박 중령은 육사 2기로 교육 중에 6.25가 발발하자 바로 소위로 임관되어 전선으로 나갔다. 전문섭 북한군 10 사단장을 따라다니면서 북한군 진지구축과 사단장이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는 것을 기억한 것이 중령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무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는 기초가 되었다. 이 시기 전두환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는데 귀국 후에 박 중령은 훈장이 여러 개이고 자신은 한 개뿐인 것에 불만이 컸다. 술만 마시면 노태우에게 박경석은 훈장이 치렁치렁하게 많은데 자기는 없다고 푸념했다. 박 상사 나이 90이 되어도 잊지 못할 작전은 안케패스 작전이다.
1972년 4월 1일부터 26일까지 맹호부대 기갑연대가 베트남 중부 교통요충지에서 19번 도로를 월맹군에게 제압당해 미군과 한국군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맹호부대는 638 고지 전투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도 했고 패배도 했다. 뉴스에는 승리한 전투만 보도했고 패전과 사상자는 숨기거나 숫자를 줄였다. 638 고지 전투도 공식 기록은 75명 전사 222명 부상이라고 대한뉴스에 나오지만, 박 상사 전우의 사망자는 173명이다. 이제라도 국가보훈처나 국방부는 기록을 사실대로 죽기 전에 바로 잡아주기 바랄 뿐이다. 기록뿐만 아니라 참전 전투수당 500달러를 주기로 했고 미국은 한국에 500달러로 지급한 것이 미 국방성 기밀 해제문서에 나오는데 50 달러만 지급한 차액을 스위스 은행에서 찾거나 비밀계좌라 본인 사망으로 찾을 수 없으면 박지만이나 박근혜라도 가서 찾아 지급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정부가 지급해야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 아닌가? 박 상사 나이 90이지만 술만 마시면 이놈의 나라 개판이라고 욕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200개 국가 중에서 상위 경제 대국 10위라면서 목숨 걸고 싸운 전투수당을 국가가 삥땅하고 60년이 넘도록 국가가 나몰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했다. 베트남은 말라리아모기와 거머리가 많았다. 소문은 미군이 모기와 거머리 퇴치를 위한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한다고 했다. 실제는 베트콩 은신처를 무성한 활엽수 잎으로 발견이 어렵다고 나뭇잎을 떨어뜨리려고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다.
살포하면 살포한다고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말로만 우방, 혈맹이지 아니었다. 고엽제를 포치 한다고 미리 알려만 주었어도 그 살포 시간에 옥외로 나가는 것만 막았어도 고엽제 환자는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박 상사도 그것이 고엽제인줄 모르고 물로 씻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귀국하고 바로 증세가 나타난 후배들은 보훈병원이나 수도통합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았다. 상사로 퇴역군인이 되어 고향 강림에서 농사를 짓는 중에 반점이 생기고 가려워 피부과에 갔으나 안흥 의원이 실력이 없어 그런가 하고 원주 기독교병원 피부과에 가봐도 소용이 없었다. 베트남전에서 처음 미군이 많이 당한 것이 부비트랩이었다.
대꼬챙이나 못을 이용한 부비추랩에 전투화 가죽울 뚫고 걸음을 걸을 수 없게 했다. 스파이크 그러그라고 고슴도치 침이 박힌 공이 공중에서 떨어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군이 사단급 이상 대부대 작전을 많이 했으나 베트남전에서는 밀림지역이 사단급 이상 대부대 작전이 어려웠다. 밀림으로 소부대작전에 베트콩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6.25 경험이 있는 한국군이 소부대전투에서 작은 승리 여러 개를 올리자 미군도 사기가 높아졌다.
미군은 깡통만 보면 발로 차는 고약한 습성이 있는데, 그 깡통 속에 수류탄을 안전핀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상태로 둔 것을 미군이 깡통을 발로 차면 깡통 속 수류탄이 터져 반경 5 미터 이내 미군 전우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런 사례를 채명신 장군이 사전에 정신교육을 해서 한국군 맹호부대원은 깡통을 보면 피해 갔다. 베트남 전쟁에 철의 삼각지 전투는 유명했다. 정글 속 교통호가 개미굴이나 거미줄처럼 형성되었다. 지상으로 이동하는 미군을 베트콩이 땅속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기습사격을 하고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6.25 전쟁에서 북한군이 황해도와 평안도에 이런 교통호를 구축한 것을 탈취해 본 경험 있는 맹호부대에게는 적수가 안되었다. 맹호부대는 개미굴 교통호 베트콩 진지를 한순간에 초토화했다. 화염방사기와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교통호 속으로 뿌리고 화공을 한 후에 진격했다. 이것이 와전되어 베트남전에서 양민학살 또는 마을을 통째로 불을 질렀다고 했다. 작전상 이런 화공에 희생된 민간인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그런 베트콩 속에 섞인 민간인까지 고려하면 작전 자체를 할 수 없다.
정글의 무성한 나뭇잎 제거를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제품에 다이옥신이 포함되었다. 요즘은 다이옥신이 발암물질이라고 제조 자체를 못 하게 하지만 그 시절은 그런 개념이 없었다. 다이옥신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2세, 심지어 3세까지 영향이 미친다는 것이 의학계 내부에서는 처음부터 알았지만 공개를 안 하다 최근에 공개했다.
다이옥신 후유증은 몸에 반점은 기본이고 기형아 출산, 불임까지 다양한 의학보고가 학술지에 연구논문으로 등재되었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의학논문 이야기가 일반 신문에 보고되는 것을 막았다. 국가가 어떤 것을 비밀로 지정하더라도 3년, 30년은 비밀로 할 수 있으나 영원한 비밀은 없다.
비밀이 해제되자 여기저기 의식 있는 잡지에서 에이전트 오렌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다. 미국과 한국 정부도 더 숨길 수 없어서 고엽제 환자,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에 대한 특별법을 국회서 만들었다. 전국 보훈병원에는 고엽제 환자가 모여들었다. 에이전트 오렌지 피해 군인들에 대한 전수 조사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작전명‘린치 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에서 처음 에이전트 오렌지가 사용되었다. 목적은 정글에 은신해서 찾기 어려운 베트콩을 발견하기 위해 나뭇잎을 제거했다. 효과 만점이었다.
