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창고. 19
숙주(叔舟)
‘한국을 빛낸 100명 위인’노래 가사 중간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신숙주와 한명회 역사는 안다. 정말 역사는 다 알까? 숙주나물이 쉬 변한다고 배신의 아이콘으로 신숙주(申叔舟)로 빗대어 ‘숙주나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안다. 21세기에 사는 당신도 집현전에서 사가 독서에서 우정을 나누던 성삼문과 다른 길을 갔다고, 아내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에도 당신은 사실로 믿고 있다. 아내가 사망한 것은 계유정난 이전 일이다. 계유정난에 성삼문의 길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분(憤)해서 아내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신의를 지킨다는 것,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 한 임금에 대한 충성인가? 나라에 대한 충성인가? 고민했다. 저승에서 삼문과 600년이 지난 오늘도 화해를 못 하고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은 나를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놈이 어떻게 수양대군에게 꼴딱 넘어갔냐고 하겠지만, 수양대군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라, 수양이 탄 말을 내가 고삐를 끌고, 만리(萬里) 길을 갔다.
2024년 12월 3일 당신이 경험한 계엄을 내란으로 평가한 이유가 무엇인가? 1979년 계엄선포 이후 45년 만에 계엄이라 당신은 몹시 당황했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단종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보낼 때의 절박함이 있었을까?
계엄이 선포되었다. 계엄군이라면 1980년 부산․마산 데모를 진압한 계엄군이나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이 연상된다. 12월 3일 계엄군은 출동한 병사가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소시지, 삼각김밥을 먹었다. 배가 고파서도 먹었겠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에 나오는 민주를 해치는 계엄이라는 것을 병장도 상병도 일병도 이병도 알았다. 국방부 장관, 계엄사령관, 방첩 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 같은 장군보다 출동한 병장에서 이 병까지가 이 나라 헌법 제1조를 더 잘 알고, 수호한 것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한 군인들과 과천 선거관리위원회를 점령한 군인 병사들 걸음걸이를 봐라. 천천히 걸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명령, 정의롭지 못한 명령에 소극적 행동으로 저항하였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한 국회의원, 국회의사당을 인간 띠로 만든 시민, 학생들이 BBC, CNN에 주목받았다. 그런 주목받은 사람들 공도 인정한다. 그런 언론이 미처 보도 못 한 계엄군으로 출동해 편의점에서 어묵, 컵라면에 삼각김밥을 먹는 저 여유와 배짱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들이 조선 시대 계유정난에 대항한 사육신과 생육신이 빙의한 것이다. 그러니 계엄 사령과 육군 대장의 명령으로 출동했지만, 국회의사당, 선거관리위원회 점령 전에 삼각김밥, 컵라면, 어묵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어차피 선거관리위원회 점령해도, 서버 압수는 검사가 하기로 했기에 병사들은 편의점에서 검사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사육신의 시신을 세조가 무서워 아무도 접근 못 했다. 검은색 허름한 복장에 구멍 숭숭 난 삿갓을 쓴 매월당이 당당하게 사육신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야산에 묻었다. 사육신공원에 소풍 갔던 학생들이 자라 군인이 되고 계엄군으로 출동해 편의점에 들어간 것은 매월당의 용기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숙주 생각으로 한 일이다. 수양대군이 회유하거나 장래 정승의 자리를 약속하고 나를 데려간 것이 아니다. 12월 3일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탄핵 파면되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 권한대행이 파면된 대통령과 다를 바 없다면 또 탄핵 파면해야 하지만 이 나라 법관들은 기생집에서 접대받은 약점이 있어서 포청천 같은 추상의 판결 못 했다.
진관사 사가 독서 시절에 민가에 몰래 내려가 근보(謹甫)와 동동주 한잔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음운을 논하고 조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였고, 세상에 모범이 되는 나라, 조선을 만들자고 토론했었지. 자네는 나에게 충성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충성은 내 마음이 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멋있는 말을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국민에 대한 충성할 법하건만 그의 충성은 당신도 알다시피, 한 여인에 대한 충성이었다.
