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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Nov 14. 2019

솔직히 말할께요, 닥치고 좀 들으세요

정치학자의 반지성주의 분석 : 「전문가와 강적들」, 톰 니콜스

이 글은 사회과학 서적인 「전문가와 강적들」을 읽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 글의 구성

<1> 공부만 한 놈들이 뭘 알아?
<2> 「전문가와 강적들」
<3> 일반인의 변론
<4> 총평


1. 공부만 한 놈들이 뭘 알아?


“공부만 한 놈은 현실을 모른다”

어릴 때 들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 한 문장은 특정한 세계관을 내포한다. '공부만 많이 한 전문가들의 말/지식이 현실 세계에 쓸모없다'라는 것.


‘안아키’를 들어본 적 있을 거다. '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준말인 안아키. 극단적인 자연주의 육아 방식의 장점과 필요성을 말한다. 아토피는 긁게 놔두고, 화상에는 되려 온찜질을 권한다. 아이들에 대한 예방접종도 부정한다. 안아키의 주창자는 '마음 같아서는 전 국민, 특히 여자아이들이 수두 파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커뮤니티의 회원이 한때 6만명 가량 됐다(’17.5). 대한의사협회,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보건복지부 등 전문가들이 위험성을 지적했음에도, 안아키 방식을 고집하는 부모가 있었다. 공인된 전문가 집단의 의견은 무시됐다. 항생제만 주구장창 처방하는 '의사와 정부'는 믿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세계관 이었을터.


사회 현상의 해석에 있어서도, '전문가의 의견'은 개똥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 지지자들의 흥미로운 주장을 살펴보자.


'조선은 일본에 편입되고 나서야 보편적인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주장.


김낙년(2016, 낙성대연구소)


 그래프는 각급 학교 취학률이다.


한국계량경제학회장, 한국금융학회장, 한국경제학회을 역임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의 조장옥 교수. 그는 「거시경제학의 눈으로 본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논문에서 "식민시기 초등학교 취학률은 1940년 35% 정도까지 근접"했지만, "중학교(고등학교 포함)와 대학 취학률은 매우 낮았다"라고 언급한다.


그는 "식민지 초등교육은.. 취학률이 35% 가량으로 세 명 가운데 한 명만이 받을 수 있는 선민교육"이라고 말하며 "선민 교육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으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혹자는 '경제학 교수'가 역사를 말할 자격 묻겠으나, '식민지 근대화론'의 선구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다)


조장옥 교수의 주장대로 세 명 가운데 한 명만이 학교를, 그것도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회 교육이 보편화된 사회로 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식민 지배가 없었고, 우리 민족이 스스로 통치하는 나라가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같은 기간 일본의 초등학교 입학률은 100%였다. 아래 그래프 참고)


Human Capital in the long run(Lee and Lee,ournal of Development Economics, 2016)



한 가지 확실한건, '식민지 근대론'을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이 연구결과/통계는 씨알도 안 먹힐거라는 거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점을 짚어냄에도, 계속 믿는 사람이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걸까?


미국 사회에 혹독한 비판을 가하는 엘리트 교수 한 명이 있다. 국제정치학자인 톰 니콜스. 그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를, 조지타운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이후 다트머스대학/조지타운 대학/하버드 대학에서 근무한 후, 미국 해군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전문가와 강적들」이라는 책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미국인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암담한 심정'이란다. 책에다 이정도 썼으니, 맥주 한잔 마시면 '미국놈들 진짜 더럽게 멍청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직접적이고 자신감있게 말하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그게 무식한 소리가 아니라면. 이 책이 딱 그런 책이다. '지성'을 거부하는 '암담할 정도로 멍청한 미국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반지성주의'와 '전문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2. 「전문가와 강적들」


<1> 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잘못된 사고가 확산됐다고 말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건 맞다. 하지만 'A라는 사람의 지적 능력과 B라는 사람의 지적 능력이 무조건 평등하다는 건 잘못된 사고'다.


사람간의 평등과 지식/의견간의 평등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는 모두의 지식/의견이 평등하다는 착각이 퍼져있다는 거다.


국제정치에 관해서 일반인은 학자에게 '배워야'하는 입장이지 '논쟁'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음에도, '당신과 의견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전문 지식과 전문가'를 무시해버린다는 거다. 북핵 문제에 관해서, 국제정치학 교수와 일베 유저의 의견 절대 평등할 수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2> 왜 이럴까?(1) : 학교와 인터넷


저자는 주 원인으로 '교육의 질 저하'를 꼽는다. 학사 학위는 요즘 '똑똑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대학교는 등록금 충당을 위해 자질이 안되는 학생 최대한 받는다. 학사 관리, 학점 관리도 느슨하다. 2012년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많이 줬던 학점은 A다. 학생들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상승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똑똑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잘못된 평등 의식을 토대로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과 나는 의견 차이만 있을 뿐이에요.' 고등 교육은 모두가 같은 정도로 똑똑하다는 잘못된 믿음을 고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 교육은 모두가 똑똑하다고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 배우려는 학생이 아닌 소비자가 된 요즘 대학생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대학이 부던히 노력한 결과, 이런 부작용이 생겼다.


