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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Dec 06. 2019

유학 갔다오는게 그렇게 중요해?

사회학자의 한국 엘리트 분석 : 「지배받는 지배자」, 김종영

사회학 서적인 「지배받는 지배자」를 읽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 책은 학계와 글로벌 기업에게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미국 유학파'를 분석합니다.

■ 글의 구성

<1> 교과서에서 한국 이름을 못 봤다
<2> 「지배받는 지배자」
<3> 그래서, 미국 박사가 얼마나 잘나가는데
<4> 내가 마주하는 지식이 객관적이라고?
<5> 결론


1. 교과서에서 한국 이름을 못 봤다


나는 문과생이다. 학부 시절에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철학, 역사학에 흠뻑 빠졌었다. 이 애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 과학, 기술에 대한 관심이 추가되긴 했다.


특히 경제학 공부가 재밌었다. 나에게 경제학은 풍족한 사회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이었다. 잘 모를수록 감흥도 빠른 법이다.


경제학 입문서는 '맨큐의 경제학'이었다. 미국 교수가 썼다. 좀 공부 해보니, 큼직한 경제 이론은 대부분 '영어 이름'을 가진 학자들이 만들어냈다는걸 발견했다. 아담 스미스, 케인즈, 사전트, 프리드먼, 솔로우 등등. 의문이 들었다. 왜 죄다 영어 이름일까?


경제학만이 아니었다. 정치학, 사회학, 철학 등 다른 전공에도 흥미를 느꼈기에 책을 꽤나 봤다. 그런데, 많이 인용되는 이론가들은 죄다 영어, 독일어 혹은 프랑스어 이름이었다.


사회학의 막스 베버, 피에르 부르디외, 앤서니 기든스, 미셸 푸코. 정치학의 한나 아렌트, 로버트 퍼트넘, 세이무어 마틴 립셋, 케네스 월츠. 철학의 데리다, 칸트, 니체. 셀 수 없이 많은 외국 이름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재밌고 가슴 뛰었다.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탐험가의 느낌이랄까. 책을 꽤 많이 봤다. 텅빈 머리를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비어있던 머리에 뭐가 채워져있나, 한번 봤더니 거의 다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지식이었다.


왜 그럴까?


사회학자 김종영의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는 이 질문에 어느정도 답해준다. 왜 내 머리속 지식의 원저작자들은 외국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이 책은 미국 유학파를 분석한다. 미국 유학의 의미와 영향력을 살펴보고, 유학파들이 학계와 글로벌 기업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게 되는 과정을 확인한다.





이 책 한권은 15년 연구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십 몇년간 미국 유학생들의 인생 경로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연구는 일종의 엘리트 연구인데 그 대상은 한국에서 가장 똑똑한 교육·문화엘리트다"


날 채우고 있는 지식을 수입해오고, 날 가르친 엘리트들에 대한 이야기다. 석·박사나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면, 금방 몰입해서 읽게될 거다. 미국 유학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들은 어떻게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가?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 「지배받는 지배자」


# 지배받는 지배자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고안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층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가 계층이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궁극적인 힘은 '돈'에서 나온다.


저자는 이 개념을 약간 뒤튼다. 그리고 미국 유학파에게 적용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유학파들은 "지식인의 글로벌 계층화에서 미국 대학의 지식인들보다 열등한 위치를 점하지만 한국의 국내 학위자들보다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존재다.


유학파들은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교과서를 저술한 '대가'로부터 배우고, 풍부한 실험 장비를 기반으로 자유롭게 실험을 한다. 다양한 전문가들과 경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벌을 획득하고, 이 과정에서 영어도 익힌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박사가 국내 박사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하지만 영어의 한계, 인종의 한계, 국적의 한계, 네트워크의 한계 등으로 인해 미국 유학파는 미국의 중심적인 지식인들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 미국 유학파는 미국의 주류가 되기 힘들다. 한국의 지식 사회를 지배하지만 미국 지식 사회로부터 지배를 받는 유학파. 그들은 지배받는 지배자다.


미국 대학은 얼마나 우월할까? 지표를 살펴보자.   


'14년 상해교통대가 발표한 글로벌 대학 순위. Top 20 대학 중 미국 대학이 16개다. 나머지는 영국(3), 스위스(1)다. '11년 국가별 SCI 논문 출판 순위다. 전체 논문 중 미국 22.5%(35.4만), 중국 10.3%(15.8만), 영국 6.4%(9.8만), 독일 6.1%(9.4만), 일본 5.0%(7.6만)로 상위 5개의 국가가 과반을 점유한다. 미국이 1등이다. 가장 많이 인용된 연구자,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등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이 1등이다.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을 압도한다.



