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 38호

오늘 이전의 관주는 잊어라

by 함문평

브런치스토리에 오늘 이전 광주는 잊어라라는 연속 이야기를 썼더니 두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런 신문에 보도도 안된 이야기를 자네가 소설가라고 근거 없이 써도 되냐? 항의하는 것이었다.


재수 없이 초등학교 6년 마치고 뺑뺑이로 선택된 S중학교까지 9년도 지겨운데 또 뺑뺑이로 간 흑석동고등학교까지 12년을 같이 다녔다.


하지만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어디서 내가 작가가 되었다니까 내가 등단한 현대시선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정보통신보호법상 알려줄 수 없다니까 거꾸로 출판사에 자기 연락처를 주고 초, 중, 고 12년 동창이라고 꼭 알려달라고 하는데 함 작가 어떻게 하죠? 해서 알려주세요 했더니 밤 11시 59분에 전화가 왔다.


생전 처음 보는 전화는 보이스 피싱이거나 보험 가입 상조 가입 전화라는 거 알기에 안 받았더니 문자가 왔다.


함문평 작가 되었다고 문자 전화 씹지 말고 좀 받아라 나 박 XX야 했다.


또 한 사람은 페이스북에서 친구 걸어온 것을 거절했더니 역시 출판사로 항의 문자가 왔다.

두 인간 다 나를 의심했다.


함 작가 당신이 오늘 이전 광주는 잊어라 속 이야기에 대해 책임질 수 있냐?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글을 쓰기는 지금 쓰지만 초안은 이미 30년 전에 한 것이다.


망원 37호 이전에 우리 할아버지 가경취숙 어른이 전두환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장손에게 거짓말이면 메모만 했다가 당신이 돌아가시고 30년이 되면 그때 글로 정서해서 올리라고 하셨다.


전두환과 가경취숙 어른과는 1964년 진해 육군대학 정규과정 학생장교였다.


지금이야 육군대학 입교장교가 있으면 사전에 후임자를 보충하고 육군대학에 입교시키지만 1964년 육군대학은 정규과정과 3개월 과정의 단기과정 육군대학 두 종류를 운영했다.


1년 과정 정규육군대학은 선발부터 엄격했다. 영관장교의 집체교육이 1년이라면 학과 과목이나 시간에 있어서 일반 대학의 석사과정 2년보다 오히려 공부량이 많은 편이었다.


1963년 선발기준을 보면 전체 영관장교 가운데 근무성적 상위자와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성적까지 조회하여 최우수자 중에서 두 번의 심사를 거쳐 100명을 선발하고 50명씩 반편성을 했다.


가경취숙과 전두환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가경취숙은 그 반의 반장 격인 대표 학생장교가 되었다. 그는 중령이라 계급도 전두환 보다 상급자였다. 나이는 전두환이 두 살 위였다.


가경취숙은 육사를 다니다 중퇴를 하였지만 육사 선배임을 강조했고 전두환은 졸업 못한 선배가 무슨 선배냐고 11기인 자기들이 4년제 육사 효시임을 내세웠다.


1년 육군대학 정기과정 기간에 사사건건 둘의 충돌은 계속되었으나 가경취숙이 늘 전두환을 압도했다.


다투기는 했으나 극한까지는 안 갔는데 졸업을 앞두고 실시하는 함안 종합야외훈련장에서 일이 터졌다. 실습이 끝나고 교수부장 백두산 대령이 초청하는 학생대표 만찬장에서 뉴스가 터졌다.


보안사령부 전신인 육군방첩부대장에 박영석 장군에서 윤필용 장군으로 교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박 장군은 가경취숙 고종사촌 형님이라 흥분된 어조로 정치군인이 방첩대를 접수하는군? 하자 전두환 소령이 가경 중령에게 대들었다.


전두환 소령은 학생대표 자격이 없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총애한다는 말에 백두산 교수부장이 특별히 초대한 것이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을 교수부장 백 대령이 수습했다. 전두환은 가경취숙에게 사과하려고 여러 번 접근을 시도했으나 그는 외면했다.


그 후 전두환이 장군이 되어 총애를 받으며 위세를 떨쳐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육군의 상층부 장군들은 별 하나 준장 전두환이 상급부대에 방문하면 별 넷 별 셋이 헬기장까지 마중 나왔다. 그것을 본 대령 이하 장교들이 황태자라고 불렀다. 전두환은 가경취숙을 껄끄럽게 보면서도 그의 경력과업적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척은 했지만 내심 늘 가경취숙의 박식함에 질시와 경계를 헜다.


육군대학을 졸업 후 전두환은 베트남전에 참전했지. 가경취숙도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많이 받았다.


이때 훈장을 많이 받은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소위로 북한군 포로가 되어 인민군 10 사단장 전문섭이 해방군관이라고 전선 시찰에 동행시킨 것이 월남전에서 역으로 공산군 전술 게릴라 전술 또는 빨치산 전술이라 부르는 소규모 별동부대 전술을 관했기에 밀림 속에서 베트콩을 귀신처럼 찾아내고 섬멸하고 훈장을 받은 것을 그런 경험이 없는 여타 장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월남전에서 철수히여 전두환도 가경취숙도 새로 부대를 배치받았다. 거기서 전두환은 술만 마시면 지기도 월남전 참전유공자인데 가경취숙은 웬 놈의 무공훈장이 그렇게 많냐고 투덜거렸다.

가경취숙이 잠시 전두환 보다 잘 나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육군본부 인사운영 감실 대령과장 시절이었다.


연말 장군진급 심사가 열리면 이변이 없는 한 진급이 되는 대령과장이고 전두환은 심사에 들어가려면 2년 있어야 했다.


전두환이 식시대 접을 하겠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엄청난 요정집이었다. 시중드는 여지들이 거의 영화배우 수준이었다. 가경취숙 생애에 가장 호화롭고 비싼 음식집이었다.


정황을 봐서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시중드는 여자들이 음식을 가지러 나간 틈을 이용해 훈계를 하고 요정을 나왔다.


훈계 내용은 국가의 녹으로 살아가는 군인이 요정에서 식 시를 하는 걸 국민이 안다면 세금 낸 것을 억울해할 것이다. 일반회사는 월급이라 부르고 군인의 급여는 봉급이라 부르는데 봉이 세금에서 나간다는 뜻이라고 일러주고 나왔다.


장군에 이변이 없는 한 진급한다는 대령과장이 진급이 안되었다. 한직으로 물러나 대령 전역해서 고향에서 글이나 쓰고 죽어야지 하는데 장군이 되었다.


준장인 상태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 되었다. 12.12군 시반란과 5.18 진압유공자에게 무공훈장수여 준비를 하라기에 훈장은 적에게 무공을 세운 군인에게 주는 것이지 광주시민에게 총을 겨누고 공식 지휘절차도 아니고 최규하 대통령 재가도 없이 먼저체포하고 사후 강압으로 결재한 이에 무공훈장을 주면 역대 무공훈장이 눈물을 흘릴 것이고 무공훈장이 객지에 나와 고생이 많다고 하기 전에 나의 월남전 참전 무공훈장을 반납하겠노라고 이고 전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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