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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와 영회감독

by 함문평

역사학자 200명이 40년 동안 못한 일을 한 영화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이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이백만 관객들 동원한 흥행으로 우리나라 영화사를 다시 썼다.


김 감독은 문과반 출신이고 집이 한남동인 고3이고 난 이과반 출신이고 지금 중앙대 교수연구실이 된 곳에 단층주택에 방하나 전세 얻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공부한 고3이었다.


김 감독은 한남동에서 1979년 12월 12일 총소리를 들었고 장갑차도 구경했다.


그 시간이 좀 지나 종로 2 가서 흑석동 오는 84번 버스가 서울역서 더 이상 진행을 못해 하차해서 용산 찍고 한강다리 건너 흑석동에 오니 자정애 넘었다.


귀가시간이 되어도 장손이 안 온다고 조부모는 84번 종점에서 떨고 계셨다. 그날의 시울역서 흑석동 행군으로 군생활 21년 3개월 행군은 낙오 없이 했다.


영화 서울의 봄이 군사반란을 군사반란이라고 논문에 쓰지 못한 심약한 역사학도들에게 자신 있게 논문에 쓸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영화의 흥행 밖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12.12와 5.18 진압이 구국의 결단이라고 유투버에 떠드는 이순자와 이학봉이 있는 한 군사반란은 처단이 안 된 것이다.


국가기관이 할 수 있으면 군사반란으로 얻은 부의 축적은 환수 국고에 귀속하는 냉엄한 맛을 보여야 더 오래 전의 일본의 정신대나 징용에 대한 사과를 받을 수 있지 자국의 군사반란도 처단 못하는 나라에 일본이 사과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김성수 감독이 현대사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쓰고 싶어도 아직 살아있는 5 공의 실세의 위압 때문에 눈치 보던 것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현재 박사 논문 쓰는 현대사 쥔공자들에게는 좋은 길을 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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