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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Jan 02. 2020

뇌가 멈추면 나는 뭘까?

뇌과학자의 뇌졸중:「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질 볼트 테일러

과학 서적인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를 읽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 책에는 젊은 뇌과학자가 겪은 뇌졸중과 그 극복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 글의 구성

<1> 뇌졸중, 흔하지만 치명적인
<2>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3> '나 다움'이란 뭘까?
<4> '나 다움'을 찾는게 왜 어려울까?
<5> 결론



1. 뇌졸중, 흔하지만 치명적인


뇌졸중 때문에 쓰러졌다는 소식. 그래서 생명이 위급하거나 치명적인 장애가 발생했다는 소식.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려주지 않고 급습하는 게 바로 뇌졸중이다. 뇌졸중은 뇌에 피가 공급되지 않거나, 뇌 안에서 출혈이 일어남에 따라 뇌 기능을 상실하는 질환이다.  말 못하거나, 운동 못하거나, 감정 못 느끼거나, 그렇게 되는 병. 무섭다.


우리나라에서 뇌졸중은 증가 추세다. 아래는 국립중앙의료원의 통계 조사다. 연도별 환자가 4년전에 비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취약해지는 점을 고려하면, 고령화 추세인 한국 사회에 더 많은 환자가 생겨날 것이다.



뇌졸중 관련 의료 비용도 증가하고 있다. 국민건강 보험공단 통계다. 뇌졸중으로 인해 발생하는 직접 비용 2015년 1.6조에 달한다. 뇌졸중 환자 수와 관련 비용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뇌졸중은 앞으로 더 흔해질거다.


오늘의 책은 뇌졸중으로 인한 뇌 기능 상실을 겪은, 젊은 뇌과학자가 썼다. 3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을 겪은 그녀. 하버드 대학 소속 연구원으로 촉망받던 뇌과학자였다.


그녀는 뇌질환을 겪은 환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뇌과학을 공부한 학자의 입장에서 뇌졸중을 묘사해 나간다. 좌뇌를 잃는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회복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등등. 그녀는 TIME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뇌졸중을 겪은 수많은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뇌질환 환자 본인이나, 주변 가족 혹은 친구가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서점을 돌다가 표지가 예뻐서 열어보게 됐다. 뇌과학에 적지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뇌과학자가 자신이 겪은 뇌졸중을 쓴 책인걸 보고 흥미가 동해서 바로 샀다. 내 주위의 누군가가 이 질환을 겪기 전에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용구는 색체 + 볼드체


# 어느날 갑자기 들어닥친


저자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인디애나 의과대학에서 신경해부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뇌과학을 연구하던 그녀. 그러나 37살의 나이에,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추락하는 경험을 했다. 뇌졸중이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극복해낸 그녀는 뇌졸중으로 고통받는 70만 명의 미국인들과 그들의 유족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을 읽고 단 한명이라도 뇌졸중의 침투를 미리 알애채고 제때 도움을 청하길 원한다면서 말이다.


뇌졸중이 닥치면 어떻게 될까?


# 뇌과학자에게 뇌졸중이


그녀는 뇌졸중을 이렇게 묘사한다. 몸이 분리되는 것 같은 희한한 감각이 정신없이 밀어닥쳤다. 의식은 명료했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저절로 손과 팔이 앞뒤로 흔들렸다. 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뇌가 정보 처리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뇌졸중은 이성, 판단 등을 담당하는 그녀의 좌뇌를 공격했다. 이에 따라 언어와 순차적 처리 능력은 사라졌고, 이제까지 살았던 삶과 단절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바보가 됐다. 말 못하는건 물론, 몸 비트는 것 같은 작은 동작조차 어려워졌다. 숫자를 세지 못하게 됐으며, 과거와 미래라는 관념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생각 자체가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한다. 우뇌가 남아 있으니. 다만 그녀 나름대로 생각은 하는데, 그게 '언어화'되어서 표현되지 못하는 것. 안타까웠다.


이 지점에서 그녀가 대단하다 생각한 점이 있다. 도라이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직업 윤리에 엄청나게 충실한가 보다. 뇌졸중이 들이닥치 그 시점에서, 그녀는 이 뇌졸중 경험을 기회로 삼아서 인지능력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제대로 살펴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진리 탐구를 멈추지 않는 진정한 연구자.


# 회복 할 수 있다


좌뇌를 상실한 그녀. 그대로 좌절했다면 커리어는 끝났을 테고 이 책도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녀는 뇌의 가소성을 믿었다. 뇌의 가소성이란 '뇌가 경험에 의해 변화되는 능력'을 말한다. 뇌의 부를 잃었어도, 다른 부분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거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그녀는 8년 동안 뇌의 학습 및 기능을 꾸준히 향상시켰다. 2년 차에는 하버드 뇌조직 자원센터에서 파트센터로 복직했고, 7년차에는 인디애나 대학교 겸임 교수직도 맡게 되었다.