당신도 알지? 손바닥에 임금 왕(王)을 써서 TV에 비출 때 알아봤다. 조선 시대 홍길동은 조선 법도가 서자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해 홍대 감이라고 불렀다. 2024년은 왜 디오르 백을 디오르 백이라 못 부르고 작은 파우치라고 불러야 하는지, 조선 시대인지 21세기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더 웃긴 일은 신년 대담에서 디오르 백을 작은 파우치라 부른 기자가 경성방송국 사장이 되었다. 이 정도면 일본 강점기 시절의 조선총독부가 경성방송국 사장을 임명하는 수준 아닌가요? 당신 어떻게 생각해? 공감하면 공감한다고 좋아요! 하트 뿅 뿅 날릴 수준이다. 디오르 백뿐만 아니라 샤넬 백은 더했다. 샤넬 백이 마음에 안 든다며, 행정관을 시켜 웃돈을 주고 매장에서 다른 모델로 교환했다. 1980년대 대학에서는 여대생이 명품을 든 것을 ‘된장녀’로 불렀다. 2024년 된장은 디오르 백은 작다고 행정관에게 너 가져 라고 했고, 샤넬 백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행정관 보고 웃돈을 주고 바꿔오라고 했다.
세종이 승하하시기 얼마 전에 세손을 잘 부탁한다고 하는 말에 같이 대답하였고, 세월이 지나 세손이 왕위에 오르자 인수 대감(박팽년) 같은 권신들은 신하들의 뜻을 어린 임금에게 관철하려고 했고, 수양대군은 대신이 왕권에 간섭하는 것을 못 마땅해했다. 고려의 불교 광란에 백성들이 굶어 죽거나 말거나 집권층만 배부르면 된다는 것을 뒤엎어버리고 왕이나 백성이나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목숨을 건 역성혁명으로 만든 조선이 몇 대 못 가서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왕조가 되는 것을 나 혼자만이라도 왕권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근보와 숙주 우정을 세상 사람들은 부러워했지만 결국 계유년(癸酉年) 사건으로 우리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숙주는 1438년 사나 양사에 합격하여 생원·진사가 되었고 근보는 1435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438년 문과에 급제해서 집현전 수찬이 되었다. 세종의 은밀한 음운 창제에 대한 명령으로 요동에 귀양 온 황 찬을 함께 만나고 음운에 대한 서적을 베껴서 보고했었지만 1443년 세종 25년 훈민정음 창제 검토에 중요한 그 시기 2월 21일 왜(倭)에 통신사(通信使)로 떠나는 변호 문을 수행하는 서장관이 되었다. 서장관은 통신사 일행이 왜국에 가는 곳마다 역관이 통역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한 기밀에 관한 것은 숙주가 직접 통역하고 답변했다. 역관에게 통역시키면 통신사에게 그대로 묻고 답변도 그대로 하면 조선의 기밀을 다 왜(倭)에 넘겨줄 것을 염려한 임금님께서 보통의 것은 역관을 시키되, 조선의 기밀 사항은 서장관이 직접 답변하고 묻고 답한 것 일체를 돌아오면 문서로 보고하라고 하셨다.
통신사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성삼문과 다른 집현전 학자들을 생각하면서 시를 한 수 지었다.
반세천애이권유(半歲天涯已倦遊)
귀심일석고산추(歸心日夕故山秋)
산중구우청등야(山中舊友靑燈夜)
한화응회해외주(閑話応恡海外舟)
(타국에 떠돈 지 어느새 반년 지나고/
마음은 밤낮 돌아갈 고국산천/
등불 밝혀 글 읽던 산중의 친구들 /
한가할 때 바다로 떠나간 배를 말하겠지)
근보는 어린 임금이 수양에 옥새를 전했을 때 나오는 눈물을 참았다. 세종 임금이 하신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면 상왕 전하를 다시 보위에 오르게 하는 것이 임금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울분을 바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봐서 수양을 제거하고 나의 목숨을 버리고 상왕을 보위에 다시 오르게 하는 것이, 제대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동동주를 마시면서 나눈 대화에서 숙주는 아니라고 판단한 자네는 나를 제외한 박팽년, 하위지, 이 개 등과 뜻을 모았다. 은밀하게 절대로 숙주 눈과 귀에 보여서도 들려서도 아니 된다 했다. 한명회를 만나러 압구정으로 찾아갔다. 주안상을 준비했다.
“근보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네, 집현전 시절에 그와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 이제는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집현전 대감들이 숙주 대감만 빼고 다 상왕을 복위할 일을 도모한다면서요?”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낌새라도?”
“명(明)사심을 위한 연회를 한다는데 별운검은 누구로 내정되었습니까?”
“네, 성 승 대감과 유응부입니다.”
“성 승은 근보 부친이옵니다.”
“설마 그 노인 영감이 딴마음 있겠습니까?”
“자식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비입니다. 자식도 아비를 효로 모시지만.”
“허 참, 성승 근보 부자가 다 상왕을 복위시키려고 한다. 이거 참, 야단이군요.”