헬기가 저고도로 비행하면서 살포한 에이전트 오렌지는 무성한 밀림을 환하게 보이는 고사목으로 만들었다. 지상에 은신이 어렵자 베트콩은 지하로 내려갔다. 호찌민 갱도라는 것을 팠다. 동서남북 종횡으로 연결된 거미줄 같은 호찌민 갱도는 갱도 내에 창고와 식수 보관 장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그런 교통호 전투에 익숙한 맹호부대는 순식간에 호찌민 갱도를 마비시켰다. 갱도 내에 대량의 드럼통에 담김 휘발유를 대보름 쥐불놀이 깡통처럼 구멍을 숭숭 내고 교통호 안으로 굴렸다. 이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갱도 안으로 던졌다.
갱도는 불길에 휩싸였다. 옷에 불이 붙은 베트콩이 갱도 밖으로 뛰어나오고 나오자마자 알아서 자수했다. 항복했다. 맹호부대가 처음 퀘논에 도착했을 때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겸 맹호부대 사단장 채명신 장군은 연병장에 군인들을 모아놓고 훈시했다. 제군들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공산주의자 침략에 자유 우방국가들이 대한민국을 도와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우리도 베트남 공산화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는 목숨 걸고 싸울 것이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당부할 것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희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사령관 훈시를 듣고 각자 중대별로 숙영지로 이동했다. 안케패스 작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고지는 탈환했지만, 중대원 150명이 전투 참가하여 최종 생존자는 29명이었다. 29명 패잔병은 7중대로 재배치되었다. 중대장은 내일 전투에 우리가 모두 전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했다.
말이 편지지 유언장을 쓰라는 소리였다. 나누어준 편지지에 <부모님 전 상서> 편지를 쓰고 이어 나누어준 비닐봉지에 손톱, 발톱, 머리카락도 비닐봉지에 담고 편지 봉투에 편지와 함께 넣었다. 소대장이 소대원의 편지를 모두 회수하여 중대 행정반에 제출했다. 나이 90인 지금도 그날 편지와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로 시작한 편지가 강림에 도착했다. 받아 본 아버지 어머니는 베트남에서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대성통곡했다. 귀국 후 강림에 와서 부모님을 만나자 아버지, 어머니는 박 상사를 안고 펑펑 울었다. 야 이놈아! 편지에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넣어 보내면 죽은 줄로 알지? 죄송합니다. 중대장 지시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자유월남이 패망하여 수백만 명이 숙청되고 백만 명이 넘는 보트피플이 떠돌아다녔다.
가슴이 짠했다. 세월이 몇십 년이 흘렀어도 맹호는 간다 노래 가사가 귓전에 맴돈다. 맹호는 간다.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 부대 맹호 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이하생략) 홍천에서 맹호부대 1 연대 기갑부대는 월남 정글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 더운 나라라 식수가 부족해도 살아남을 생존훈 련을 시켰다. 평소는 수통을 물을 가득 채워 훈련 출발했으나, 반만 채워 출동했고, 다음 주는 아예 수통에 물이 없이 출동했다. 이유는 갈증에 대한 참는 훈련을 한 것이다. 요즘 21세기 생각으로는 생수병을 보내주면 될 것 아니냐? 바보 아니야? 하겠지만 그 시절은 생수병도 없던 시절이다. 반대를 하던 야당에서 신민당 박순천 여사가 파병 지지를 했다. 1965년 10월 8일 홍천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춘천으로 이동했다. 도로변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격려했다.
춘천역에는 강원도지사, 춘천시장, 횡성, 원주 국회의원 이우현, 2군단 예하 장군들과 시간이 되는 대령들이 눈도장을 찍으려고 파월 맹호부대 환송했다. 경춘선 기차로 서울에 도착한 맹호부대는 여의도에 천막을 치고 숙영 했다. 10월 12일 현재 여의도 공원이 된 여의도 비행장에서 범국민 맹호부대 파월 환송회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3 부 요인, 외교사절, 정당 및 사회 단체장, 학생과 시민이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환송회를 했다. 강림 촌구석 부모님도 오셨다. 다시 살아서 부모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겉으로 표현은 못 하고 속으로 두려움이 천근만근이었다.
나이는 피 끓는 청춘이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맹호부대원을 실은 배는 베트남 퀴논 항에 도착했다. 예빈, 다빈이 베트남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무슨 베트남이냐고 물으니 우리나라 남자와 맞선도 보고, 연애도 했지만, 한국 남자는 TV에 나오는 아이유나 트와이스 같은 여자만 좋아하고 맹호의 딸 다빈이 예빈이는 신붓감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베트남 남자를 짝으로 정했다고 했다. 손녀가 박 상사 여권 발급을 대신해 주었다. 그 옛날 베트남전에 참전할 때는 배로 열흘 넘게 걸려 갔었는데 쌍둥이 손녀 결혼식 참석은 비행기로 3시간에 도착했다. 베트남전 참전 시기에도 길거리 오토바이 천지였는데 지금은 더 많아졌다. 붉은색 바탕에 노랑 왕별이 그려진 베트남 국기가 약간 눈에 거슬렸으나 공산화 통일이라지만 인민들 사는 모습은 대한민국이나 별 차이 없었다. 허망했다. 이렇게 될 거라면 구태여 미군이나 한국군이나 그렇게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있었나 회의가 들었다. 쌍둥이 손녀 합동결혼식을 마치고 혼자 베트남 여행을 했다. 맹호부대 대원으로 참전한 베트남 땅을 쌍둥이 손녀 결혼식을 하고 손주사위 2명이 베트남 남자라니 참 묘한 인연이라 생각했다. 맹호부대 상륙 지였던 다낭 항과 치열한 전투를 했던 19번 도로를 택시를 타고 달렸다.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로 앙상한 고사목이 된 밀림 지역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성한 밀림이 되었고, 시가지는 서울 못지않은 고층 빌딩과 호텔이 들어섰다. 1975년 4월 30일 민 장군은 대통령 취임 선서 이틀 만에 월남군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자유 월남공화국 마지막이고, 미군과 한국군은 배를 타고 고국으로 귀국했다.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눈이 침침했다. 몸이 가렵고 반점이 생겼다.
