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여동생 미정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빠다.
오빠? 우리 공주가 나나 제갈 서방보다 오빠, 지 외삼촌을 더 좋아하는 거 알지?
야, 아무리 그래도 지를 낳아준 부모보다 외삼촌을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니? 공주가 마음속에 간직한 말을 너나 제갈 서방이 드러나 봤어?
오빠는 장손이라고 할아버지가 소 팔아 대학 가르쳤지만, 나나 언니는 고졸이라고 꼰대라고 하고 말을 안 해, 오빠 최대한 빨리 부산에 내려와 공주랑 말 좀 해줘요. 방문 걸어 잠그고 말을 안 해, 미치겠어 정말?
알았다.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차표는 해줘?
차표뿐이겠어요? 오빠 좋아하는 청사포에서 회 대접할게요.
알았다.
작은 여동생 제갈미정은 어려서 그림을 잘 그렸다. 횡성군에서 사생대회가 있으면 늘 은상이나 장려상을 받았다. 천경자 화백 이후 한국을 빛낼 제갈미정 화백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한글 읽을 줄 알면 시집가서 애나 잘 키우면 된다는 할아버지, 아버지 고루한 생각에 최종학력이 횡성여고였다.
우리 가족사를 소개하자면 할아버지 제갈재석은 1910년 국권피탈년 생이다. 할머니 송해령은 1911년 을해생이다. 혜령이라는 이름은 1910년대 수준으로 혁신적인 이름이었다. 거의 子로 끝나는 여자 이름이 천지인 세상에 玲은 조선땅 전체에서도 몇 안 되는 이름이었다. 할머니는 일자무식이지만 우암 송시열 후손이라는 것에 엄청 자부심이 컸다.
재석은 나이 20세에 만주로 가서 아편 장수를 따라다니며 돈을 모으고 상술을 익히고 최소한의 중국어와 만주어 소련어 일본어를 아편을 주고 돈을 받고 거스럼돈을 내줄 수 있는 정도의 말을 익힌 후에는 직접 아편 장사에 뛰어들었다. 요즘도 유명 연예인과 재벌 3세들이 마약으로 잡혀가는 것이 뉴스로 나온다. 걸리는 것이 문제지 안 걸리면 돈을 가장 쉽게 많이 버는 것이 그 시절 아편 장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