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영화

헝거게임

by 로이아빠

방 안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그냥 저냥 뭘 할까, 고민을 하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네이버에 영화를 검색해서 무엇을 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헝거게임이 눈에 띄었다. 사실 1,2편만 보고 3,4편이 나오도록 보지 않고 있었다. 1,2편이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고 뭔가 계속 떡밥만 뿌리고 아무런 진전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3,4편을 다운받아 보기 시작했다.

불을 다 끄고 닭강정도 사다 옆에 두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감독의 연출에 감탄했고 주인공의 연기에 감탄했다. 1편과 2편은 정말 본격적인 이야기를 위한 설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히 말하자면 극단적 지배관계이다.

부르주아(성 안 사람들)의 삶과 나머지 90퍼센트의 사람들의 삶으로 나뉜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의 노동력은 착취당하고 부르주아의 삶을 더욱 살찌우는데 이용된다. 10퍼센트의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 전부를 노예로 만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군사적인 힘으로 공포를 이용해 그들을 통제한다. 그 와중에 주인공이 혁명의 얼굴이 되어 모두가 규합하고 대응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게 모든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 혁명의 상징인 주인공을 마케팅한다. 언론을 통해서. 그 와중에 각 반대 세력에서 서로 펼치는 언론전쟁은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영화의 모티브는 매우 고전적이다. 과거 비 민주적인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짧게 영화에 담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혁명이라는 것은 살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만약 영화속에서 지배계급과 피 지배계급이 나뉘어져 있다고 해도 피 지배계급이 살 만 했으면 혁명이 과연 일어났을까. 적절한 공포와 적절한 식량만 주어졌다면 그들은 결코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공포가 필수적인데 만일 살 만한 세상인데 아무런 제제의 수단이 없다면 더 잘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혁명은 또 일어날 것이 자명하다. 분명한 것은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단지 옆에 사람이 아닌 모두가 당장 죽을 위협을 느낄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무리 공포정치를 한다 한들 죽음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 졌을때 영화속 주인공과 같은 상징은 그들에게 적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며 혁명의 당위성과 정의성을 증명한다. 모든 혁명에는 명분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상당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혁명의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혁명의 상징인 주인공은 개인이라는 개념이 살아진 채 공공재가 되어버렸다. 혁명의 불을 당기기 위한 상품이자 마케팅 수단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순간 그것을 어찌 민주주의라 부를까. 심지어 민주주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피 지배계급들은 적대세력의 지도부와 수뇌부를 장악하고도 지배계급의 시민들을 죽이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특히 혁명을 이끄는 측에서도 수뇌부들은 있기 마련인데 그들은 혁명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볼때 혁명측 수뇌부와 부르주아 측 수뇌부들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혁명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비 민주적인 수단과 방법들이 이용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일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을 성공한 자들이 그대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맞나. 진정한 혁명의 완성이란 혁명이 끝나고 나서 주측을 담당했던 모든 인사들을 정치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그런 적이 있었던가. 혁명의 주체자들은 혁명 그 이후의 세상에서도 지배 계급으로 남았다. 혁명으로 인해 혼란한 세상을 안정시킨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권력을 맘껏 누린다. 하긴, 누구보다 자신들이 가장 중요한 일을 담당했고 자신들이 없었으면 혁명이 실패했을 것이라 생각하면 보상심리가 따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역사는 돌고 도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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