노구(老嫗) 마라톤
이학선, 박해임, 이심결은 노고소가 고향이다. 어린 시절 각림천에서 알몸으로 멱을 감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석 차기, 오징어놀이, 땅따먹기, 여자애들 고무줄놀이 고무줄 끊기 등을 할 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학선은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했다. 소년체전이 한창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지원할 때, 횡성군에 강림면 대표로 출전했다. 횡성군에서 1등 하고 춘천에 강원도 대표 선발전에 탈락했다. 심결은 아버지 어머니가 이북에서 내려와 친척 한 명 없이 어렵게 지냈다. 초등학교 학력이 최종학력이었다.
무작정 서울로 왔다. 구두닦이 찍새부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닦는 고수가 하는 것을 보고 집에 와서 연습했다. 푼돈이지만 모아서 고입 검정고시, 대입 검정고시 학원 다니고 마침내 합격했다.
해임은 노고소에서 어린 시절만 보냈다. 아버지가 화순으로 탄을 캐는 광부로 취직했다. 화순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 입국을 강조하는 시기라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태성정밀이라는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해주는 제도로 갔다. 가자마자 전남기계공고 선배가 밀링에 손이 끼어 절단되는 것을 목격했다. 방위산업체 근무를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대학시험 공부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어디서 재수할 거냐? 물음에 노량진 재수종합반에 등록해 공부하고, 숙식은 염치가 없지만, 독산 군인아파트에 신세 좀 지겠다고 했다. 해임 엄마는 독산동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 해임이 방위산업체 근무하면 군대 안 가도 되는 걸 포기하고, 꼭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데, 재수 1년만 오빠 좁은 군인아파트서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제가 한 달에 쌀 두 말씩 보내줄게요. 야, 무슨 쌀이냐? 해임이 학원비와 지 쓸 돈만 남 눈치 안 보고 지낼 수 있게 보내라고 했다.
해임 외삼촌 추대식 상사는 월남 백마부대 참전용사였다.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중령이 29 연대 대대장이었다. 월남전 참전은 백마부대로 했으나 철수 후 재배치된 것이 서울 근교 부대라 독산동 13평 낡은 아파트가 집이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외삼촌 내외, 4촌 2명에 해임까지 힘겹게 살았다. 그래도 재수 1년만 이 악물고 한다고 했다. 명문 전남기계공고 기계과 출신이지만 다시는 기계를 만지지 않겠다고 일어일문학으로 방향을 정했다. 서울 근처의 일어 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목표를 정하고 공부하니 스트레스도 덜했다. 명문 서울대, 고대, 연대, 서강대를 가면 좋겠지만 공고 3년 내내 국어, 영어, 수학은 대충 공부하고 오직 기계로 전국기능대회 나가세 금메달 따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는 1등, 금메달 아니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나라다. 해임은 고교 시절에 세상 민심에 대해 터득했다. 지금은 인천대가 국립대학교지 그 시절은 백선엽 백인엽 형제가 자기 이름 한 자씩을 따서 ‘선인학원 인천대학교’였다. 재단에 형제가 서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려고 이사를 자기 인맥으로 충원하다가 재단 분규가 일었다. 분규가 심해지자 문교부가 개입했다. 관선이사를 파견하고, 인천대학을 인천시립대학으로 했다가 다시 국립인천대학교로 만들었다.
백선엽, 인엽 후손은 억울하겠지만 학생과 졸업생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다. 노량진 재수종합반에서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인천대 일어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한 그는 합격통지서를 환순 탄광 광부 박광선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 자신은 국졸로 화순탄광 광부지만 아들이 대학생이라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바로 화순 탄광조합에 가서 등록금과 인천에서 반년 보낼 예상 생활비까지 대출받았다. 요즘 학생들은 대학교 합격만 하면 명문대든 아니든 구분 없이 국가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지만, 1980년대는 대학교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다.
상아탑(象牙塔)을 학문의 전당이라 부르는 것을 비틀어 촌에서 한 학기 등록을 위해 소 두 마리를 파고 8학기면 16마리에 하숙비, 책값까지 한다면 소 50마리를 팔아야 대학생 한 명으로 가르치던 시절이다. 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다니면서 ROTC를 했다. 인천 앞바다 송도에서 소대장을 하고 중위 진급하고는 용인 병참선 부대 참모 대위로 진급해서는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 아래 명파마을 이남 20km를 담당하는 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을 하는 동안 중대 행정병 병기를 담당하던 병사가 중대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중대장으로 면담을 제대로 했고, 관심병사로 관리하던 것이 인정되어 중대장 징계는 ‘불문’이 되었으나 더는 장교로 군대에 장기 근무할 의욕이 없었다. 전역했다. 그 시절은 6월 30일 전역하는 장교를 위한 취업박람회가 전국 5대 도시에서 열렸다. 은행, 증권사, 제약회사, 의류회사에 합격했다. 그의 선택이 남았다. 의류회사로 가기로 했다. 의류회사 5년 근무하고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하여 김밥천국 월곡점을 지하철역 월곡점 바로 옆에 냈다. 돈을 많이 번 정도가 아니라 긁었다. ROTC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전해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전단을 뿌렸다. 상가는 간판마다 전단을 뿌렸다. 마라톤 풀 코스는 한 번도 뛰지 않았지만 10km, 20km는 여러 번 달린 경험이 있기에 전단을 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전단 효과가 나는지 점심시간에 손님이 너무 많아 대기 번호를 나누어주었다. 24시간 영업으로 주방과 홀서빙, 계산원까지 3교대가 되도록 직원을 증원했다. 김밥천국 월곡점은 매출이 전국 김밥천국에서도 상위가 되었다. 박수받을 때 떠나라는 말은 연극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도 마찬가지다. 한창 잘 될 때 권리금 5천만 원을 올려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벌어놓은 9억과 권리금 5천만 원을 합하여 9억 5천만 원으로 스포츠용품 사업을 했다. 원래도 마라톤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업을 스포츠용품을 하다 보니 월곡 마라톤회, 성북마라톤회 양쪽에 다 가입했다. 한 주는 월곡 마라톤으로 한주는 성북마라톤으로 훈련했다. 해임이 넘겨준 김밥천국 월곡점에서 마라톤 주자들 점심을 했다. 마라톤 주자들이 김밥천국 월곡점에 데를 지어 들어가니, 그냥 지나가던 사람도 김밥천국 월곡점이 맛집에 푸짐한 집으로 생각하고 손님이 늘었다. 여기 점심시간은 번호표를 나누어주게 되었다. 마라톤 클럽은 월곡천과 성북동을 달리다 두 달에 한 번은 남산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남산 둘레길을 42.195km가 되도록 여러 번 돌았다. 남산을 돌 떼는 심결은 감회가 남달랐다. 무작정 상경해서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유식한 말로 3D (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 일을 했다. 어렵게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진학한 곳이 남산 S 대학교 연극영화과다. 현실 사는 것이 힘들지만 대본을 외우고 무대에 서는 순간은 행복했다. 내일 카드값 결제할 돈이 없어도 무대에 서는 순간은 내가 무대의 인물에 몰입해, 세상 근심 걱정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였다. 뛰는 순간은 앞 주자 등만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아스팔트였다. 그냥 무념무상으로 달린다. 어느 정도 달리면 그때부터 생각했다.