인터넷도 문제다. 무엇이든 올릴 수 있는 인터넷. 나쁜 정보와 설익은 생각들이 넘쳐난다. (내 글도 혹시?) 인터넷에서 '구글링' 몇시간 해서 관련 정보를 습득한 후, 전문가를 무시하고 반박하는 행태가 자리잡았다.


게다가 인터넷은 '본인이 듣고싶고 보고싶은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에, 편향되고 멍청한 생각은 커져만 간다. 저자는 재치있게 말한다. "일반인과의 토론에서 '저도 조사를 좀 해봤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보다 더 심란한 순간은 없다"고.

  

이런 느낌 아닐까



<3> 왜 이럴까?(2) : 언론과 전문가


언론도 문제다. 우리나라처럼, 미국도 언론사간 경쟁이 치열한 듯하다. 저자는 이 상황이 “언론들로 하여금 더 단순하고 빠르고 깔끔하고 오락적 재미가 더 있기를 원하는, 미국 소비자들의 욕구”를 따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깊이 있고 현학적인 '전문 지식'보다, 소화하기 쉬운 단편적/단발성 지식만 넘쳐난다.


게다가 소비자들이 '원하는 뉴스'제공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언론의 당파성/편향성은 커져간다. 팍스 뉴스는 보수적인 시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보수적/극우적 기사만 하루종일 내보낸다. '게이트 키핑', '객관성'은 사라진지 오래다. 가십성 정보, 편향된 정보만 넘쳐날 뿐,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는 파묻힌다. 사회는 무식해진다.


전문가도 책임이 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설명이다. 예측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간 전문가는 본인의 능력 밖에 있는 미래 예측을 너무 많이 했고, 너무 많이 틀렸다. 이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전문가와 전문 지식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또 전문가가 과도한 자신감을 토대로, '자신의 전문지식 분야를 훨씬 벗어난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자신있게 의견을 표명하는 상황'도 문제다. 저자는 MIT 언어학 교수인 노엄 촘스키를 예로 들며, 언어학 전공자인 그가 정치/외교에 관한 많은 글을 써낼 전문 지식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전문가의 설익은 미래 예측과 사회 분석이 꾸준히 오답으로 판명남에 따라, 전문가와 전문지식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말한다.


<4> 전문가와 민주주의


전문가와 전문지식의 죽음이 과연 왜 문제인가?


저자는 전문가와 전문 지식이 무시당하고 경멸당할 때,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전문가 직접적으로 사회적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사회적 의사결정은 선출직 공무원, 즉 정치인들이 한다. 대통령, 국회의원.


사회의 다수가 전문가와 전문 지식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견해를 고집한다고 치자. 그리고 여기에 영합하는 자가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올라간다고 치자. 이렇게 되면 문제투성이의 정책넘쳐날 수 밖에 없다.


사회의 다수가 '안아키'를 지지하고, 이에 영합하는 정치인이 당선되어서 예방 접종 금지를 정책으로 결정한다면, 이건 문제다. 타락한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전문성이 없는 민주주의는, 갈 길을 잃틀거리 모든걸 부셔버리는 진격의 거인이다.


저자는 미국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암담한 심정"이라고 말한다.




3. 일반인의 변론


<1> 그래서 뭐가 맞냐고?


나는 일반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취득한 학사 학위는 아직도 따끈따끈하고 , 직장 경력도 그다지 길지 않다. 배울게 아직도 많다.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배움'은 곧잘 '혼란'으로 변한다.


스타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불평등이 잠시 완화됐다가, 70/80년대부터 글로벌 차원의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케이, 「21세기 자본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그가 사용한 방법론을 문제 삼는 경제학자가 나온다. 대체탄력성에 대한 논의다. 자본-노동이 얼마나 쉽게 대체될 수 있느냐에 대해 피케티는 1보다 크다고 보는 반면, 하버드대학교의 경제학자인 로렌스 서머스(오바마 정부 국민경제회의 의장)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둘 다 엘리트 경제학자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나?


우리나라를 돌아볼까? '최저임금제'와 '주 52시간제'가 화두다. 일군의 경제학자들각자 다른 주장을 한다. A 경제학자는 "최저임금 상승과 주 52시간은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한편, B 경제학자는 동일한 정책이 "단기적으로도 성장을 저해하고 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이 상황에서 일반인은 무엇을 믿어야 할까?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에 찬성하니/반대하니라는 질문을 받는 상황이 오면, 합리적인 일반인은 도대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생각보다 꽤 많은 이슈에서, 전문가들끼리합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사회적인 이슈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상반되는 전문 지식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때 일반인은 무엇을 믿어야 할까?