인간은 아기 때 일어서고, 움직이고, 말하는 법을 차근차근 배운다. 아기 때로 돌아간 그녀. 하루의 대부분을 손가락 하나 움직이거나, 숫자 세거는 연습을 하는 데 다 쓴다.10시간씩 자면서 소진한 체력을 보충한다. 그녀는 끈기있게 이걸 해낸다.


엄마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더 이상 그녀가 하버드 소속 박사가 아니라 다시 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4시간 내내 자식 곁에서 회복을 도왔다. 엄마의 사랑이란 이런건가 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날 그렇게 도와주실 거다.


그녀의 낙천성도 회복의 또 다른 축이었다. 그녀는 회복 기간 동안 불평하지 않았고, 회복하려는 시도에 응답해준 뇌에게 하루에도 수천 번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무한한 낙천성을 토대로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고통을 몸으로 겪는 것은 선택이 아니겠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인지적 결정이라고 말하며, 그녀는 담담히 극복해냈다.


# 이외에도


좌뇌를 상실했을 때 그녀가 겪은 험이 신비로워 보였다. 좌뇌를 상실하니, 우뇌가 지배한다. 우뇌는 평화와 사랑, 기쁨, 공감을 전담한다. 우뇌가 지배자가 됐을 때, 그녀는 평화로운 희열의 천국을 느꼈댄다. 그 평화로움이랄까, 마음의 안식이 얼마나 흡족했으면 왼쪽 뇌의 판단력이 없는 상황에서 발견한 평화로운 희열의 천국을 놔두고 굳이 혼란스러운 회복 과정을 선택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고 하니.


이 책에는 좌뇌를 상실한 사람이 경험하는 독특한 현상과 상실된 뇌 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써있다. 한 개인의 회복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구체적으로 써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 환자 자신의 무한한 낙천성과 긍정성이 주요했다. 그녀는 회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증거다.


큰 고통을 겪은 누군가가 회복했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 받는 자에게는 큰 힘이 다. 이 책은 힘을 준다.     






3. '나 다움'이란 뭘까?


뇌졸중은 아직 나와는 먼 얘기라고 느껴졌다. 그녀가 극복해내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주제는 바로 '나 다움'이다.


그녀의 물음은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줬다.

질 볼트 테일러(저자)는 이날 아침에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누구일까? 내 좌뇌가 파괴되었다면 오른쪽 나는 누구지?

그녀의 말대로 '나'라는 건 뭘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의 개인화가 '인간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에서 하나의 과제로 변형시키고, 개인에게 그 임무의 수행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우면서 법률상의 자율성을 확립'시켰다고 말한다. 근대화가 사회적 지위의 결정을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자기결정'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자기구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부과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현대 사회의 개인은 항상 '나 다워'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는 . 요즘 같은 시대에 '남들이 하니까 했다'라고 말하는 건 '나는 바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나'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는게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내주는 숙제이다.


타인에게 '너는 수많은 호모 사피엔스 중 한 명이고, 너의 능력이나 매력은 다른 호모 사피엔스크게 다른 게 없어'라고 진지하게 얘기하는건, 무지막지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보다 그의 정신 상태에 가하는 타격이 훨씬 크다.


그런데 나는 '나 다운 것'이 뭔지 모르겠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나 답게' 사는게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그렇게 '특별하고 구별되는' 존재인가? 꼭 그래야 하는가? 답을 못 내리겠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좀 들여다 봤다. 이유를 써보려고 한다. 왜 '나 다움'을 못 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다.






4. '나 다움'을 찾는게 왜 어려울까


# 생물학적 한계


나는 내 뇌다. 바꿔말하면, 뇌가 나를 결정한다. 1800년 후반, 피니어스 게이지라는 25살의 남성이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철도공사 감독일을 했었는데, 성실하고 영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정받은 젊은 청년이다.


그러다 비극이 닥쳤다. 철도 부설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가 잘못 폭발해서 1m짜리 철 막대가 그의 뇌 속을 관통했다. 그는 두개골과 뇌 손상을 입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고, 4개월 후 원래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복귀한 그 좀 달라졌다. 책임감 있던 그는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게 됐다. 정직했던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거짓말이 늘었다. 동료들이 '원래 알던 게이지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변했다.


그는 '게이지'가 맞다. 다만 사고 후에 '뇌의 일부, 구체적으로 전전두엽'을 다쳤을 뿐이다. 전전두엽은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가 아작났다. 그러자 그는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쟁이가 됐다. 그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고, 뇌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보는게 맞다.


극단적인 사례겠지만, 뇌과학이 발전해갈수록 인류는 '뇌' '정신' 좌지우지하는 걸 발견했다.

정신병도 개인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의 배선 구조가 '정신병에 잘 걸리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 됐다. 정치적 선호, 가령 진보, 보수선택하는 것 조차'뇌 구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내가 '나의 의지'로 살 수 없고, '뇌의 의지'로 살고있는 수많은 호모 사피엔스 중 한 명이라면, '나 다움'이라는게 과연 있는건지 의뭉스럽게 된다. 왜냐하면 '뇌의 의지'는 '나의 의지'가 아니고, 따라서 '나 다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나의 뇌는 '나 다움'을 발견하고, 혹은 발견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뇌'는 아마 '나 다움'이라는 걸 끊임없이 비판하고 도전하는 걸로 프로그래밍 된 게 아닐까.