김환목은 이곳 남산 마라톤 클럽에서 초창기에 회장을 역임했다. 이제는 고문으로 물러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스턴,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마라톤을 6대 마라톤이라고 한다. 이곳은 누구나 뛰고 싶다고 배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의 완주기록을 제출해야 마라톤추진위원회에서 참가자를 정해주었다. 이제는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기록증을 내고도 무작위 추첨으로 했다. 그러다 이제는 인터넷 지원 선착순 마감을 시키다 보니 접수 한 시간이면 끝이 났다. 요즘은 2030 젊은이들이 마라톤에 호응이 늘다 보니 나이 60 이상은 세계 6대 마라톤에 뛰고 싶어도 접수를 못 해 달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한 목은 이미 5년 전에 6대 마라톤을 전부 달린 마라토너가 되었다. 아마추어 마라톤 동우회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 춘천 마라톤은 20회 서울 동아 마라톤은 15회 완주했다. 순천 남승룡 마라톤도 1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달렸다.
학선도 어려서부터 잘 달렸다. 전국 소년체전 강원도 선수를 뽑기 위해 100m, 400m 선수로 횡성군에서 1등을 했고, 춘천에 가서 강원도 각 군 대표 선수와 경쟁해 강원도 대표로 전국소년체육대회에 3번 출전했다. 강림에서는 달리기 하면 이학선이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했다. 이학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도 학선 어머니를 학선 어머니로 부르고, 그 집을 ‘학선네 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학선을 남산 마라톤 클럽에서 만났다. 객지에서는 고향 개만 봐도 반갑다는데, 고향 떠나 50년 만에 학선, 해임, 심결 세 명이 만났다. 마라톤 훈련을 마치고 공식적인 만찬을 하고, 3명은 자리를 이동했다. 치맥을 하러 강원 통닭으로 갔다. 다른 유명한 통닭도 있지만,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듯한 이름 강원이 좋았다. 반반 치킨과 생맥주 500을 들고 잔을 부딪쳤다. 고향 떠나 50년 만에 만난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학선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업고등학교를 마치고 공장 생활을 했다. 사장이 우리나라 최초 플라스틱 그릇을 만들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아들과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선이 얼마나 성실하고, 바르고 정직한 회사생활을 했는지 은퇴하면서 회사 대표를 학선에게 맡겼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회사 대표가 되었다. 최선을 다해 회사 경영에만 힘썼다. 회사 매출도 늘고, 직원도 늘자 기업공개를 했다. 기업이 상장되자 자본이 크게 늘었다. 학선은 건강이 나빠졌다. 나이 55세에 회사 대표에서 물러나 건강회복을 위해 종합검진을 받았다. 간암 초기라고 했다. 일체의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의사야 의사니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지 이미 술에 중독된 환자는 술을 줄이라고 해야지 끊으라고 하면 거짓말을 한다. 학선은 마라톤을 시작했다. 자신의 간암을 마라톤과 함께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마라톤 경험자의 마라톤 코칭 책을 기본으로 10km, 20km, 30km, 42.195km까지 달렸다. 해외 6대 마라톤은 한 번도 도전 안 했지만, 춘천 마라톤, 동아 마라톤, 순천마라톤, 대구 마라톤, 고구려 마라톤, 서울 챌린저 레이스, 울산 태화강 국제마라톤, 군산 새만금 국제마라톤, 제주 국제관광 마라톤, 경주 국제마라톤, JTBC 서울마라톤, MBN 서울마라톤까지 완주했다.
환목어 마라톤 입문하는 해임에게 기초적인 이야기를 했다.
“마라톤 풀코스(Full Course)는 42.195km라는 것은 알고 있지?”
“응.”
“그 절반이 하프코스(Half Course)라고 하는데, 21.0975km를 달리고 기록증을 주는 것이야, 이해되지?”
“응.”
“울트라 마라톤(Ultra Marathon)은 50km, 100km를 뛰는 것인데, 이것은 세계 6대 마라톤에서는 없는 종목이라고 했다. 페이스(Pace)는 일정한 거리를 달리는데, 소요된 시간이다. 예를 들어 10km를 한 시간에 달리고자 한다면 1km를 대략 6분에 달려야 한다. 마라톤 초보자를 위해 페이스메이커(Pace Maker)는 정식 마라톤 선수와 구분하기 위해 몸에 풍선을 달고 달린다. 풍선에는 완주 시간이 적혀있다. 앞으로 해임이 야금야금 훈련해서 풀코스를 달릴 때 내가 페이스메이커 해줄게.”
“고맙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100세 인생을 외치고 있다. 100세 인생 듣기는 좋은 말이지만 해임이 곰곰 생각해 봤다.
박해임은 노고소에서 어린 시절만 보냈다. 아버지가 화순으로 탄을 캐는 광부로 취직했다. 화순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 입국을 강조하는 시기라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태성정밀이라는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해주는 제도로 갔다. 가자마자 전남기계공고 선배가 밀링에 손이 끼어 절단되는 것을 목격했다. 방위산업체 근무를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대학시험 공부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다. 어디서 재수할 거냐? 물음에 노량진 재수종합반에 등록해 공부하고, 숙식은 염치가 없지만, 독산 군인아파트에 신세 좀 지겠다고 했다. 해임 엄마는 독산동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 해임이 방위산업체 근무하면 군대 안 가도 되는 걸 포기하고, 꼭 대학을 가겠다고 하는데, 재수 1년만 오빠 좁은 군인아파트서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제가 한 달에 쌀 두 말씩 보내줄게요. 야, 무슨 쌀이냐? 해임이 학원비와 지 쓸 돈만 남 눈치 안 보고 지낼 수 있게 보내라고 했다.
