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심해의 취미생활 Jul 22. 2020

오만한 좌파, 오만한 우파

철학자의 '오만함' 분석 -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마이클 린치

#오만한 좌파와 오만한 우파


재밌는 운전 격언을 들었었다. 운전자 중 상당수가 '나보다 빠르면 미친놈, 느리면 멍청한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그럴싸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배움의 깊이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자신한다. 오히려 지식이 얕을수록, 스스로의 역량을 더 높이 평가한다. 아래 그림은 심리학자인 더닝, 크루거가 발견한 확신과 지적 능력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더닝-크루거 곡선


학자들은 종종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개인'을 상정한다. 그런데 '판단의 타당성'을 매일 따지고 드는 사람은 무지 괴로울 거다. 인간 뇌는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행동과 판단을 확신할 수 없다면, 신경증 걸리고 우울해진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문제가 있다. 자기중심적인 본능 때문에, 인간은 본인의 행동과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힘들어한다. 충분한 근거와 확증 없이도, 무언가를 쉽사리 믿는다. 반대되는 의견은 '멍청한 소리'라고 매도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오만'해지기 쉽다.


영어판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번역본은 메디치미디어에서 6월 24일 출판됐음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 교수인 마이클 린치는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라는 책에서 '오만함'을 말한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 사회의 정치적 대립은 극에 달했다. 좌파와 우파는 서로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되려 제거하고 개종해야 할 악마로 인식한다. 마이클 린치 교수는 '오만함'을 원인으로 꼽는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오만함'을 다룬다.  


남일 같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대가리 깨졌다'고 말하는 게 우리 사회다. 호기심이 느껴졌고, 재밌게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오만함'이라는 태도가, 공동체를 확실하게 파멸로 이끈다는 걸 배웠다. 이 미국인 교수가 말하는 오만함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박스 안은 인용구


오만함의 특징 : 너한테 배울 건 하나도 없다


예의 없음과 달리 지적 오만함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믿음 모두와 관련이 있다. 지적 오만함에 병적으로 시달릴 때 우리는 다른 누구에게도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세계관은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을 경청함으로써 더 나아질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를 진리의 대표자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모든 걸 잘 알고 있고, 다른 의견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가끔, 인터넷에서는 항상, 우리는 오만한 사람을 맞닥뜨린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아는 게' 아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것들을 '믿는다'. 과학과 사실이 본인 생각과 반대된다고 치자. 합리적인 인간은 본인 생각을 버린다. 오만한 인간은 과학과 사실을 버린다. 되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남으로부터 배울 건 없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하다.


물론 오만한 사람들도 종종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같은 의견'을 빠른 속도로 흡수한다. 자신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오만함에 잠식되면, 그 사람은 극단화되기 쉽다.


몇년 전, 세월호 추모식에서 오뎅 먹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월호 탑승객의 죽음을 '오뎅탕'으로 희화화했다.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다. '오뎅 먹는 행위'가 잘못됐다는 여러 인류학적, 사회학적, 윤리학적 의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같은 신념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은 확신을 가졌다. 나는 그들이 장난삼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믿었을 거다. 그들은 남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오만함의 특징 : 누군가를 경멸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멸하는 대상과 타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치와 중첩되는 합의점을 모색하지도, 자신의 아이들이 그들과 어울리기를 바라지도, 저녁 만찬 파티에서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지도, 그들이 위협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서지도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위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만함의 쌍생아는 경멸이고, 경멸은 한번 빠지면 돌이키기 쉽지 않은 태도다. 분노, 심지어 울화는 한번 느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무언가를 경멸하게 되면, 그 구멍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저자는 오만이 경멸을 낳는다고 말한다. 경멸에 이르는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처음에는 반대 의견으로부터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의견만 계속 듣고, 확신을 강화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본인은 진리와 선이고, 상대방은 거짓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 빠진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보기에 상대방은 무식하다. 헛소리만 찍찍 내뱉는다. 가끔 옳지 않은 소리를 하면 악마로 느껴지기 까지 한다. 누군가가 멍청하고, 악독하며, 도무지 개선될 여지도 없다고 느껴지면, 경멸하지 않는 게 더 어렵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저자는 미국 사회에 경멸이 넘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도 경멸이 가득하다. 경멸은 비물질적인 것이기에, 수치나 통계를 제시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는 누군가를 쉽고 빠르게 경멸한다. 좌파는 우파를, 우파는 좌파를 경멸한다.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경멸한다. 누군가를 '무슨무슨 충'으로, 누군가를 '대가리 깨진 X'으로 지칭한다.  