# 한국 학계의 유학파



당신이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과정생이라고 가정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 당신은 학부 때 배웠던 교과서와 이론을 창조한 '대가'로부터 배운다. 중국, 인도, 프랑스 등 전세계의 똑똑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논쟁을 주고 받는다. 풍부한 실험장비, 넉넉한 연구비를 기반으로 독창성있는 연구를 마음껏 한다. 글로벌 학문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꼭 필요한 '영어 논문 작성'도 자연스러워진다. 뛰어난 학자들과의 네트워킹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벌도 취득한다. 하버드/스탠포드를 아는 사람이 서울대/연고대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저자에 따르면 학문적 권력 관계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학문 자본을 누가, 얼마나, 우수하게 생산하는 가에 달려"있다. 미국 명문대학 박사는 학문 자본 획득에 있어 국내 대학 박사보다 유리하다. 그리고 학문 자본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은 학계에서 더 높은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


교수직은 대부분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선호하는 최고의 위치다. 넉넉한 월급, 안정된 직장, 높은 사회적인 인정과 영향력,. 나는 교수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위도 대부분 동의한다.


국내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에서 유학파는 빛을 발한다. 교수 임용의 가장 큰 척도 중 하나는 '학술 논문 게제여부'다. 그런데 학술 논문도 급이 있다. "연구진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학술지는 주로 영어로 출판되며, 상위권 대학일수록 영어에 능숙하고 영어 논문을 작성할 수 있는 박사를 선호"하는 게 요즘 추세다. 세계적인 학술지에 게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당연히 "미국 학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유학파가 교수 임용 과정에서 유리하다.


높은 문화자본과 선진 학문으로 무장한 유학파. 그렇지만 일단 교수로 임용되고 나면 미국과는 다른 연구환경이 그들을 기다린다. 한국 학계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진다. 이는 한국 학계의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한국 대학은 미국 대학보다 본업인 '연구', 즉 지식 생산을 덜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교수 사회는 연구를 높이 쳐주지 않는다. 연구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아니니, 좋은 연구가 나올 확률이 적다. 또 학벌, 성별에 따른 파벌화, 정치화도 심하다. 실력이아닌 정치력 등 외적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 게다가 교육, 행정등 연구 외 '잡일'도 많다. 하루종일 연구에만 몰입해도 획기적인 결과물 창출이 담보되지 않는데, 연구에 집중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이다.


게다가 지식 생산의 중심인 미국으로부터 물리적/심리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최신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건 남의 얘기다. 한때 큰 꿈을 품었던 유학파들은,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의 연구 센터에서 생상되는 지식을 빨리 국내에 도입하여 선점하는 것"에 그치게 된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분야가 없기 때문에 외국의 첨단 연구에 주목"하는 것이다.


유학파는 한국 학계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여전히 미국 학계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 지배받는 지배자인 그들.


# 한국 기업의 유학파


유학파는 글로벌 기업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 글로벌 기업이 꽤 있다. 글로벌 기업의 특징은 사업이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적이라는 거다. 그러니 전세계가 선호하는 제품을 기획/생산하거나 숨겨진 거래처를 발굴해낼 수 있는 인력을 필요로 한다. 글로벌 기업은 '글로벌 인재'를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글로벌 인재를 찾는 상황에서 미국 학위 소지자들은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갖지 못한 코즈모폴리탄 자본을 가짐으로써 위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이들 유학파들의 진정한 장점은 "지식의 내용 자체 보다는 이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영어), 적극적인 태도, 문제 해결 방식"이다. 즉, 영어와 네트워크가 유학파의 힘이다.


영어는 "기업의 해외 진출, 신사업 진출, 중요한 결정과 관련하여 외국 정보를 수집하고 여러 다른 소스를 통해 정보를 구하는 것"을 도와주는, "다른 직원들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언어자본"이다.


게다가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미국 대학 동문은 정보를 공유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네트워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싱가폴의 동문 A, 프랑스의 동문 B, 보스턴의 동문 C.