“어제 근보가 퇴청하는데 저를 피해 가는 얼굴빛이 어두웠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술이나 드시지요?”
호리병에 든 술을 다 비우고 다시 한 병을 가져오게 했다. 실컷 마시고 밤이 삼경이 되어 집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분주히 움직이는 나인들 사이로 한명회는 변장한 무사들을 연회장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성 승 대감과 유응부가 입궐했다. 그는 오늘 연회에 별운검은 두지 않기로 했으니 돌아가시라고 했다. 성 승과 유응부 얼굴색이 변했다. 거사를 어떻게 알았을까? 성 승 대감은 모른 척! 하고
“아니, 어젯밤까지 아무런 기별이 없어 입궐했는데, 여기서 돌아가라니 누구의 지시오?”
“예, 명나라 사신이 별운검은 술맛이 떨어진다고, 그런 지시를 하였습니다.”
유응부는 당장이라도 한명회 목을 날린 듯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날의 거사를 밀고한 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김 질이었다. 거사에 성공하면 장인 정창손을 영의정으로 추천하겠다고 해서 참여했는데, 심약한 김 질이 장인에게 그 말을 하자 장인이 김 질을 앞세워 바로 수양대군에게 갔다.
1443년 세종 25년 10월 13일에 왜(倭) 통신사들이 귀국했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잘 정리해서 세종 임금께 보고했다. 보고를 마치자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수고했다는 짧은 한마디였고 오직 세종의 관심사는 훈민정음이었다. 그해 12월 30일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맞이를 준비하는데 임금님은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한다면서 보여주셨다.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으며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고 하셨다.
구해다 드린 통지의 칠 음(七音)과 사 성(四聲)원리를 알고 있었기에 전하께서 신하들의 반대를 미리 차단하느라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하였지만, 실제는 실담어(悉談語)의 五十音韻에서 취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명으로 만들고 반포되는 훈민정음을 신미 대사가 크게 이바지한 것을 알고 있다. 훈민정음은 소리 나는 그대로를 기록할 수 있기에 한양의 말소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함경도, 평안도 등 팔도사투리를 소리 나는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는 발음기호였다.
계유정난으로 잡혀 온 죄인들에 대해 수양대군은 의금부에 지시하여 숙주가 감옥에 어느 죄인을 만나든지 통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근보가 갇혀있는 옥사로 갔다. 그리고
“근보, 나 좀 보세?”
“성삼문은 죽은 지 오래되었소!”
“그러지 말고 대화 좀 나누세?”
........
어떻게 해서라도 근보 죽음만은 면해볼 요량이었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어린 임금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긴 날 이후의 나라에서 받은 쌀은 그대로 헛간에 보관하고 있었다. 목숨을 살리려고 접근했으나 숙주 보기를 송충이 보듯 했다. 삼 문이 옥에서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나에게 시 한 수를 건넸다.
‘어진 임금이나 도와서 태평성대를 이룩하게나. 나는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 뵙겠다. 내 시나 후세에 전해주게나.’
擊鼓催人命
回顧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둥둥 북소리 목숨을 재촉 하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을까나)
임금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보여주자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이 반대 상소했다. 최만리의 반대에도 훈민정음에 연연했던 것은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한자를 쓰고 있지만,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말을 하는 것을 써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나라의 기틀을 반듯하게 올려놓는 길인 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은 훈민정음은 중국의 대국을 섬기는 우리 조선이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다. 반대만 한 것이 아니라 훈민정음을 언문, 즉 똥 글 ‘통시(通屎) 글’이라고 비하했다.
신(臣) 최만리 엎드려 뵈옵건대 언문제작은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슬기롭게 행하는 것이 아득한 옛것으로부터 나온 것은 알겠습니다만 감히 의심할 점이 있어 아래와 같이 삼가 상소하오니 성상의 언문을 거두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우리는 조종 이래로 중국을 섬겨 오로지 그 제도를 따라왔는데 이제 언문을 창제하시면 이것을 보고 듣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향해 세종은 분을 참지 못했다.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에 가담한 신하들은 당상관이든 당하관이건 모두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너희가 말하기를 음을 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했다. 설 총이 만든 이두도 역시 음을 달리하고 있고 이두를 만든 근본 취지 또한 백성을 편안케 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언문 역시 백성을 편안케 함이 아니냐? 너희는 설 총이 이두를 만든 것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인 내가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야?’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칠 음과 사성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한자(漢字)음이 제멋대로 읽히는 것을 지금 바로 잡지 못한다면 그 누가 어느 세월에 바로잡겠느냐?”