경멸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경멸스러운 상대방과 동등하고 진중한 관계를 맺는건 불가능하다.  경멸은 숨기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이다. 상대방도 그걸 금세 깨닫는다. 상대방도 경멸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경멸한다. 여기에 소통과 합의는 없다.


이렇게 되면 힘 쎄고 목소리 큰 놈이 승자다. 약한 놈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때가 되면 깊숙히 찌른다. 쎈 놈은 약한 놈으로 격하된다. 그래도 복수를 계획하고, 기회가 되면 상대방을 다시 끌어내린다. 이 과정은 반복된다. 경멸은 공존과 공생을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만들고, 지배-피지배 관계만을 잉태한다.  


오만함의 특징 :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자아 정체성은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의 상호작용에 세 번째 요인이 더해져서 결정된다. 그 요인은 내가 마음을 쏟는 대상, 나의 가치, 가장 깊이 전념하는 어떤 것이다. 무언가에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것이 번창할 때 내가 번창하고, 그것이 위축될 때 내가 고통을 받을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을 쏟는 대상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유형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우리는 확신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이를 위해 기꺼이 온갖 희생을 감수하려 한다. 때로는 불리한 증거를 아전인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이나 논리 자체를 거스르는 결과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자아 정체성과 직결된 확신에 우리 삶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만함이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한 개인의 확신과 판단을 한꺼풀 벗겨보면, 그곳에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 가치관과 세계관에 연결된 확신과 판단은 단시간 내에 뒤집어지지 않는다. 팩트의 객관성, 타당성과 무관할 수도 있다.   


500년 전, 갈릴레오는 지구가 돈다는 걸 '증명했다'. 그런데 당대의 신부들은 우주가 돈다고 '믿었다'. 신부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바꿀 수 없었다. 기독교적 우주론에 따르면, 지구는 정지해 있다. 그들은 우주가 움직이고 지구는 정지해 있다는 걸 '믿어야만' 했을 거다. 설사 지구가 도는걸 눈으로 '봤어도', '믿음'은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간은 쉽게 오만하게 된다.  정체성이 엮여있다면, 반대 의견을 듣는 건 괴롭고 불쾌하다. 진실된 반대 의견을 수용하려면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꿔야 하는데, 이거 고통스럽고 힘들다.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합리적인 판단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시민을 요구한다. 시민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만 본인이 틀릴 수 있음을 인지하며, 반대 의견도 잘 들어야 한다.


시민들이 오만해진다면, 사회는 극단화된다.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경멸과 지배만 남는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작동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정기적인 선거와 선출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갈등과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오만함의 특징만 정리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1) 인터넷 환경과 오만함의 확산, (2) 민주적 덕목인 확신과 오만함의 차이, (3) 오만함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과정, (4)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 등이 기술되어 있다.


시의적절한 주제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다만 오만함 확산의 방지 전략은 조금 추상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철학 교수다. 그에게 공학적, 사회학적, 경제학적 해법까지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 나 자신의 태도를 많이 반성하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이 미국 작가는 시종일관 말한다. 오만함과 갈등이 미국 사회를 좀먹는다고 말이다. 한국 사회도 갈등하면 어디가서 안 꿀린다. 궁금해서 통계를 찾아봤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수치만 보면, 미국이 차라리 낫다.





#해결되지 않는 수많은 갈등


우리 사회는 갈등 해결을 잘 못한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지수'가 이걸 잘 보여준다. 사회통합지수는 (1) 사회적 포용 영역, (2) 사회적 자본 영역, (3) 사회이동 영역, (4) 사회갈등과 관리 영역 지표로 구성된다.


그중 사회 갈등과 관리 영역을 눈여겨볼만 하다. 이 지표는 '정부의 문제 해결 능력과 민주주의, 노사분규의 파급력과 진행양상, 자살률 등'을 포함한다. 사회적 갈등 해결이 원만한지 유추할 수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은 30개 국가를 측정했다. 아래 그림은 우리나라의 지표별 순위다.


사회통합지수 개발 연구 - 보건사회연구원('16)


'사회적 포용' 지표는 조사연도마다 꼴지다. 종합지수도 꾸준히 29위이며, 사회갈등과 관리 지표도 꾸준히 악화되고 있다. 그냥 모든 지표가 '최하위권'이다. 사회적 갈등이 빡세다는 걸 증명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하나의 의견만 말하는 게 더 위험하다. 통합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소수자를 억압하고 다양성을 없앤다. 이러면 사회가 발전이 없고 빡빡해진다.