유학파는 외국의 최신 논문/정보에 접근이 용이하다. 뽑아내는 보고서의 품질이 당연히 높다.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국가와 산업의 정보를 보다 쉽게 알아낸다. 영어로 발표하고 계약을 따내는 능력도 있다. 유학으로 획득한 문화자본을 토대로 유학파는 글로벌 기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한국에만 있어서는 여간 익히기 어려운 것들이다. 유학파들은 학계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에서도 잘나간다.


#이외에도


이 책은 '질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 저자는 15년에 걸쳐서 유학생과 교류한다. 그들의 인생 궤적을 좇는다. 그리고 이 책은 유학생의 생생한 인터뷰와 사회학자의 냉철한 분석이 가득하다.


이 브런치 글에는 한국의 학계와 기업으로 돌아온 유학파의 이야기만 써놨다. 그것도 간략하게. 그렇지만 책에는 (1) 미국 유학 동기, (2) 미국 유학 일상/경험, (3) 한국 대학 교수 임용 과정과 연구 환경, (4) 미국 대학에서의 교수 생활, (5) 미국 기업에서의 직장 생활이 구체적으로 쓰여있다.


유학이나 학문의 길을 고려한다면 읽어볼만 하다. 해외 글로벌 기업 취업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도 읽을만 하다. 특히 유학생들의 인터뷰가 정말 흥미롭다. 약간의 우월감-미묘한 열등감을 동시에 느끼는 그들. 정말 재밌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책을 쓴 이유다. 그는 "학벌 사회의 피라미드에서 꼭짓점에 위치한 엘리트 지식인 집단의 탄생에 대한 이해로부터 한국 대학과 학계의 모순을 해체하고 그 체제를 재구성하는 단초"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이를 통해 "최고 지식 엘리트들의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드러냄으로써 지식인 계층의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권력 관계 재편을 상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국 박사, 너네가 마냥 잘난 것만은 아니야',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저자는 미국 박사다.







3. 그래서, 미국 박사가 얼마나 잘나가는데


책을 보며 아쉬웠던 게 하나 있다. 미국 박사들의 영향력은 대강 잘 알겠다. 그런데 그 영향력은 구체적으로 어느정도일까?


가령 주요 학회의 학회장/주요 대학 교수/주요 연구기관장/글로벌 기업 CEO의 미국 박사 비율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지배자'라는 '헤게모니적 위치'가 더 잘 드러났을텐데.


그래서 내가 뽑아봤다. 몇개 대학, 학과의 미국 박사 현황을.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중앙대학교, 충북대학교를 찾아봤다. 사회적 인식을 고려해서 이 4개 대학을 뽑았다.


우리 사회는 위치를 기반으로 수도권 대학 - 지방 대학을 나눈다. 그리고 수도권 주요 대학으로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를 꼽는다. 지방 주요 대학으로는 지역거점 국립대학교를 꼽는다. 각 서열을 대표하는 수도권 대학으로 서울-서강-중앙대를, 지방 대학으로 충북대를 뽑았다.


학과는 경제학과, 철학과, 물리학과, 전기전자공학과로 추렸다. 각 학과가 사회과학대학, 인문대학, 자연과학대학, 공학대학의 간판 학과라고 생각했다.


 4개 대학 4개 과의 대학 교수들의 박사 학위를 살펴봤다. 그리고 결과는 아래의 표와 같다.


'19 11.29~12.3 기준 / 각 대학 홈페이지 '한국인 전임 교수' 대상 / 박사학위 정보 없는 경우 제외


미국 박사 비율은 학과별로 차이가 난다. 우선 문과를 보자.


경제학과는 미국 박사 비율이 압도적이다. 서울-서강대의 미국 박사 비율은 90%를 넘는다. 중앙대는 모두 미국 박사다. 4개 대학 경제학과 교수 중 미국 박사 비율은 94%이다. 엄청나다.


철학과는 좀 다르다. 미국 박사가 과반인 대학이 없다. 국적도 꽤 다양하다. 독일, 프랑스, 중국, 대만, 이태리 박사가 있다. 특히 독일 박사가 9명이다. 미국 박사 11명에 근접한다. 칸트, 헤겔 등 쟁쟁한 철학자를 배출한 독일 철학의 힘일까? 그래도 미국 박사 수가 제일 많다.


이과를 보자.