분(憤)을 참지 못한 세종은 최만리, 신석조, 김 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 금 등을 의금부에 하옥했다. 분(憤)이 삭자 다음날에 풀어주었다. 정창손은 파직시켰고 김 문은 다시 심문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임금은 오래도록 안질을 앓았다. 두 눈이 흐려지고 눈동자가 깔깔하며 어두운 곳을 다닐 때는 지팡이로 더듬더듬 앞을 더듬고 다녔다. 백내장까지 생겼다. 초정약수가 좋다는 소문에 초정약수로 목욕도 하고 마시기도 했다. 정말 신기하게 침침하던 눈이 조금 밝아졌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세종은 속리산 복천암에서 지내는 신미 대사를 행궁으로 불렀다. 신미는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집현전 학자들 누구보다 큰 기여자다. 신미는 훈민정음 골격을 완성하는 모음과 자음의 체계를 임금에게 처음 아뢰었다.
“전하, 모음은 허파에서 올라오는 공기의 흐름을 구강 내에서 방해받지 않으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옵니다. 자음은 방해함으로 그 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나도 공주에게 아, 아, 아~ 발음 연습시켜보아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느니라. 천자문을 한 글자, 한 글자 따로 읽게 하여 입과 혀의 모양을 눈여겨보았다.”
“전하, 불경에 쓰인 한자가 한자로만 읽고 나니, 뜻이 통하지 않아 범어를 익히고 나니, 불경의 한자라는 것이 범어를 음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말의 토속 사투리를 음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이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다. 계속 정진해서 백성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야 한다.”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1446년 세종 28년 9월 29일 3년 전에 창제한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전에 신미 대사에게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라고 명령했고,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 용비어천가를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짓도록 명령했다.
세종어제(世宗御製) <訓民正音>의 서문 한자 원문은 54자이고 한글 언해본은 108자다. 훈민정음해례본 끝부분에 정인지의 후 서(後書)가 실려 있다. 세종의 서문과 구별하기 위해 후 서라고 불렀다.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 옛사람이 그 소리를 바탕으로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을 통하게 했다. 삼재(三才) 천인지(天人地)의 근본원리를 실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쉽게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다르고 소리의 기운도 각각 다르다. 대개 중국 이외의 외국어는 말의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어 중국의 글자를 빌려 그 쓰임에 통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낀 것처럼 들어맞지 않고 서로 어긋나서 통하지 못한다. 각기 다 처한 바에 따라 편리하게 할 것이지 억지로 똑같게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예악과 문물제도는 중국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우리말과 사투리는 중국과 다르다. 그러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내기 어려워 고심하고 옥사를 처리하는 이들은 사건의 곡절을 통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고심하고 있다. 옛날 신라의 설 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이두는 한자를 빌려 쓰는 것이라서, 어렵고 막혀서 비루하고 근거가 일정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적는 일에는 그 만분의 일도 통하지 못했다.
1443년 세종 25년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만드시고 간략하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했다. 상형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 했지만 글자는 옛날 전자(篆字)와 비슷하다. 소리를 따랐으므로 음이 칠조(七調)에 맞고 삼극(三極), 삼재(三才)의 듯과 이기(二氣) 음양(陰陽)의 묘가 모두 포함되었다. 28자로써 전환이 무궁하며, 간편하고 요긴하고 정밀하게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깨칠 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넉넉히 배울 수 있다. 이 글자로써 한문을 풀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고, 이것으로 송사를 들으면 그 실정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글자의 운(韻)으로서는 청탁을 잘 가려낼 수 있고, 아가(樂謌)는 율려가 잘 조화된다. 쓰는 데 부족함 없으며, 가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다.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이 홰치며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도 적을 수 있다.’
