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으로 써낸 일기가 심은 마음
처음으로 일기를 쓴 건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여느 초등학생들처럼 개학하기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한 달 간의 일기를 몰아썼다. 조그마한 손으로 연필을 쥔 나는, 마감을 앞둔 작가처럼 눈 뜬 순간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 선풍기 앞에서 땀을 말려가며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여름방학을 주로 집에서 홀로 보내다 보니 일기의 소재가 될 만한 일들이 많지 않았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으니 일상 이야기를 적어냈다. 수박을 많이 먹어서 밤에 화장실을 자주 갔다거나, 모기가 모기장을 뚫고 들어왔다거나, 또 어떤 날에는 모기에 에프킬라를 뿌려 죽였다거나, 잠자리를 잡으러 간 일도 일기에 모조리 써냈다. 때로는 다라이(빨간 대야)에서 물놀이를 했다거나 텃밭의 방울토마토를 따 먹은 이야기, 우렁차게 우는 매미를 관찰했던 날까지. 도무지 쓸 게 없다 싶었던 어느 날에는 양치하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우려먹기도 했다. 소재는 비슷했지만 아침, 점심, 저녁의 시제만 바꾸어가며 어떻게든 하루의 칸을 채웠다.
내용이 부실하다 생각했던 날에는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반복되는 내용의 일기들은 너무 연속되지 않도록 방학의 중간 날짜로 배치해서 조금 흩어놓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쯤이면 선생님이 집중력이 떨어지실 거라는 계산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독자인 선생님의 반응까지 고려해가며 한 달 치 일기를 몰아썼던 그 때의 나는, 생각보다 꽤 머리를 쓰고 있었다.
뜨거운 8월의 공기, 켜도 더운 선풍기의 바람, 맴맴 울어대는 매미 소리, 오후 세 시쯤 먹던 삶은 옥수수와 수박, 설탕에 절인 토마토와 우유에 말아 먹던 코코볼. 그리고 온종일 일기를 쓰고 그림까지 그리느라 오른손 중지에 생긴 굳은살까지. 나의 초등학교 2학년 여름의 장면은 여름방학 일기와 함께 그렇게 남았다.
개학 날, 굳은살과 땀으로 쓴 일기장 두 권을 선생님께 제출했다. 반듯하게 쓴 글씨와 빽빽한 그림들을 보고 선생님은 내게 칭찬을 해 주셨다. 그 칭찬은 교과서에 글씨를 쓸 때에도, 청소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 '경찰과 도둑' 게임을 할 때에도 내게 맴돌았다. 더 반듯하게 글씨를 쓰고, 더 씩씩하게 청소하고, 더 빠르게 뛰어다니도록. 땀과 굳은살로 써낸 여름방학 일기가 내게 글쓰기의 기쁨을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것 같다.
그 이듬해인 2002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아침 시간마다 '300자 일기 쓰기'를 시키셨다. 틈만 나면 밖에서 뛰어놀려고 하는 우리를 잘 간파하고 계셨던 선생님은 '300자 일기'를 다 쓰면 1교시 수업 전까지 운동장에 나가서 놀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셨다. 얼른 나가서 놀고 싶었던 나는 매일 보고 느꼈던 것들을 전부 일기로 써냈다.
학년이 오르면서 일기의 범위도 조금 넓어졌다. 일상만 써 냈던 일기에서, 보거나 들은 이야기까지 일기로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그 때문에 집에는 늘 동네 할머니들이 드나들었다. 어린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왜인지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녀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일기에 써넣었다. 학교에서 있던 이야기들보다 어떤 때에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날도 있었다.
한 달, 두 달 일기를 쓰다 보니 일기 쓰는 속도가 빨라져서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300자 일기 쓰기'를 처음 했던 때에는 보거나 들은 이야기만 쓰다가, 조금씩 내 생각도 함께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분기마다 일기를 책으로 만들어주신 덕분에 매일 아침 빨리 운동장으로 뛰쳐 나가려고 열심히 써낸 일기가 한 권씩 책이 되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 뿌듯함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선생님이 만들어준 책 표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꿈과 희망'이라는 제목이 있었고, 우리 반 친구들의 사진이 중간에 있었던 그 책.
그때 나의 방에는 TV나 컴퓨터가 없어서 심심하면 내가 썼던 일기로 만들어진 책을 꺼내 읽었다. 내가 쓴 일기인데도 읽을 때마다 광대와 배가 얼얼해질 때까지 웃었다. 웃겼던 부분은 반복해서 읽어도 또 웃겼다. 쓰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읽는 것도 재미있다는 점이 나를 더 쓰고 싶게, 더 잘 써내고 싶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해 5월과 11월에 '일기상'을 받았다. 상을 받으니 300자를 채우는 데 급급한 일기를 쓰기보다, 더 잘 쓰고 싶어져서 고민을 하며 써내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숙제였던 일기가 글쓰기의 기쁨을 알려주었다면, 3학년 때의 '300자 일기 쓰기'는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주었다.
그 때의 일기들이 만든 마음이 지금까지 꿈틀대면서 나를 한 자라도 더 쓰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거창한 일이 없는 하루라도 나의 이야기를 쓰게 하고, 훗날 스스로 그 이야기들을 읽고 웃을 수 있게 하는 일기 쓰기의 힘. 사소한 나라도 기록하겠다는 마음을 심어준 그 작은 손의 시간들이 지금 내 속에서 꿈틀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