해임 외삼촌 추대식 상사는 월남 백마부대 참전용사였다. 나중에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중령이 29 연대 대대장이었다. 월남전 참전은 백마부대로 했으나 철수 후 재배치된 것이 서울 근교 부대라 독산동 13평 낡은 아파트가 집이었다. 좁은 아파트에서 외삼촌 내외, 4촌 2명에 해임까지 힘겹게 살았다. 그래도 재수 1년만 이 악물고 한다고 했다. 명문 전남기계공고 기계과 출신이지만 다시는 기계를 만지지 않겠다고 일어일문학으로 방향을 정했다. 서울 근처의 일어 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목표를 정하고 공부하니 스트레스도 덜했다. 명문 서울대, 고대, 연대, 서강대를 가면 좋겠지만 공고 3년 내내 국어, 영어, 수학은 대충 공부하고 오직 기계로 전국기능대회 나가세 금메달 따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는 1등, 금메달 아니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나라다. 해임은 고교 시절에 세상 민심에 대해 터득했다.
노량진종합반에서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인천대 일어일문학과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한 그는 합격통지서를 환순 탄광 광부 박광선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 자신은 국졸로 화순탄광 광부지만 아들이 대학생이라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바로 화순 탄광조합에 가서 등록금과 인천에서 반년 보낼 예상 생활비까지 대출받았다. 요즘 학생들은 대학교 합격만 하면 명문대든 아니든 구분 없이 국가 장학금이 신청되지만 1980년대는 대학교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했다. 상아탑(象牙塔)을 학문의 전당이라 부르는 것을 비틀어 촌에서 한 학기 등록을 위해 소 두 마리를 파고 8학기면 16마리에 하숙비, 책값까지 한다면 소 50마리를 팔아야 대학생 한 명으로 가르치던 시절이다. 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다니면서 ROTC를 했다. 인천 앞바다 송도에서 소대장을 하고 중위 진급하고는 용인 병참선 부대 참모 대위로 진급해서는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 아래 명파마을 이남 20km를 담당하는 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을 하는 동안 중대 행정병 병기를 담당하던 병사가 중대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중대장으로 면담을 제대로 했고, 관심병사로 관리하던 것이 인정되어 중대장 징계는 ‘불문’이 되었으나 더는 장교로 군대에 장기 근무할 의욕이 없었다. 전역했다. 그 시절은 6월 30일 전역하는 장교를 위한 취업박람회가 전국 5대 도시에서 열렸다. 은행, 증권사, 제약회사, 의류회사에 합격했다. 그의 선택이 남았다. 의류회사로 가기로 했다. 의류회사 5년 근무하고 모은 돈과 퇴직금을 합하여 김밥천국 월곡점을 지하철역 월곡점 바로 옆에 냈다. 돈을 많이 번 정도가 아니라 긁었다. ROTC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 전해진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전단을 뿌렸다. 상가는 모든 점포에 전단을 직접 뿌렸다. 마라톤 풀 코스는 한 번도 뛰지 않았지만 10km, 20km는 여러 번 달린 경험이 있기에 전단을 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전단 효과가 나는지 점심시간에 손님이 너무 많아 대기 번호를 나누어주었다. 24시간 영업으로 주방과 홀서빙, 계산원까지 3교대가 되도록 직원을 증원했다. 김밥천국 월곡점은 매출이 전국 김밥천국에서도 상위에 랭크되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은 연극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도 마찬가지다. 한창 잘 될 때 권리금 5천만 원을 올려 받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벌어놓은 9억과 권리금 5천만 원을 합하여 9억 5천만 원으로 스포츠용품 사업을 했다. 원래도 마라톤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업을 스포츠용품을 하다 보니 월곡 마라톤회, 성북마라톤회 양쪽에 다 가입했다. 한 주는 월곡 마라톤으로 한주는 성북마라톤으로 훈련했다. 자기가 넘겨준 김밥천국 월곡점에서 마라톤 주자들 점심을 했다. 마라톤 주자들이 김밥천국 월곡점에 데를 지어 들어가니, 그냥 지나가던 사람도 김밥천국 월곡점이 맛집에 푸짐한 집으로 생각하고 손님이 더 왔다. 여기 점심시간은 번호표를 나누어주게 되었다. 마라톤 클럽은 월곡천과 성북동을 달리다 두 달에 한 번은 남산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남산 둘레길을 42.195km가 되도록 여러 번 돌았다. 남산을 돌 떼는 이심결은 감회가 남달랐다. 무작정 상경해서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유식한 말로 3D(Diffcilt, Dirty, Dangerous) 업종 일을 했다. 어렵게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진학한 곳이 남산 숭의 대학교 연극영화과다. 현실 사는 것이 힘들지만 대본을 외우고 무대에 서는 순간은 행복했다. 내일 카드값 결제할 돈이 없어도 무대에 서는 순간은 내가 무대의 인물에 몰입해, 세상 근심 걱정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였다. 뛰는 순간은 앞 주자 등만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아스팔트였다. 그냥 무념무상으로 달린다. 어느 정도 달리면 그때부터 생각했다. 김환목은 이곳 남산 마라톤 클럽에서 초창기에 회장을 역임했다. 이제는 고문으로 물러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스턴, 뉴욕, 런던, 베를린, 도쿄 마라톤을 6대 마라톤이라고 한다. 이곳은 누구나 뛰고 싶다고 배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의 완주기록을 제출해야 마라톤추진위원회에서 참가자를 정해주었다. 이제는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기록증을 내고도 무작위 추첨으로 했