전하께서 이 글자에 대한 상세한 해석을 붙여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명했다. 이에 신(臣) 정인지, 최 항, 박팽년, 신숙주, 삼 문, 강희안, 이 개, 이선로 등과 더불어 모든 풀이와 보기를 지어 이 글자의 줄거리를 서술했다. 이글을 보는 이들이 스승 없이도 혼자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깊은 연원과 정밀하고 묘한 이치에 대해서는 신들이 능히 펴 나타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인이다. 지으신 법도와 베풀어 주신 시정의 업적이 모든 왕을 초월 정음을 지으심도 있던 것을 이어받아 펴신 바가 없고 자연에서 이룬 것이다.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아니한 바가 없으며 사람의 힘으로 사사로운 일이 정녕코 아닐 것이다.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 오래되었으나, 만물을 열어놓고 그 일을 성취하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1446년 세종 28년 9월 상한 신 엎드려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이 글을 씁니다. (훈민정음 정인지 서)
문종(文宗)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돌아가시고 어린 임금이 즉위했다. 문종은 유명으로 황보인, 김종서에게 어린 임금의 보필을 당부했다. 이로써 재상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는 기관에서 오히려 국왕의 국정을 지도하는 곳으로 변했다. 역사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인가? 600여 년이 흐른 1980년에 최 대통령의 국정을 보필한다고 만든 국가 보위자문위원회가 오히려 대통령의 국정을 지도하는 것처럼 되었다. 박 대통령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시기에 김 중정부장 총탄에 가신 후에 대통령으로 추대는 되었지만 빨리 무거운 짐을 벗고 싶었다. 유신헌법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국민 대다수가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투표로 하고 싶은 것을 최 대통령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임시 정부의 대통령이고 헌법이 국회서 정비되고 새로운 헌법이 입법되고 그에 따라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물려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새 헌법을 만들기 전에 하야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작년 10월 26일 국가원수의 돌연한 서거로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의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10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국정의 최고책임자로 대임을 완수해왔습니다. 국군통수권자로 국가적 난국에 대처하여 철통같은 방위 태세로 북한 공산집단의 무력도발을 억지해준 우리 국군장병 여러분에게 노고를 높이 치하합니다. (이하생략)
오늘 대통령을 떠나면서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대립과 분열이 아닌 이해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하고, 불퇴전의 의지와 용기로 부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에 입각한 나라를 만들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의 깊은 이해와 아낌없는 협조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면서 우리 대한민국 앞날에 평화와 안정과 영광과 융성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고 마쳤다.
1980년대는 계엄을 선포해도 철통같은 국가안보를 염두에 두고 계엄을 선포했다. 2024년 12월 3일은 북한 평양 상공에 무인 항공기를 보냈다. 제발 전쟁 좀 일으켜달라고 보낸 신호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인내력에 감탄했다. 그런 도발을 보고도 참았다. 12월 3일 계엄선포는 제발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달라는 신호를 보내도 그 너머까지 생각한 것인지 전쟁은 없었다.
그해 최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8월 16일 하야했다. 45년 후 대통령은 하야 성명도 없는 탄핵 파면했다. 탄핵 파면된 대통령이 대통령궁을 나서서, 대통령 되기 전 사가로 갔다. 뭔 자랑스러운 것도 없는데, 삼풍백화점 무너진 자리에 지은 아파트 단지에 수고하셨다는 현수막을 아파트 부녀회장, 동 대표 이름으로 걸렸다. 누구 맘대로 동 대표 사칭하냐고 진짜 동 대표가 항의했다. 맛은 알아서 보라 밥 맛집 투어에 한강 변을 개를 모시고 산책했다. 신문에서 보리밥, 개 산책이 실시간 검색어 1위가 되었다. 최고 통치자를 두 번이나 탄핵 파면한 나라는 드물다. 일본, 중국 국민이 말은 못 해도 우리나라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국가권력이 잘못을 저질러도 찍소리 못하는 자기들과 12월 3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인간 띠로 전 세계 뉴스의 메카가 된 것을 내심 부러워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많은 시민과 학생이 사망한 사태가 일어난 기간에 그곳에는 범죄 한 건 없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민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서로에게 허기진 배를 속여 부당한 계엄군 강경 진압에 항의했다. 12월 3일 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수백만 명 시위대에게 커피, 어물, 해장국, 순대 등을 익명의 기부자가 선 결제했다. 세계인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나라 국민은 이미 45년 전에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정어리 떼를 보았는가? 정어리 한 마리는 작지만, 정어리가 고래나 상어가 나타나면 모두 한곳으로 모인다. 거대한 정어리 떼가 고래나 상어가 보기에 자기보다 더 큰 물고기로 알고 감히 정어리를 먹을 생각 못 하고 도망간다. 수백만 명이 유명 가수들 공연장에서 흔드는 형광 봉 들고 시위했다. 밤에 비추는 형형색색 응원봉 물결은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 세계 언론이 이 특이한 모습을 생중계했다. 국회의장이 체면 구겨가면서 국회의사당 담장을 넘었다. 여자 국회의원 낙선자는 계엄군 총열을 잡고 항의하는 장면이 BBC 화면에 담겨 전 세계에 퍼졌다. 외신들은 K-POP에 이은 K-Democracy라고 치켜 올렸다. 미친 것들이지 데모크라시가 객지 나와 고생하는 것이지 무슨 케이 데모크라시야? 절대로 외국인이 쓰는 기사 표현을 그대로 믿으면 나라 망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고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 쓰고 사실은 재벌공화국 나라다. 고인이 된 이병철은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에 기소되지 않았다. 역시 고인 이건희 회장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2002년 삼성 비자금 수사 및 불법 세습에 관한 특검 수사 결과에 불구속기소 했다. 법원에서 집행유예 받았다. 탈옥수 신창원이 얼마나 억울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항변했을까? 그 심정 이해된다. 삼성 사내 변호사 김용철이 비자금과 정치인, 판사, 검사에게 로비한 것을 폭로했다. 이건희 포함 5명을 특수경제범죄 가중처벌법 등에 관한 법률상 배임으로 기소했다. 그에게 징역 7년 벌금 3500억 원을 구형했으나 역시 용두사미로 끝났다. 그러니 대한민국 헌법은 민주공화국이라 쓰고, 재벌공화국으로 읽어야 한다….