# 언어의 한계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 말했다. 한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가치관을 형성하고, 행동하는 토대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언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언어는 이 땅에 살던 누군가가 먼저 만들어 사회적 구성물이다. '언어'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가 경험하는 '세상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에스키모라고도 불리는 이누이트족은 '눈'을 표현하는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다. 흘러내리는 눈, 쌓인 눈, 바람에 흩날리는 눈, 바람에 휩쓸려 크게 된 눈 등을 표현하는 각각의 단어가 있다. 그들은 '눈'의 세부적인 차이를 구분해내는 다양한 언어를 가 있다. '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누이트족은 남반구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상을 가진다.


양자를  원자 상태의 세상만 보인다. 적외선을 모면 가시광선의 세상만 보인다. 내가 보유한 언 담아내지 못하는 게 이 세상에는 아직도 많을 거다.


나의 언어와 사고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세상과 나 스스로를 인지하고 판단함에 있어 한계에 직면한다.


언어와 사고 항구적인 결함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나 다움'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 계급적 한계


부르디외가 창안한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있다. 지속적인 사회적 체험을 통해서 육화된, '구조화된 무의식 성향'을 뜻한다.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과 뽕짝을 즐기는 사람. 무제한 삼겹살집을  사고급 호텔에서 한 접시에 몇 만원하는 손톱만한 음식을 즐기 사람. 부르디외는 그들의 취향과 선호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게 아니라, 그들이 태어난 가정의 경제 자본(자산/소득)과 문화 자본(학력/교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한 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그가 위치한 사회적 조건에 의해 큰 틀에서 결정된다는 것.


내가 책보고 글쓰는 걸 좋아하게 된 건, 어릴 때부터 '책방 나들이'를 자주 기 때문아닐까. 내가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구분하고 클래식을 즐길 수 있는 건,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음악하는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게 된다. 내가 지금의 나인건, 나의 노력이나 의지보다는 내가 태어나고 위치하게된 사회적 환경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이 구조에 다른 누군가를 갖다놨을 때,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만들어진다면, '나 다움'이라는 건 뭘까?


삼성전자 회장인 이재용은 이재용이어서 이재용이 된 게 아니라, 이건희의 아들이어서 이재용이 됐다. 그의 노력이나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개인의 계급이랄까, 계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면, 사회적인 조건이 결정적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다움'보다 '내가 위치한 환경 다움'이 더 적절한 말이 아닐까.


# 나의 정신세계


나는 개신교도이다. 내가 믿는 은 '나에게 언제나 능력주시고 복 주시고 사랑 주시는' 신약의 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큰 틀에서 결정하고 언제든 힘들게 할 수 있고, 벌 줄 수 있는' 구약의 이다.


이 신 앞에서 나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자아와 능력을 내세우는 건, 절대자 앞에서 부질없 거. 오히려 교만하고 오만다. '나 다움'은 스스로의 운명을 통제하고 기획해나가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나는 본질적으로 '운명' 같은 걸 믿는지라, '나 다움'을 믿기가 힘들다.


2020년 1월 1일 신년예배에서 뽑은 성경구절이 대박이다. 아, 이게 운명인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내가 '지금의 나'인 건, 신 덕택이다. 이러니 무슨 '나 다움'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가?


# 그럼에도


렇지만 나는 '나 다움'을 결정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나'인정한다. 말장난일수도 있긴 한데, '나 다움'을 정의내리고 확신하지 못하는 특징이 '나 다운'거라고 생각해본다.


평생을 '나 다움'을 찾을듯 하다. 못 찾아도 할 수 없고, 찾으면 좋고. 크게 나쁜 짓 안하고 소소한 목표 이뤄가면서 살다보면 운명의 길로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고난의 길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냥 재밌고 행복하게..






5. 결론


'나 다움'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만든 책이다. 너무 동떨어진 주제를 생각하는건가 싶기도 하다. 근데 책을 어떻게 읽는지는 독자 마음이니까....


뇌졸중은 앞으로 더 흔해질 거다. 미리 알아아도 나쁠 없다. '뇌'의 역할을 생생히 보여주는 책이다. 과학책이기도 하고, 철학책이기도 하고, 자기계발서이기도 하고, 그런 것 같다.


저자의 '낙천성' 감명깊다. 이런 '낙천성'을 가지고 전파하면서 살고 싶다. 신체적인 고통을 겪는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는 책일 것이다.


잘 읽었다.



[참고자료]

연도별 뇌졸중 환자 수 - 보건복지부 국립중앙의료원('19)

Storke Fact Sheet in Korea 2018 - 대한뇌졸중학회 역학연구회('18)

액체근대 - 지그문트 바우만('05)

색채의 연상 - 조영수('18)

취향의 정치학 - 홍성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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