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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서> 쓰게 된 이야기

by 함문평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2.12군사반란일에 서울역에서 흑석동까지 걸어갔다.


속으로 열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만 욕을 했지 누구 하나 내뱉지 못하고 묵언수행으로 걷기만 했다.


그해 전기 후기 대학에 다 낙방해서 할아버지가 횡성 고향집에 키우던 소 3마리를 팔아 재수비용을 해주셨다.


할아버지 소를 생각하면 꾹 참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학원 강사 강의가 다 아는 것 같고 시시해서 여름날에 땡땡이를 쳤다.


지금은 중대부고와 부여고가 남녀공학으로 도곡동에 있지만 그 시절은 남고는 84번 종점에 있었고 부여고는 연못시장길을 돌아 언덕길을 한참 올라간 곳에 있었다.


우리 남학생들은 부여고 출신과 가능하면 결혼하지 말자고 했다. 이유는 언덕길을 오르느라 여학생 다리가 굵어져서 예쁜 다리가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유지인 뿐이라고 했다.


학원을 수업 빠지고 달마사를 올랐다. 중간쯤에서 중년 부부가 바위에 신문지를 깔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젊은이~하고 불러서 갔다.


막걸리 한잔을 주어 마셨다.


고맙습니다 하고 예의상 한잔 드렸다. 그 부부의 첫마디가 젊은이는 <정의사회 구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저는 재수생이고 더구나 이과반 출신이라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직 할아버지가 횡성 고향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 재수비용 주셨기에 공부 잘해 명문대학교 공대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분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미국에서 귀국하는 장인 장모 모시러 김포공항 가느라 궐기대회 불참했는데 그런 사정 고려도 없이 불참자라고 해직되었다고 했다.


한심한 놈들이 100일 동안 무슨 업적이 있다고 박정희 대통령 살아생전에 꼭 1년을 마감하는 <행정백서>를 발행했는데 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백일에 무슨 국가발전을 시켰다고 백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명문대학에 떨어지고 그해 대학생이 안 되면 논산훈련소 소집이라 이과지만 문과로 지원해 국어교육과 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으나 심오한 교수님 강의는 없고 매일 데모로 해가 뜨고 최루탄 눈물로 해가 졌다. 시험 대신 전 과목이 리포트로 학점이 부여되었다.


글 때리는 것은 과제물 작성 원조는 나인데 원조 학점은 B이고 보고 베낀 여학생 채란이, 미숙이, 경숙이는 A플러스였다. 화가 나서 교수님을 찾아가 따졌더니 채점 답안을 보여주면서 깔끔한 여학생들의 답안과 나의 기러기 비행체의 답안을 보여주면서 함 군이 교수라면 어느 답지에 A 주겠냐? 더구나 문교부에서 졸업정원제라고 학점을 구간별 인원을 정했는데라고 하셨다.


어차피 학점 잘 받기는 틀린 것을 알고 과제하고 남는 시간에 <백서>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낙선만 했다.


60에 등단을 하고 62세에 책으로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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