하야 성명은 8월 16일에 낭독했지만, 그해 12월 13일 05시 10분에 정 육군참모총장 체포연행 조사문건에 서명하는 순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언제고 때가 되면 떠나리. 그날 밤에 결재서류를 들고 온 전 보안사령관보다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3명이 전두환보다 더 염치없어 보였다. 3성 장군이면 2성 장군에게 상급자답게 정도의 길을 가라고 하급자를 나무라지는 못할망정 낮은 자에게 아첨이나 하고 엄연히 국방부 장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관까지 찾아온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이들 장군이 천자문이나 소학을 제대로 음미하며 읽었는지,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을 알고나 있는 장군인가 묻고 싶다. 그날 밤, 새 울고 먹먹한 밤 영월에 유배지에서 지었다는 자규시(子規詩)가 떠올랐다.
한 마리의 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원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산골짜기에는
지는 꽃이 불구나
하늘은 청각장애인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을
어이 듣지 못하는가?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 귀만 홀로 밝은고
단종 초기의 황보인 김종서가 단종을 보필하는 것을 사관(史官) 이승소(李承召)의 표현에 의하면 ‘군주는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 적인 존재로 전락하였고, 백관(百官)은 왕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겠으나 군주(君主)가 있는 것을 알지 못 한 지 오래되었다.
왕은 허약하였으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의정부 대신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수양, 안평 두 대군은 각자 자신의 세력을 넓혔다. 단종 원년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의정부 대신을 제거하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감행했다. 계유정난에 중요한 인물들은 한명회, 권 함, 숙주였다. 의정부 대신들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이유로 ‘황표정사’제도를 도입했다. 이것은 조정에서 인사 지명권을 위임받은 신하가 후보자 서너 명을 임금에게 명단을 올리면서 황색 점을 찍어 보고했다. 임금은 그 황색 점이 찍힌 인물을 임명했다.
김종서, 황보인은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권력욕이 강하고 야심가였던 수양대군 보다는 조정의 대신들과 술도 잘 마시고 시문에도 능한 학자풍의 안평대군이 의정부 대감들과 쉽게 친해졌다.
1452년 9월 어린 임금의 즉위를 인정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은사에 수양대군이 가면서 서장관으로 동행했다. 한양을 더나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올 때까지 말고삐는 숙주가 가자면 갔고, 쉬자면 쉬었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처단했다. 수양대군이 김 대감을 찾아갔을 때 심복만을 대동했기에 별 의심 없이 만났다. 수양이 두루마기 소매 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대감께 드릴 청이 있다고 말했다.
김 대감이 서찰을 펼쳐 읽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수양의 심복이 철퇴를 휘둘렀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대감이 쓰러지자 아들 승규가 아버님! 하면서 위에서 아버지를 덮었다. 심복 양정이 나타나 칼로 부자의 목을 날렸다. 김종서를 제거 후 수양대군은 왕명을 빙자하여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모두 궁으로 입궐시켰다. 한명회가 미리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조극관, 이 양 등은 처형되었고 전인지, 숙주는 살아남았다. 유교 정치이념으로 볼 때 수양대군의 집권은 명분과 정통성, 도덕성에 불의한 일이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로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근보 생각에 기쁜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 500년에 성삼문은 충신의 대명사였고, 숙주는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숙주나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면서 살았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같은 상왕의 고명대신을 제거하는데 이바지한 전인지 등 36명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명했다. 공신들이 노리는 것은 많은 전답과 노비였고 재산목록 노비 중에 미색이 좋은 노비는 골라서 첩으로 삼고 처지면 종으로 부리는 것이 세태였다. 정도전이 꿈을 꾸던 유학의 도가 펼쳐지는 조선은 이미 도가 당에 덜어진 지 오래였다.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조카를 죽이는 조선은 더 유학의 나라가 아니라고 자네는 분(憤)했다. 세종이 평생을 바쳐 육성해온 집현전 학자들이 근보가 처단될 때 죽거나 은둔으로 한양에서 사라졌다.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연명하던 선비들에게 충(忠)과 효(孝)와 논어에 수없이 등장하는 인(仁)은 서당에서나 보지 세상에는 사라졌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처럼 세상을 살아야 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은 세종의 뜻을 기리면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노량진 사육신 묘지에 안장된 육신(六臣)의 시신들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 정자에서 한강 하류를 내려다보면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매월당은 세상이 싫다고 은둔의 길로 갔다.
