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 천재의 전기 -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전설적인 수학 교사인 라슬로 라츠였는데, 부다페스트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노이만을 몇 번 대면한 후 자신을 능가할 천재임을 간파한 라츠는 부친 믹사를 만난 자리에서 부다페스트 대학교에 노이만을 위한 특별 교과과정을 개설하여 자신이 직접 강의하겠다고 제안했다.
1910년에 노이만의 아버지 믹사는 유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최악의 상태에 대비하기 위해 세 아들에게 각별한 교육을 실시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헝가리의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집에서 교과과정과 외국어를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일부 사회적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개인의 성취 동기를 극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유태인에게 관대했던 헝가리의 분위기가 하룻밤 사이에 바뀔 수도 있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직업공무원법'을 제정하여 유태인과 공산주의 추종자들을 모든 직장에서 쫓아냈는데, 독일 공무원 중 이 조치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5%에 불과했지만 각 대학교의 물리학과 수학과는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물리학자의 15%, 수학자 18.7%가 졸지에 대학에서 쫓겨났고, 개중에는 하룻밤 사이에 교수의 절반이 해고된 대학도 있었다. 이때 쫓겨난 학자들 중 20명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을 사람들이었고, 이들 중 16명이 유태인이었다
1930년 10월 말에 위그너는 프린스턴 대학교로부터 단기 강사직을 제안받았는 데, 처음 전보를 받고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프린스턴에서 제안 한 급여가 베를린에서 받던 급여의 7배가 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식 직함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교수였지만 국방부와 CIA, 그리고 싱크탱크의 대명사인 RAND 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