전기전자공학과다. 서울-서강대 교수 중 미국 박사는 70%에 달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국내 박사가 차지하고 있다. 미국 박사가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한국 박사가 나머지를 차지하는 형국이다. 그래도 미국 박사가 70%에 달하니, 꽤나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리학과다. 전기전자공학과보다는 낮다. 4개 대학의 미국 박사는 과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흥미로운 건, 서울-서강-중앙-충북대 순으로 미국 박사 비율이 줄어드는 점이다. (71%→57%→36%→23%) 대학 서열의 사회적 인식과 미국 박사의 취업 선호가 일치하는 걸까?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는 좀 더 넓은 표본을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합하자면, 한국 대학의 경우 미국 박사 비율은 철학과를 제외한다면 꽤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국내 박사가 계속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교수 중에는 미국 박사가 많다. ([인문/사회, 자연/공학 계열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 90년 : 1,698명 → 00년 : 4,153명 → 05년 : 5,650 → 10년 : 7,202 → 15년 : 9,404) 확실히 미국 박사가 힘이 쎄다.


4개 대학 교수 중 미국 박사 비율


여담인데, 미국 박사 비율이 철학과는 낮고 다른 학과는 높은 이유가 뭘까?


철학은 국가별로 사조가 구분된다. 프랑스 철학, 영미 철학, 독일 철학은 제각각의 '특수성'을 가진다. 국가별로 특수성이 인정된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거다. 그런데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은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추구한다. 보편적인 진리을 좇는다. '옳은 걸' 좇는다. 거칠게 표현하면 결승선이 확실한 달리기 경기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 최첨단 실험 장비와 풍부한 연구비 지원 등 연구 환경이 우수한 미국 대학의 경쟁력이 가장 뛰어난게 아닐까 싶다. 뛰어야 할 방향은 정해져있다. 잘 뛸 수 있도록 많이 지원하면, 지원 못받는 선수보다 더 잘 뛸 거다. 미국 박사는 이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더 많이 경험하고 배웠을 확률이 높다. 더 잘 뛰는 법을 안다는 것. 아주 거칠고 성급하고 편협한 생각이긴 하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전체 미국 유학생의 추이, 학과별 미국 박사 현황, 국내/해외 박사의 연간 논문 제게 건수, SCI 인용 건수 등을 알아내는 게 필요할 거다. 아직은 내 능력 밖이다.


이걸 찾으며 문득 든 생각이다. 심심하니까 별짓거리를 다 하는구나.





4. 내가 마주하는 지식이 객관적이라고?


오늘날 대부분의 학문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 자연을 기술하는 자연과학부터 사회를 분석하는 사회과학까지, 목표는 진리 추구다. 학문에는 고고한 이미지가 있다. 속세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와 연구자. 현실 세계의 권력 다툼과 분리되어 있는 고고한 학문과 지식.


그런데 학문의 목표가 진리 추구라는 것이, 학문의 결과물이 모두 진리라는걸 담보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문의 결과물, 즉 '지식'을 너무 쉽게 '진리'인 양 대한다. 고고한 그곳에서 생산해낸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현실의 무언가가 어긋나게 된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하기 전까지, 동성애는 정신병이었다. 전문가 집단은 (그들에 따르면)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동성애를 질병으로 규정했다. 동성애자들은 '공인된 정신병자'였다.


정신질환 목록인 DSM-II는 동성애를 '성격장애 및 기타 비정신증적 장애' 가운데 '성적 일탈'이라고 규정했다. 무엇인가가 질병이라고 규정된다면, 그건 '바뀌어야할 무언가'로 자리매김한다. 동성애를 이성애로 바꾸기 위한 강압적인 의료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성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상황이다. 전문가 집단이 모인 고고한 학문의 전당에서 창출해낸 '객관적'으로 보이는 진리, 지식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동성애 = 정신병'이라는 지식은 현실 세계의 동성애자들은 탄압하거나 차별하는 '정당한 근거'가 됐다. 추후 '동성애 = 정신병'은 폐기됐다. 그렇지만 '동성애 = 정신병'이라는 지식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동안, 꽤 많은 동성애자들이 다쳤다.


얼마 전 재밌는 기사를 봤다.

2019년 11월, 조선일보에 KAIST 경영대 이병태 교수가 쓴 글이 올라왔다. "대한민국에 경제 컨트롤 타워는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글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현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다. 비판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는 바로 'GDP갭'이다. 이병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GDP 갭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가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GDP갭을 대략 소개해보자면,

GDP갭은 '경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잠재적인 성장 가능성을 얼마나 달성했는지 판단하는 지표'다. (GDP 갭 = (실질 GDP-잠재GDP)/GDP)

GDP갭이 0보다 클수록 잠재력보다 '더 많이 성장'한 거고, 0보다 작을수록 잠재력보다 '더 적게 성장'한 것이다.


