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와 번아웃

둘 다 괴롭다

by 심신


현대인의 고질병인 번아웃은 누구도 피하기 어렵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제때 관리해야 하지만, 일이 바쁘다 보니 자기 돌봄은 늘 뒤로 미뤄졌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결국 지난 6월, 번아웃이 제대로 왔다.


만사가 다 귀찮았다. 밥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출근해서 일하는 것은 말해 뭐 해. 몸은 무겁고 정신은 멍해서 평소 하루 만에 끝내는 업무도 3~4일이 걸렸다. 내 상태가 어떻든 일은 계속해야 했고 자비란 없었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민원과 갈등은 숨이 막히고 발끝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상황은 변하지 않으니 내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일기를 쓰고 스트레칭을 했다. 스트레스 완화에 좋다는 산책과 독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시들시들하지만 집 안의 식물들은 시들지 않도록 물과 통풍을 챙겨주었다. 그러나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쳐서, 이런 행위들이 피곤하기만 했다. 두 달이 지나서 8월이 되자, 출근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이 모자라는 느낌. 죽을까 봐 두렵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막혀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날 어김 없이 아침 6시 알람에 일어났다. 하루가 막 시작되었는데 지겨웠다. 집에 있어도 집에 있고 싶었다.


숨이 막히는 증상은 자기 전에만 나타나다가 시간이 흐르자, 사무실에서도 반복됐다. 죽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고 이성적인 판단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평소 같으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을 텐데, 생각이 고장 나버리니 통제할 수 없는 영역까지도 내 탓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남 탓을 할 수도,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내 탓이든 남 탓이든 과해지는 순간 이상해진다. 결국엔 ‘그냥 내가 없어지는 게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까?’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치닫게 되었다.


8월 어느 주말 오후였던 것 같다. 거실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데 문득 몇 년 전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김연수 작가님의『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계시받은 것처럼 떠올랐다. 책을 펼쳤는데 첫 문장부터 와닿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미래를 희망하기보다 종말론 같은 말들이 더 많았지만, 결국 지나고 보니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소설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지금 현실이 버겁고 미래가 어둡게만 느껴져도, 먼 훗날 돌아보면 맥주잔을 기울이며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형체 없는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라 여겼던 것들이 시시하게 보였다. 불안은 결국 형체가 없는 것이었다.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뿐인데 그 크기는 크게 줄어 있었다.


물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해서 상황이 수월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너무나도 나였고 답답한 사무실의 공기는 조금도 상쾌하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여전히 나를 지치게 하는 말과 행동을 성실히 이어갔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힘을 주고 해결하기보다 힘을 풀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는다. 이것이 체념인지 해탈인지는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봐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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