해임은 매일 5km 정도 달렸다. 미아리가 집이라 우이천과 월곡천을 주로 달렸다. 비가 와도 달리고 눈이 와도 달렸다. 달리면서 군가 ‘전선을 간다’에 나오는 가사처럼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가사처럼 달렸다. 연습량을 늘렸다. 익숙해지자 10km를 달렸다. 2026년 3월 제26회 인천 국제하프마라톤에 처음 도전했다. 환목이 페이스메이커로 노랑풍선을 엉덩이에 달고 해임보다 약간 앞에서 달렸다. 출발 전에 환목이 겁먹지 말고 무조건 풍선만 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3월 22일 08시 30분에 출발했다. 출발선에서 3km 정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3km가 지나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달리면서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와 군가 전선을 간다. 교대로 부르면서 달렸다. 해임이 재수 시절 신세를 졌던 외삼촌 추대식 예비역 상사는 월남전 참전 유공자였다. 그가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위산업체에 취직했다. 5년을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처리하는 제도였는데, 하도 불공정이 심해서 퇴사하고, 재수했다. 노량진 학원 다니면서 독산 군인아파트 13평에 더부살이를 했다. 물론 화순탄광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월급을 받으면 어머니가 얼마씩 외숙모에게 돈을 보내는 줄은 알고 있지만, 그 시절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외삼촌 댁에서 재수했다. 공고 기계과 3학년 때 현장실습 갔다. 현장실습 중에 그 공장 직원이 밀링작업을 시범을 보였다. 옷소매가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실습생 해임과 다른 고3 학생이 바로 전원을 껐다. 하지만 이미 오른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이 대학병원에서도 원상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다쳤다. 그 기억으로 재수학원에서 공부하고 원서를 쓸 때 기계과가 아닌 일어일문학과를 썼다. 하프마라톤이라 10km 지점을 통과했다. 반환점에 마라톤준비위원 측에서 물병을 전해주고 팔뚝에 도작을 찍었다. 도장은 묘한 힘이 있었다. 도장을 팔뚝에 찍고 나니 힘이 솟았다. 눈앞에 보이는 노랑풍선만 보고 달렸다. 노랑풍선 환목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환목은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강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못 하고 바로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직종 일을 했다. 배운 전문 지식이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일했다. 껌팔이, 구두닦기, 아이스께끼 장사, 나이 들어서는 자장면 배달, 건설일용직, 정리고, 해체공, 하스리, 철근, 경량철근공, 중량철근공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고, 악착같이 살았다. 건설일용직으로 일하다 건설자재 임대업을 하는 사장 눈에 들었다. 목수들이 사용하는 노랑 유로폼을 건설현장에 임대 해주고 돈을 받는 백인빈 사장은 아들이 없이 딸만 하나였다. 딸 백미정과 결혼시켰다. 아들이 없으니 사위에게 건설자재 임대업을 물려주었다. 일이 잘되려니, 파주에 LG디스플레이 공장이 세워질 때 목수 형틀과 동바리 자재 임대 두 가지를 했다. 돈을 갈퀴로 긁는다는 표현처럼 돈을 벌었다. 돈을 벌 만큼 벌고 나니 병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위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초기라 너무 걱정마라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수술을 마치고 건강회복을 위해 마톤을 했다. 아내 백미정도 함께 달렸다. 처음 5km, 10km, 20km, 42.195km 완주했다.
한번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나니 중독이 되었다. 완주 100회 이상 달린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백회 마라톤 클럽’에 가입했다. 백회 마라톤 클럽은 김평기 회장이 10년 동안 회장을 하고 있었다. 백회 마라톤 클럽 회원 절반 이상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했다고 자랑했다. 환목 부부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2018년에 참가했다. 2019년은 세계적으로 코로나 19 유행으로 대회를 거르고 2020년에 참가했다. 보스턴 마라톤 경험한 사람들은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곳을 통과한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에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1935년 존 켈리라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선수가 마라톤 대회에 처음 참가하여 전 세계 유명한 서수를 제치고 일등을 했다. 1936년에도 존 켈리는 대회 2연패를 자신했다. 출발은 2위로 했다. 20km 지점에서 1등으로 달리는 앨리슨 브라운을 추월했다. 추월하면서 앨리슨 브라운에게 힘내! 파이팅! 격려를 하면서 추월했다. 존 켈리 마음은 1등으로 추월한 이상 마지막 결승선까지 자기가 1 등할 것을 확신하고 시건방지게 덕담했다. 반환점을 돌고 32km 정도 달릴 때 이번에는 앨리슨 브라운이 존 켈리를 툭! 치고는 힘내! 파이팅! 하고 추월했다. 존 켈리는 열을 받아 추월을 노렸으나 발을 앞으로 디디기만 하면 뒤에서 고무밴드 줄이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누가 그런 개 같은 말을 지었을까 존 켈리는 열받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으나 1등 앨리스 브라운, 2등 존 켈리였다. 사람들은 32km 구간을 ‘상심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해임은 환목이 엉덩이에 차고 달리는 노랑풍선만 보고 달렸다. 하프마라톤 첫 완주기록 1시간 29분 50초였다. 박해임이 속한 월곡 마라톤, 성북마라톤, 인접 텐트 백회 마라톤 선수들도 해임 첫 하프 완주를 축하했다. 김평기 회장 주선으로 백회마라톤, 목멱 마라톤, 월곡 마라톤, 성북마라톤 러너들이 모두 인천 백승 회관으로 모였다. 해임 첫 하프 완주 축하하는 덕담과 백회 마라톤을 시작으로 각 마라톤 클럽 회장들 건배 제의가 있었다.
환목이 해임에게 한국마라톤 역사적인 이야기를 했다. 1932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고) 손기정,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고) 서윤복,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1, 2, 3등을 휩쓸었던 (고) 함기용, (고) 송길윤, (고) 최윤칠 이야기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고 이봉주가 여러 국제마라톤에서 우승한 이후는 한국을 빛낼 마라톤선수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세계 6대 마라톤 대회뿐만 아니라 국내 유명한 춘천 마라톤, 동아 마라톤, JTBC마라톤, 남승룡 마라톤 대회 등이 모두 인터넷으로 신청받기에 2030 젊은이가 대회신청 접수 시작되면 2시간 이내에 접수신청이 마감되는 바람에 전국 마라톤 동우회에서 열심히 달리는 60, 70, 80대 노인들을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낙심한 박해임, 이심결, 이학선, 김환목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마라톤 대회를 나이 60 이상으로만 참가신 청을 받고, 1, 2, 3 등 수상도 60대, 70대, 80대 나이를 10년 단위로 구간을 정해 심사하는 노구(老嫗) 마라톤 대회가 생겼다.
