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에 서 중령과 홍남순 변호사 건으로 다툰 것이 불명예전역을 불러왔다.
광주사태시기에는 일손도 부족하고 김 반장 수사 진술조사 꾸미는 솜씨가 처녀 불알만 못 만들고 다 만들어내는 솜씨가 필요했으나 모든 것이 보안사령부에서 계획한 대로 진행된 6월 이후는 김 반장은 계륵이 되었다.
불명예 전역을 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곳을 찾았다. 전국 지도를 펼쳐 몇 군데 후보지를 선정했다. 전라북도 무주와 강원도 양구, 화천, 강림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답사를 했다.
돈이 별로 많지 않으니 한정된 돈으로 농가와 약간의 밭이 있는 땅을 구했다. 이미 땅값이 오를 만큼 올라 평당 1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은 강림뿐이고 나머지는 다 평당 30에서 50 사이였다.
지금이야 횡성군 강림면이지 30년 전에는 안흥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면 강림리였고 더 전에 일제강점기는 영월군 수주면 각림촌이었다.
강림(講林)이 된 것은 1914년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 측량을 마치고 말단 공무원이 각발음을 못해서 가꾸림으로 할까요 江林으로 할까요?
물었더니 과장급 관리가 이 천자문도 모르는 놈아 깨달을 각을 물감으로 하면 조선인 한문서당 훈장에게 천자문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 들어먹으니 그나마 覺과 뜻이 통하는 講으로 하라고 해서 강림으로 토지조사 대장에 講林이라고 기록했다.
해방이 되었다.
영월군 국회의원 엄영달보다 원주 횡성국회의원이 이우현이라고 센 형님이 나타나서 강림은 조선시대부터 원주목 소속이라고 횡성군에 편입시켰다.
편입을 조신시대 문헌을 근거로 했으면 이름도 覺林으로 해야지 조선총독부 말단측량기사가 지은 이름을 광복 78년이 지나도 그대로 쓰는 걸 보면 강원도지사, 횡성군수, 강림면장, 횡성문화원장 등은 확실한 철밥통이다.
전라도 광주 보안부대와 칠백 리 떨어진 강림은 은둔자 김영흠 반장에게는 살기 좋았으나 동원예비군 훈련이 문제였다.
원주 36사단 108 연대 동원소집이면 좋았는데 행정망이 전산화가 너무 잘되어 보안부대출신이라고 보병부대가 아닌 방첩사령부로 동원소집영장이 강림리 775번지로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