OECD 통계만 보면, 그의 주장이 맞다. 이병태 교수는 OECD 통계를 근거로 했다. 그런데 OECD만큼 공신력있는 IMF 통계는 조금 상반된 결과를 보여준다. 아래 그래프를 보자.  


IMF/OECD가 발표한 대한민국 GDP 갭 재구성


노란색 부분을 보자.


OECD(파란색 줄)에 따르면 GDP갭은 0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병태 교수 말이 맞다. 그런데 IMF는 다르다.


IMF(빨간색 줄)에 따르면 15년을 기점으로 18년까지 GDP 갭은 0에 가까워지고 있다. 잠재력을 회복하는 추세이다. OECD와 IMF의 GDP갭 통계는 상반된 해석을 낳는다. 지식의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현재의 경제 상황을 비판하고 싶은 사람은 OECD 통계만을 언급할 것이다. 마냥 옹호하고 싶은 사람은 IMF 통계를 언급할 거고. 그렇지만 두 통계를 모두 제시하고, 왜 이 차이가 나게 됐는지, 현실은 어디에 가까운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게 더 낫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게 안한다.


지식은 취사선택될 수 있다. 그리고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지식이 취사선택 됐는지 확인하는건 어렵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지식이지만, 결코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지식은 현실 세계와 독립된 고고한 학문 세계에서 생성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걸 이용하는 사람과 사회, 심지어 그 지식의 창조자들도 결코 완전하게 객관적이거나 불편향적인건 아니다.


게다가 돈과 권력이 있다면, 특정 목표와 방향성을 지닌 새로운 지식을 뽑아낼 수도 있다.


연구비를 지원하면, 몇 달 안에 '4차 산업혁명 대응책'의 당위성부터 경제적 효과까지, 다양한 지식을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은 4차 산업혁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현실의 정책과 법, 지원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식은 그 자체로 현실 세계를 바꾸거나, 적어도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내가 마주하는 지식은 완전히 객관적이지도, 현실과 동떨어져있지도 않다. 고고한 상아탑에서 생산되어 객관성과 불편향성을 뽐내는 그 지식은, 현실 세계에서는 자신에게 내재되고 의도된 파급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지식은 오히려 진리가 아니라 허구일 수 있다. 아니면 반은 허구, 반은 진리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나는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할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바보가 되는 것 같다.






5. 결론


학문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볼만 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하는가, 한국에서 공부해야 하는가. 학문의 헤게모니는 누가 잡고 있으며 지식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더 넓은 세상에서 먼저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책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이 책은 저자가 기획하고 있는 지식 3부작의 2번째 책이다. 1권은 「지민의 탄생」, 2권은 「지배받는 지배자」, 3권은 「하이브리드 한의학」이다. 저자는 '지식과 권력'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나는 「하이브리드 한의학」를 읽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나는 오래전부터 기획했던 '지식과 권력' 3부작을 완성했다. 이 3부작은 '지식과 권력'이라는 큰 주제 아래 사회학자로서 끈질기게 추적하여 완수하고 싶었던 연구들이다"


'지식'에 미친 사람이구나 싶었다. 멋있었다. 왜 이런 사람이 멋있게 느껴지는지 원... 억만장자가 멋있어야 본받으려고 노력이라도 할텐데. 재테크도 하고..


전작인 「지민의 탄생」은 큰 감흥은 없었다. 그 책은 '한국의 지식과 권력'에 대한 책인데 푸코, 부르디외로부터 겉핧기지만 미리 배웠다. 조금 뻔한 내용도 있고 해서.. 그런데 「지배받는 지배자」는 획기적으로 재밌었다. 「하이브리드 한의학」도 혁신적으로 재밌고 새롭다. 어쩌면 그 책으로 글을 쓰게 될수도..


세상의 어두운 부분에 지식이라는 등불을 밝히고 싶은 한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이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다. 앞으로 내가 마주하는 지식과 진리의 타당성을 잘 살펴봐야겠다.



[참고문헌]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 현황 - 대한민국 통계청

[이병태의 경제 돌직구] 대한민국에 경제 컨트롤 타워는 있습니까? - 조선일보(2019.11.4)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 - 피터 콘래드(후마니타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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