노구 마라톤 정식명칭은‘태종과 노구 문화제 마라톤’이나, 줄여서 ‘노구마라톤’이라고 불렀다. 이방원은 13세에 각림사(覺林寺)에서 운곡 원천석 문하생이 되었다. 천자문, 소학, 사서삼경을 배우고 과거에 응시해 문과로 급제했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나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21세기에도 온천지 법대 나온 인간들이 국가 주요 부서의 장을 맡고 있다 보니 과학기술 분야 전공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같은 과거 합격해도 무과 합격보다 문과 합격을 더 영광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과다.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그 옛날 각림 촌구석에서 학문을 가르쳐준 스승을 조정으로 모시고 싶었다. 지금도 각림은 버스가 하루에 한 번밖에 다니지 않는 촌인데, 조선 시대는 얼마나 깊은 산촌이었겠는가? 여기를 태종이 탄 가마가 원천석을 만나러 왔다. 강원도 관찰사가 있는 원주 강원 관찰사에게 간단한 업무보고를 받은 태종 일행이 횡성, 안흥 경우 주천강을 따라 각림으로 왔다. 각림천을 거슬러 원천석이 사는 변암을 향했다. 원천석은 각림천에서 빨래하는 할미에게 내가 가고 난 후에 뒤에 오는 사람이 앞에 지나간 선비가 어느 쪽으로 갔느냐고 물으면 오른쪽 재를 넘어갔다고 말해주오. 했다. 가마 일행 선두가 노파에게 물었다. 앞서간 선비가 어느 길로 갔느냐 물음에 오른쪽 재를 넘었다고 대답했다. 태종이 탄 가마를 들고 가는 인원이 힘이 들어 잠시 가마를 내려놓고 쉬었다. 태종이 쉰 것을 기념하여 정자를 지었으니, 태종대(太宗臺)다. 빨래하던 노파는 가마에 그려진 용 그림을 보고 왕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물에 빠졌다. 늙은 할머니가 빠진 늪이라고 노구소(老嫗沼)가 되었다. 태종대 옆이 노구사당이다. 노구 할미가 한양에서 잡으러 오기 전에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후세 사람들은 충절로 생각했다.
노구사당을 짓고, 태종과 함께 기리는 태종 노구 문화제가 매년 10월에 열렸다. 태종과 노구할머니를 기리는 횡성군 지역축제로 만든 것이 ‘태종 노구 문화제’다. 2020년 10월에 제1회 태종 노구 문화제가 열렸다. 2026년 10월 제7회부터는 노구 마라톤 대회를 추가했다. 전국각지에서 60대부터 80대까지 마라톤 좀 한다는 노인들은 다 모였다. 박해임, 김환목, 이학선, 이심결이 모두 참가했다. 강북 마라톤 클럽에서도 김우준, 최성학, 김미동 등이 마라톤 접수를 했다. 조선 시대 태종이 수레를 타고 운곡 원천석을 찾아왔으나 노구할머니 거짓말로 돌아간 그 길을 마라톤 코스로 만들었다. 태종대와 노구사당은 터가 좁아 부득이 강림초등학교와 강림중학교 운동장을 이용했다. 촐발은 강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각림천을 거슬러 상류로 달렸다. 노구사당과 태종대를 지나 우측 고개를 넘었다. 수리네미 고개는 평소에는 산림 보호 목적으로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는 곳이다. 횡성군에서 산림청과 협조하여 태종노구 문화제 기간에만 한시적으로 개방했다. 덜컹거리면서 수레너미 길을 넘은 태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치악산 줄기 변암에 은거한 원천석은 멀리서 임금이 넘어간 수레너미를 보고 절을 했다. 산 이름이 배향산(拜向山)이 되었다. 자신은 고려의 유생이지만 자신이 사서삼경을 가르친 제자가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이름이 ‘마치골’이 되었다. 강림초등학교를 출발하여 태종대까지는 이학선이 선두로 달렸다. 그 뒤로 박해임, 김우주, 이심결, 김환목, 최성학, 김미동이 2그룹으로 달렸다. 태종대를 지나자 수리네미길은 경사가 급했다. 이학선이 다리에 힘이 빠졌다. 2그룹과 함께 달렸다. 이때 언덕길을 마치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인 선수를 제치는 심정으로 김우준이 선두로 나섰다. 수리네미길은 좌우에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수리네미길을 나와 매화산 하단을 지나 주천강을 거슬러 달렸다. 안흥이 보였다. 42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웰리할리 파크 입구가 반환점이었다. 반환점에서는 이심결이 선두, 박해임과 김우준이 2위 그룹을 형성했다. 이학선, 김미동, 이철봉이 3위 그룹을 형성했다.