조선왕조 오백 년은 왕실에서 피바람의 연속이었다. 왕권 다툼이 일 때마다 권력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신하들은 고개를 내밀고 고개가 부러지거나 공신대열에 끼어 공신전으로 대대손손 부를 대물림했다. 태조에게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게 하는 배극렴 등 39명의 개국공신이 있었고, 정종에게는 삼봉을 제거할 때 앞장선 조 준 등 17명의 공신이 있었다. 왕자의 난을 두 번째 겪는 태종에게는 하륜 외 37명의 공신이 줄을 섰다. 계유정난은 정인지 등 36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되었다. 1980년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12.12와 5.18 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훈장 수여 지시했다. 공적조서 책임 장교는 무공훈장은 적과 싸워 전공을 세운 장병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광주 시민과 학생이 적이냐? 더구나 12.12 군사 반란에 반란군이 승리했다고 훈장을 수여하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선배 군인 중에 훈장 수상자가 벌떡 일어나 훈장을 반납할 것이라고 공적조서 업무를 거부했다. 육군참모총장은 폭도는 적이 아니냐? 하면서 공적 조서를 다른 장교에게 지시하라고 인사참모부장 장군에게 명령했다. 전두환 태극무공훈장, 정호용 을지 무공훈장, 기타 여러 장군과 대령, 중령, 소령, 대위, 상사, 중사, 병에게 훈장과 표창 이름이 나열되었다. 거부한 그 장교는 차후 강제 전역했다. 세월이 흘러 (고)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적 결단으로 잘못 수여된 훈장은 국가가 잘못했으니 국가가 책임지고 삭탈해야 한다고 했다. 여소야대 국회의 도움으로 훈장은 삭탈했다.
근보는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도 당당하게 시를 한 수 지었다.
─ 식군지식의군의(食君之食依君衣)
소지평생막유원(素志平生莫有遠)
알사고자충의재(一死固知忠義在)
현릉송백몽의의(顯陵松栢夢依依)
(임금의 밥을 먹고 옷을 입어
평소에 품은 뜻 어긴 일 없었다네
이 죽음으로 충의가 어디 있는지 알리라
현릉의 소나무와 잣나무 꿈에 어리네)
600년이면 이승에서의 감정이 저승에서 풀린 것 같아 삼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훈민정음해례에 가당치도 않은 천인지(天人地) 삼재(三才)를 정인지가 삽입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는가?”
“말릴 겨를이 없었다네. 이미 요승 신미랑 임금님이 정인지를 불러서 훈민정음 해설에 우주원리를 넣을 수 있을까? 하는 말씀에 천인지 삼재와 음양오행을 넣으면 되겠다고 하니 정인지가 알아듣고 그렇게 쓴 것을 내가 어찌 배라 하겠나?”
“자네는 황 찬에게서 통지를 얻어다 드릴 때, 칠음서(七音序) 읽지 않았는가?”
“알지. 정초가 만든 통지에 칠 음이라는 것은 서역에서 기원하였다. 하나라 때 중원으로 유입되었다. 범승이 이 음운을 가르쳐 천하에 전하고자 하여 이 칠 음을 지었다. 비록 수백 가지로 번역하였지만 멀리 일자에도 통하지 못하였다. 만물의 음성이 여기에 구비 되었다. 비록 학이 울부짖는 소리, 바람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매미가 귓가에 스치는 소리 모두 번역할 수 있다.”
통지의 이야기를 훈민정음 해례에 정인지가 넣은 것은 집현전 학자로 아주 근본적인 출처 기록도 안 하고 넣어 후학들에게 심대한 피해 입혔다. 고 보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숙주는 숙주나물 소리를 들어도 동국정운 서문에 집현전 학자들 공부 안 하는 것을 호통치는 글을 남겼네!”
“다 지난 일을 호통치면 뭐 하겠나?”
