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은 교훈이니 그냥 암기하고 지냈다. 그러다 처음 義와 不義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 국군심리전단 군수과장할 때 선상에서 고민을 했다.
국군심리전단은 이름이 내포하듯이 북한에 대한 심리전을 하는 부대였다.
가장 큰 것이 자유의 소리 방송이라는 라디오 방송과 TV방송 송출을 북한의 방식인 PAL방식으로 송출했다.
북한의 고위층이나 일반 인민할 것 없이 겨울연가, 대장금, 별에서 온 그대, 허준 등 남한에서 인기 높았던 드라마만 뉴스 보도 없이 24시간 송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거 그대로 두었다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위층들이 죄다 황색바람에 물들겠다. 김일성 수령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이 사라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대남 선전 일꾼들을 족쳐서 무조건 6.15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라고 지시했다.
일부 어설프게 아는 기자들이 현대아산을 통한 대북 송금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처럼 보도해서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그 소리할 때 전영수는 아니라고 하고 싶은 말이 목젖까지 올라온 것을 억지로 참았다.
왜냐하면 정보장교들은 전역할 때 보안서약서를 쓰고 전역한다. 현역 복무기간에 2급 비밀을 취급한 장교는 전역 이후 근무하면서 습득한 군사 비밀에 대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누설 시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음줄에 전역 일자와 서명을 한다.
문제는 그렇게 서명해서 비밀이 누설되는 것보다 고위 공무원, 장관, 대통령이 누설하는 것이 크고 문제지 소령 이하가 누설하면 얼마나 큰 비밀을 누설하겠는가? 전영수의 생각이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내려오면서 남북 대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신문 표현으로 북남대화에 한 번도 남조선이 우위에 선 적은 없었다.
항상 북에 끌려다니는 형국이었다.
딱 한번 우위에 선 것이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은 우리는 그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비난 일색으로 김정일을 연구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자 동방예의지국을 언급하면서 남과 북 북과 남의 정상 만남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나이 많은 어른이라는 것을 아는 예우를 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감동했다. 이 순간만은 바로 민족애를 느꼈고 하의도의 후배로 착각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이전의 김정일에 대한 정보는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만나지도 보지도 아니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만든다는 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정상회담에서 철거되는 줄 모르는 1월에 국군심리전단장이 군수과장 전영수소령을 불렀다.
단장의 지시사항은 대북방송 자유의 소리 방송 PAL방식으로 송출하는 TV방송장비 전광판 등에 들어가는 모든 수리부속 들을 영수증 정리는 정품 구입한 것으로 하고 실제 구입은 B품으로 사고 차액금을 비자금으로 만들어 상납하라는 것이었다.
군수과장실로 돌아온 그는 고민이 되었다.
한참 고민을 하는데 파노라마처럼 S 중학교 감나무와 카이젤 수염의 김석원 장군이 호통을 쳤다.
교훈을 잊었느냐?
그렇다. 義에 살고 義에 죽자.
전 소령은 단장실로 갔다. 단장님 지시사항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왜?
제가 졸업한 학교의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입니다. 영수증을 가짜로 정리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야 전 소령 중령 진급하기 싫어?
진급을 싫어하는 장교가 어디 있습니까?
그린데 단장 지시사항을 거부하는 거야?
예. 그렇게 불의를 행하면서 중령이 되느니 소령으로 전역해서 모교 교훈탑 앞에 당당하게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했다.
소령으로 진급 기회에 진급탈락된 전 소령은 만 45세 생일이 들어있는 다음 달 말일에 전역을 했다.
백여 통의 이력서를 썼으나 서류가 통관된 것은 정성상조 한 곳뿐이었다. 상조모집인 자격으로 충무로 에이마이너스 여행사로 안덕영을 찾아갔다.
전 소령은 설립자 김석원 장군이 가끔 조회에서 정신훈화를 하는 것을 들은 마지막 세대다. 3.15 부정 선거에 3월 17일 이 학교 학생 400여 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했다.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한 것을 노량진 경찰서에서 연행을 하고 학교장이던 김석원에게 노량진 경찰서장이 학생들 보호자로 서명하고 인도해 가라고 해서 노량진 경찰서에 갔다가 노량진 서장 오늘날의 관악경찰서장에게 학생들에게 다시는 데모 못하도록 정신교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다고 대답하고 일단 학생을 데리고 학교에 왔다. 김석원 교장은 학생 제군들은 어른들이 못한 것을 했다.
교훈 의에 살고 의에 죽자를 실천한 제군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릴 수 없으니 오늘은 각자 집으로 가서 푹 쉬고 내일부터 공부에 매진하기 바란 다는 말을 했다.
학생들이 박수를 치고 감나무 앞에서 헹가래를 쳤다.
이날 3.17 서울민주의거가 다음 달 4.19 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성남고교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