그렇지만 갈등의 끝에는 합의가 필요하다. 갈등의 종착지에 경멸과 대립만이 남으면, 그건 잠재적 전쟁 상태에 불과하다. 일이 잘 되려면, 싸움 이후에 화해와 약속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익숙치가 않다. 


딴 나라 얘기 갖고오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스웨덴이 이걸 꽤 잘한다. '연대임금정책'이 대표적이다. 성공회대 교수 신정완에 따르면 연대임금정책은 "노동자가 고용된 산업이나 기업의 수익성 및 임금지불능력 수준에 관계없이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이 지급"되도록 하는 정책이다.


누군가가 자동차 산업에 종사한다고 치자. 그가 현대차에 근무하든 현대차 협력사에 근무하든, 임금 격차가 너무 커지지는 않게 하겠다는 거다. 대기업 노조의 양보, 중소기업 사용자의 양보 없이는 이 정책이 불가능하다. 정부의 개입 없이 노동자 집단과 사용자 집단이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 소비에트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몇십 년 전 얘기가 아니다. 


2014년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박사 손혜경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12년 당시 스웨덴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70%이며, 임금협약 적용률은 90%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2019년 노조 조직률은 10%대에 불과하다.


이 정책의 타당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나라 구성원들은 '생계'가 걸린 '직장과 임금' 영역에서 '합의와 협상'을 한다는 게 인상깊다는 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상호이해와 양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스웨덴 사람이 특출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닐거다. 20세기 초, 이 나라의 노동운동은 전투적이었다. 유혈사태가 빈번했으며, 1905년에는 전국 단위 대규모 파업이 8개월간 지속됐다. 말이 8개월이지, 이거 엄청 긴 시간이다. 이 사람들도 엄청 싸웠다. 자본가는 노조를, 노조는 자본가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1930년 사민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노사간 협상이 시작했다. 협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신뢰도 자라났다. 사회보장제도가 구축됨에 따라, 노동자도 예전보다 실직을 덜 부담스럽게 느끼게 됐다. 자본가들도 기꺼이 세금을 냈다. 그후로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때로는 잔잔한, 때로는 극심한 갈등이 있었고, 합의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이걸 100년을 했다. 그리고 큰틀에서 '사회적 신뢰'라는 걸 구축했다.


우리나라는 민주화 된 지 30년도 안됐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신뢰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적 신뢰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들끼리 지지고 볶는 과정을 100년 동안 겪은 유럽과 일직선상에서 비교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도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사회적 타협 경험을 축적해나간 유럽 국가와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 100년 전 그들이 예상했던 미래와, 지금 우리가 전망하는 미래의 결이 다르다. 2020년 현재, 자본주의는 저성장-제로섬 국면에 들어갔다. 반면 1900년대 초중반, 자본주의는 고성장-포지티브섬 국면이었다.


우리는 미래가 지금보다 어려울 거라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최대 한도로 쟁여놓는게 중요하다. 양보와 타협은 어렵다. 인간의 뇌 구조가 그렇다.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촉발하는 호르몬은 덜 나온다. 단기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더 나온다.


단순히 개인적 관계에서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사회 전체가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는 더욱 더 이민을 제한하고, 더욱 더 무역의 문을 닫는다.  국경 안에서도 본인의 지위를 침범하는 다른 집단에게 날을 세운다. 디트로이트의 저학력 백인 노동자 집단은, 엘리트 자본가를 욕하기보다는 멕시코 출신 이민자 집단을 비난한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사회는 다를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뽕이라면 국뽕인데, 근거는 있다. 한국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자를 내쫓고, 옳다고 생각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20세기에 이렇게 한 나라가 잘 없다. 21세기에는 더 없다. 일본처럼 모른 체 입을 닫고 있지도 않고, 프랑스처럼 남 생각 안하고 방종하지도 않다. 하여간 뭔가 다이나믹이 있다.


책 재밌게 읽었고, 오만해지지 말아야 겠다.



[참고자료]

스웨덴 연대임금 정책의 정착과정과 한국에서 노동자 연대 강화의 길 - 신정완('10)

스웨덴의 2013년 임금협약 결과와 향후 발전 과정 - 손혜경('14)

사회통합지수 개발 연구 - 보건사회연구원('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