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산다.
탁!
조감독의 슬레이트는 어김없이 막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에 집중한다. 막이 오른 바로 이 순간, 그 이전 까지의 모습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주어진 상황에 맞게 설정된 나의 모습만이 전면에 부각된다. 이번 연기는 오후 6시까지. 오후 6시가 지난 뒤에 나는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인다. 뭐가 그리도 웃기고 즐거울까. 그들의 웃음은 허공에서 맴돌았다. 웃음이 만들어내는 울림은 무대의 화려함과 작위성을 드러내고 허무만을 남겼다. 나는 무대에 서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웃는다. 모든 상황은 짜여진 각본대로 지나갔다.
컷!
슬레이트의 소리와 함께 이번 역할도 끝이 났다. 허공에 맴돌던 웃음소리는 슬레이트에 토막났다. 토막난 웃음은 비틀리고 아닌 웃음이 되었다.
'이봐요 A씨.'
나는 적잔히 당황했다. 분명 이번 역할은 끝이났는데도 나는 'A'라는 역할속 인물로 불렸다. 하지만 나는 프로다. 이 무대에서 수십년을 숨 쉬어온 사람이다. 이미 수많은 역할은 연기했었고 언제든지 특정한 '나'를 연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물론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은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정한 '남'을 연기한다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두 명의 배우가 같은 역할을 연기한다 한들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내가 A, B, C, D, E, F, G를 연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배우는 1, 2, 3, 4, 5, 6, 7을 연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A'는 웃어야 한다. 그런 역할이니까.
'무슨 일이시죠?'
나를 부른 사람은 방금전 같은 무대에서 연기했던 '모'씨다. 분명 '모'씨는 위트있고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그를 찾아갈 지언정 그가 찾아간다는 것은 그의 배역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가 나를 찾아온 순간 무대가 바뀌었음을 알았다.
탁!
'A'씨 제가 사실 털어놓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털어 놓을수 없지만 'A'씨 에게만은 털어놓을수 있을것 같거든요. 사실 저는 지금 무척이나 힘든 상황입니다.
숨을 몰아쉬며 상기된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는 '모'씨는 몹시 흥분한 듯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어차피 무대는 바뀐 마당이었다. 이 판국에 'A'씨가 있을리 만무하다.
'모'씨 진정하고 내말 잘 들으세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지만 더이상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몹시 피곤하고 짜증나거든요.
'모'씨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대가 바뀌었으니 '모'씨도 '무'씨쯤 되려나.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 문앞에 서서 열쇠구멍에 열쇠를 집어넣고 돌렸다. 금속의 마찰음이 거슬렸다. 열린 문으로 보인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들어서고 나면 아늑했다. 적어도 이 곳에서는 슬레이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곳에서는 A일 필요도 B일 필요도 C일 필요도 없었으니까. 천장의 백열등은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스위치를 켜차 타다닥 커리는 소리와 함께 점멸했다. 어느 순간 점멸을 멈춘 백열등은 불이 한번에 들어왔다. 부신 눈을 감을수 밖에 없었다. 어두컴컴함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지만 이내 하얀 점들이 떠올랐다. 그 점들은 서서히 커지는 듯 싶더니 사라지고 다시 생기기를 반복했다. 점들은 점점 더 잘게 부서지며 자주 부서졌다. 나는 눈이 부셔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마주한 것은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다. 무표정하고 무심한 내 얼굴은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슬레이트 소리가 들렸다.
탁!
앤디워홀의 마를린 먼로는 전부 다른 표정이다. 그의 작품은 숭고미가 느껴지는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다분히 키티적이다. 우리의 마음 또한 현대에 이르러 키티화되지 않았을까. 무엇이 진심인지도 모른채 상황에 맞게 복사해내는 감정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