“호통의 글을 보고 후학들이 새롭게 연구하지?”
“어느 세월에 한자도 모르는 학자들이 훈민정음해례나 제대로 읽을 수 있나?”
“천년이 가기 전에 학자가 나왔어?”
“정말?”
“자네는 노량진에 사육신 묘지로 후세 학생들이 매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자네들의 충절을 주제로 백일장을 열고 있지만, 내 무덤은 의정부에 있는데 우리 후손들이 시제를 지낼 때 학자 강상원(姜相源) 후학이 나의 탄생 600주년을 맞이하여 동국정운과 훈민정음 해제를 제대로 해석해서 선물로 주었다네.”
“정말?”
“궁금하면 자네 후손들에게 현몽하여 <훈민정음해례 오류>와 <동국정운 실담어 주석>을 번잡한 음식 대신 시제 상에 올리라고 해보게?”
“강상원은 한글전용 정책에도 한문 독학하였나?”
“독학 정도가 아니야, 일본 강점기에 훈민정음 빼앗긴 설움도 맛보았고, 미국에 유학 가서 서양철학도 공부했는데,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사서삼경을 공부했고, 영어도 옥스퍼드 산스크리트 사전을 1천 독을 한 정말 보기 드문 학자일세.”
“아니, 그런데 그 강상원 후학이 숙주를 어찌 알고, 자네에게 그런 저작을 올려 올리길?”
“세상 사람들이 다들 숙주나물로 욕을 하더라도 강상원 후학이 세종임금님과 이 숙주가 조선왕조 500년에 최고의 음운학자라는 것을 알아본 걸세.”
“내가 후손들에게 현몽하여 제사상 상다리 휘어지게 음식 놓지 말라. 책 두 권을 올려라. 고 할 걸 세만 일단 강 후학 책 내용이나 대충 말해 보게?”
“강 후학 말이야, 미국 유학을 마치고 사서삼경을 읽힌 놈이 미국에서 철학 박사학위 받아서 뭣 하겠는가? 고민 중에 미국에 대학에 비치된 불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을 보니 한심하게 번역이 되어 있어서 귀국해서 불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는 거야.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스크리트어 공부 없이 불경 번역 못하겠기에 공부하다 보니 불경의 단어가 내가 만든 동국정운 음운기록이 표기가 같은 것을 발견하고 정진하여 조선시대의 동국정운 발음이 산스크리트 발음이라는 것을 알고 대대적인 저술을 펼친 것일세. 놀라운 일 아닌가?”
“놀라운 일이군.”
“나, 숙주는 자네에게 미안하고, 자네 보다 더 오래 살았으나, 오래 산 것이 수치스러웠네. 자네와 같이 죽어 충절의 사표나 될 걸 하는 후회였다. 강 후학이 동국정운을 아주 확실하게 세련되게 전 세계적으로 학문하는 대학 도서관에 모두 비치하였다네. 오늘부로 자네에 대한 열등의식을 벗기로 했다. 충절의 사표는 근보와 사육신들이 차지하고, 숙주는 조선시대 음운학자의 대표가 되기로 했다네.”
숙주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보한재길 69다. 묘지명에 그의 일대기가 있다.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병조판서(국방부 장관), 예조판서(교육부총리), 우의정, 좌의정(사회부총리), 영의정(국무총리) 등이다. 요즘 말로 대통령만 빼고 다 해본 인물이다. 신숙주와 한명회 역사는 안다. 라는 가사에 정말 안다는 것이 아니라, 변절자 신숙주를 안다는 뜻이고, 간신 한명회를 안다는 뜻이리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반만년 역사에 패자의 기록이 승자의 기록보다 선명한 것은 계유정난이다. 패배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성삼문을 포함한 사육신과 신숙주처럼 시류에 영합해 장수와 고관대작을 역임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것을 폄하, 숙주나물로 비아냥거린 것이다. 숙주가 집현전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잠든 숙주 등에 세종이 곤룡포를 덮어주었다. 새벽에- 잠이 깬 숙주는 곤룡포에 놀랐다. 세종이 보시기에 얼마나 기특했으면 자신 옷을 벗어 덮어주겠는가? 요즘 대통령실 근무자나 행정고시에 합격한 젊은 엘리트가 숙주처럼 학문 그 자체에 열정 있는 사람이 없다.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 판사라는 것들이 ‘샤르망’이라는 기생집에서 접대나 받고, 돈이 있으면 죄도 무죄가 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나라가 될 줄 나, 신숙주는 정말 몰랐다. 당신이 나를 숙주나물이라 놀릴 자격이 있어? 대답해봐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