안흥을 통과할 때 박해임이 선두로 나섰다. 그 뒤에 이심결, 이학선, 김미동, 이철봉, 김우주, 김환목, 최성학 순이었다. 안흥을 통과할 때 순서가 주천강을 따라 하류로 올 동안은 순위 변동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안흥 다리를 건너 각림 방향으로 진입하자 김우준과 김환목이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박해임은 달리면서 김우준에게 지면 안 된다고 어금니를 깨물고 달렸다. 김환목이 해임에게 해준 이야기다. 김환목과 김우준은 원래 백회 마라톤 회원이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42.195km 완주기록 6회를 보스턴에 제출해야 한다. 김우준이 5회 기록뿐이라 국내 마라톤 한 곳을 김우준이 접수하고 김환목이 김우준 배번을 달고 달렸다. 운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환목이 달리는 중에 설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중간에 화장실에 가서 설사를 다 마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로 달리다 보니 보스턴 마라톤에서 요구하는 기록 이하의 시간이 나왔다. 결국, 그해 김우준은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일로 김우준이 김환목을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2026년 1월 일이다. 2025년 백회 마라톤 클럽 송년회에서 김평기가 회장으로 뽑혔다. 김평기는 사무총장에 김환목을 지명했다. 2026년 1월이 되었다. 백회마라톤 신년회 식사 자리에서 김우준이 김평기 회장과 김환목 사무총장을 싸잡아 비난했다. 2026년 연간 사업계획도 안 만든 회장과 사무총장은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 백회 마라톤 20년 역사 동안 무슨 대한체육회처럼 연간사업계획을 거창하게 수립한 적이 없었음에도 회장과 사무총장이 맘에 안 든다고 연초에 돌직구를 날렸다. 김환목은 그 자리에서 사무총장 사퇴했다. 여기 백회 마라톤 아니더라도 마라톤 할 곳은 많다고 떠났다. 그런 김우준을 노구 마라톤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 김환목이 동아 마라톤을 2시간 20분에 일반인이 1등을 했다. 국가대표급 엘리트 마라톤선수도 아닌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마라톤업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동아 마라톤 1등을 했고, 그 결과로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했다. 마라톤 전설 손기정 옹이 보스턴까지 응원을 왔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환목은 체류비 아끼려고 마라톤 대회 하루 전에 보스턴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마라톤을 한 것이다. 동아 마라톤 자신이 세운 2시간 20분보다 19분이나 뒤처지는 2시간 39분으로 골인했다. 창피했다. 죽고 싶었다. 그때 손기정 옹이 달려왔다. “수고했어!”“낙심하지 말고 체계적으로 자세를 좀 고치고, 주법도 바꾸면 좋은 기록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동아 마라톤 1등 하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형편없는 기록을 낸 환목에게 관심 가지고, 후원하는 기업이 없었다. 환목 아내 양경숙은 이제 마라톤 그만두고, 가정에 충실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스턴 마라톤을 마치고 귀국하자 손기정 선생이 환목 포함 보스턴 마라톤 그해 출전 선수 4명을 장충동 자매족발집으로 초대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한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기록이 저조하다고 자책할 수도 있으나 절대로 대한민국 태극기를 생각해서라도 좌절, 포기는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옛날 이야기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선수단 파견을 위한 선발전을 일본 육상연맹에서 공개 대회를 열었다. 일본 마라톤 기대주 시오아꾸, 스즈끼 2명과 조선인 남승룡, 손기정 중에 3명을 뽑기로 했다. 일본육상연맹은 일본인 2명과 조선인 2명 중에 그날 잘 달리는 1명을 뽑아 베를린으로 파견 보낼 예정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체육과 공무원이던 손기정 양정고등학교 몇 년 선배가 일본 방침을 미리 조선에서 일본으로 출발 전에 알려주었다. 일본에 도착한 손기정은 남승룡을 찾아가 선배님, 제가 일본 놈 힘이 빠지도록 잡았다 놓았다 여러 번 반복할 것입니다. 선배님은 선배님 속도로 달리십시오. 했다. 총성이 울리고 손기정이 100m 선수처럼 달렸다. 400m 정도 달려 나가니 스즈끼와 시오아꾸가 놀라 손기정을 따라붙었다. 800m 구간에서는 손기정을 추월했다. 2km 구간에서 손기정이 또 속도를 냈다. 두 명 일본 선수를 제치고 손기정이 1등으로 달렸다. 5km 지점에서 천천히 일본인 선수 2명이 추월하도록 했다. 10km 지점에서 다시 손기정이 속도를 냈다. 일본 선수를 추월해서 1등으로 달렸다. 16km 지점에서 다시 일본인 선수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20km 지점서 다시 추월했다. 24km 지점서 다시 일본인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30km 지점에서 손기정이 다시 속도를 냈다. 1등이 되었다. 일본 선수 2명은 거기서 완전 다리에 힘이 풀렸다. 4등으로 자기 속도로 달리던 남승룡이 32km 지점에서 일본 선수 2명을 제치고 2등이 되었다. 손기정은 뒤를 봤다. 남승룡이 똑같은 속도로 2등으로 달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씩 속도를 늦추었다. 40km 지점에서 남승룡이 손기정을 추월해 1등으로 달렸다. 그 후로는 쭉 결승선에 도달할 때까지 손기정은 남승룡 등 번호만 보고 따라 달렸다. 선발전에서 남승룡 1등, 손기정 2등, 시오아꾸 3등, 스즈끼 4등이 되었다. 결국, 일본은 3명 방침을 은근슬쩍 보도도 없이 베를린 올림픽에 4명을 내보냈고, 손기정 1등, 남승룡 3등을 했다.
환목은 손기정이 일본 선수 농락하였듯이 김우준을 농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아닌 김우준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달렸다. 선두에 박해임, 2등에 이심결, 3등 김환목이 가리내를 통과했다. 송실까지도 그 순위는 변함없다. 마지막 강림 다리를 지나고 강림중학교 결승선이 보였다. 심결이 속도를 냈다. 박해임도 1등 자리를 유지하려고 힘을 썼다. 환목이 마지막 속도를 올렸다. 강림중학교에는 횡성군민들이 마라톤 결승선 통과를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1등으로 환목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2등 박해임과 3등 심결은 불과 2초 차이였다.
에필로그
<홍길동전>에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 하고 홍대감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 규범으로 서자는 자식 축에도 들을 수 없는 규범 때문이다. 21세기에 디올 백을 디올 백으로 말 못하고 작은 파우치라고 하는 소리를 방송으로 온 국민이 들어야 했다. 1979년 고3 시절에 경험한 계엄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나이 60 중반에 또 경험했다. 청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해야 될 국어교사 대신 정보장교를 21년 3개월 했습니다. 중령으로 진급했으면 더 군인이었을 것을 소령으로 사회에 나왔습니다. 장기복무 군인이 사회에 나오면 사기당한다고 1년 사회적응 교육이 있습니다. 퇴직금 사기 안 당하는 방법, 이력서 쓰기, 적성검사, 흥미검사, 성격검가를 국가보훈처에서 해주었습니다. 성격검사에 INTP가 나왔습니다. 강사가 저를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떻게 그 성격으로 21년 3개월을 버티었냐고? 이제는 누구의 지시 명령 안 받고 혼자 일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요즘 누가 종이책을 보느냐고? 해도 지구에 단 한 명의 독자만 있어도 쓸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세상이지만 나의 글향기는 인공지능이 비슷해도 똑같을 수 없게 쓸 것입니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되었으나 애국가 가사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처럼 국민이 민심이 천심이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나라가 정상화되었다. 매월 1편의 단편 소설을 쓰고자 하였으나 2024년 12월 3일 계엄 이후 탄핵, 파면 이후 새 대통령이 선출되는 동안은 원고지 한 장 쓰지 못했다. 천우신조로 국가가 정상화되어 다시 글을 쓰고 책을 냈습니다. 늦게 등단한 만큼 오래도록 글을 쓰겠습니다. 책을 잘 만들어준 좋은 땅 출판사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