<2> 학문은 중립적인가?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사회학 거장이 있다. 그는 과학자들의 학문 사회를 분석한다.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학문 사회는 일견 합리적/객관적으로 보인다. 숫자/통계/이론을 가지고 싸운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과학자들의 사회는 다른 모든 것과 사회적 장과 마찬가지로 세력간의 경쟁적 투쟁의 공간'이고, '모든 과학자가 다른 이들에게도 중요하다고 인정받을 만한 연구를 하기를 원한다'라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독립적인 연구자로 보이는 과학자 조차도 그가 속한 학문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극단적 예시지만, 다수의 과학자가 우주가 돈다고 이야기할 때 지구가 돈다고 이야기했던 과학자는 미친놈으로 취급받았다.


자명한 진리임에도 학문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학문 사회는 '편향적'일 수 있다. 그 구조에 속한 전문가도 '편향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편향성은 지속될 수 있다.


그간 주류 경제학은 '신고전파' 경제학에 편향됐다고 비판받아 왔다. 경제 전문가는 대부분 '신고전파' 경제학 전공자였다. 그리고 그 전문가들이 '신고전파' 정책을 적극 처방한 결과, 세계적인 차원에서 중산층은 감소했고 빈부격차는 확산됐다.


미국 중심부에서 일어난 Occupy Wall Street 운동


이 상황에서 미국의 백인-하층 노동자들은, 과연 월스트리트나 아이비 리그의 경제학 교수들의 전문성과 전문 지식, 즉 경제 처방을 어떻게 생각할까?


전문 지식은 마냥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다. 특정 계급/인종/성별에 편향적일 수 있다.



<3> 그럼에도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이 유효한 건, 민주주의는 '배우려고 하는 개인'이 얼마나 많은 지에 따라 그 수준이 결정된다는 거다. 유태인이 독일을 망친다는 잘못된 사회 분석을 내린 히틀러와 나치. 그들을 지도자로 치켜세운 독일은 대가를 치렀다. 우리 국민은? 좀 다르다. 우리는 피와 땀을 흘려가며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다.


우리는 '멍청한 미국인'보다 낫지 않을까? 특히 엘리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은,'사농공상'의 정신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찾기가 꽤 어렵다.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옆 나라를 보면 확실히 느낀다. 아빠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나라. 자민당의 나라보다는 낫다.


전문가와 언론이 좀 노력했으면 좋겠다. 깊이 있는 경제, 철학, 과학 다큐 채널이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지금의 시사토론 좀 바꿨으면 좋겠다. 지금의 시사토론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평론가'라 불리는 제너럴리스트가 많이 나온다. 법학을 전공한 군법무관 출신이 경제를 논하고, 미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이 정치 비평을 한다. 좋다, 뭐 좋은데...


한 평생 그 분야를 연구한 사람들이 그들의 '연구'를 놓고 '과학적으로' 다투는 시사토론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고전파 경제학와 케인즈주의 경제학, 맑스주의 경제학가 한시간 정도 계속 다투는 거다. 사회자는 그들이 다투는 지점을 끊임없이 시청자에게 안내해주고.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 정도되면 그 정도의 깊이프로그램도 잘 먹힐 것 같은데.


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한 논문을 쓰고 뛰어난 책을 써도,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씨알도 잘 안 먹힌다. 그들끼리만 볼 거다. 좀 친절하게, 일반인들에게 다가와줄 수는 없을까?




4. 총평


글쓴이의 분노와 문제의식이 읽혀진다. 트럼프 선출로 그의 분노가 정점을 찍은 것 같다. 근데 어쩌나, 트럼프를 만든건 기존의 경제 전문가와 그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한 선출직 공무원들이었는걸.


어쨌든, 직설적이고 가차없는 현실 분석이 참 재밌다. 큭큭 대면서 읽을 수 있다. 책은 직접 읽어봐야 그 깊이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약간의 엘리트주의를 느낄 수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과거 교육부 고위공무원의 밑도 끝도 없는 "개돼지론"과는 좀 다르다. 그건 사람 사이의 우열을 말하지만, 이건 지식 사이의 우열을 말한다.


어쨌든 나는 쪼렙이다. 앞으로도 닥치고 배워야겠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행복이 정답이다'같은 당연한 문장도 헷갈린다. 행복이 뭐지? 측정가능한가? 정답이 뭐지? 정답이라는게 있나? 아직 공부의 깊이가 얕아서일까.


석사/박사 학위 욕심이 계속 생긴다. 스스로 연구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다. 요즘 읽는 책 중 하나는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이다. 유종성이라는 학자가 썼는데, 나이 50살에 하버드 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정도까지 늦추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내년에 복직하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도 계속해야겠다. 내 분야에서 만큼은 확실한 전문성을 쌓고 싶다.


그리고 젠체하지 않고, 지식을 쉽게, 그렇지만 충실하게 전달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고 싶다. 재밌는 책이었다.


[참고문헌]     

거시경제학의 눈으로 본 식민지 근대화론 - 조장옥(한국경제학회/’17)

피케티 현상,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 이정우(한국경제학회/’14)

부르디외의 과학사회학 : ‘과학장의’의 생성과 구조 - 김환석(경제와사회/’02)

"전국민 수두파티하고 싶다"..'안아키' 김효진 한의사 - 중앙일보(’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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