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도 방학이 필요해

여름휴가 없는 직장인은 연차를 모아 방학을 만든다

by 심신


여름휴가가 따로 없으니, 연차를 모아 짧게나마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휴가’라는 말보다 ‘여름방학’이라는 말이 훨씬 제대로 쉬는 기분이 든다. 방학이라는 건 원래 수업을 쉬는 기간인데, 성인이 되고 보니 세상 모든 일이 배움의 연속이다. 좋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도 있지만,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하게 만드는 반면교사도 많다. 그래서 직장인의 방학은 잠시 배움의 현장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보내는 시간이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파주로 향했다. 파주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파주에 있는 책들은 늘 하루이틀 만에 우리 집에 도착한다. 지도를 보니 파주와 양산은 끝과 끝. 이렇게 먼 거리인데 택배가 이틀 만에 온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집에서 곧장 파주까지 갈 자신이 없어 신영집에 들러 하루 묵고 다음 날 함께 가기로 했다.


신영은 나를 극진히 대접해 줬다. 출근만으로도 피곤할 텐데, 새벽까지 이어진 신영 오마카세에 쉴새 없이 먹고 떠들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출근메이트 영상을 함께 보며, 내 망상 세계와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진지하게 논했다. 현실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니, 망상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준 신영 덕분에 마음껏 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푹 자고 파주 헤이리 마을로 갔다. 날씨가 더우니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폭염주의보 문자가 연달아 왔지만, 우리는 오로지 강된장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뜨거운 거리를 걸었다. 너무 더우면 찜질방에 들어섰을 때처럼 피부를 확 덮치는 따가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날이 최고 기온이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우리는 나이를 먹어서 땀이 많이 졌다고 자신을 탓했다.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마치 미국 공포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정갈한 거리, 쨍한 하늘, 그리고 영과 나. 여기서 너무 지나치게 친절하게 웃으며 다가오면 큰 일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땀을 콸콸 흘리며 식당에 들어서자,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폭염주의보 문자에 충실하게 실내에 잘 있었을 뿐이다.


파주에서의 시간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가보고 싶었던 서점에도 들르고, 어디서나 보이는 푸른 하늘 덕분에 머릿속 잡념이 절로 사라졌다. 그 무더운 날씨에 만 보 이상을 걸었다. 영은 “이 날씨에 만 보면 이만 보의 효과야”라고 말했다.


다음 날에는 서촌에 가서 오래 눈여겨봤던 문구점을 차례로 들렀다. 체감온도 38도의 날씨는 그야말로 야외 찜질방이었다. 몸에 모든 땀구멍이 개방되어 부지런히 땀을 흘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습도가 낮았다. 헐렁하게 걸어 다녔지만 하루가 알찼다. 신영은 직업 습관으로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 주었다. 신영의 반 어린이들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랄 것 같다.

민음사 「한 편 14호, 쉼」中

신영과 여행을 하면, ‘실수해도 괜찮다’라는 사실을 늘 다시 배운다. 이번 여행에서도 작은 실수들이 몇 번 있었지만, 괴로움이 아니라 웃음이 되어 에피소드가 됐다. 평소 같으면 아주 작은 실수에도 스스로에게 매몰차게 회초리를 들 텐데, 막상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가혹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또, 평소에 검열하고 삼켰던 말들을 마음껏 꺼내놓는다. 필터 없이 쏟아지는 말들은 대부분 내가 싫어하거나 불편했던 것들인데, 다른 사람에게 했다면 찝찝함과 죄책감이 남았을 것이다. 문득, 나는 왜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겠느냐는 생각이 스쳤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 것이라기보다, 지금의 나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어서였던 것 같다. 갑작스럽지만 지구지옥설을 또 한 번 맹신하게 된다.

이런 지옥에서 견딜 수 있었던 건 방학이 있어서다. 신영과 떠날 다음 방학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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