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

사원 시무 이야기 4

by 이리

휴대용 시디플레이어가 드디어 멈췄다.

처음에는 LCD 창이 먹통이 되면서부터였다.

몇 주 전부터 서서히 불안 불안하다가 오늘 아침에 긴 생을 마감했다.

출근길에 전람회의 졸업 시디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시디만 헛돌고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원 출판사의 가장 큰 장점은 월급을 제때 주는 것과 야근이 없는 것이다.

퇴근하자마자 은행으로 달려가 월급을 남김없이 뽑아 들고 아이팟을 샀다.


괜찮아! 시디플레이어가 고장 나서 그래!

새로운 것을 살 때면 괜히 사치를 하지 않을까 마음이 무겁다.

인터넷으로 가격대를 검색하고 주변에 사용 평을 물어보며 소비의 정당성을 스스로 확인해야 안심이다.

마침 첫 월급도 받았겠다, 모든 서사가 완벽하다.

새로운 mp3 플레이어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꽂았다.


전람회는 노래한다. 언제 만났었는지 이제는 헤어져야 하네.

천천히 걸으며 삼청동 거리를 바라본다.

가로수는 잎이 많이 떨어졌다.

좁은 인도에는 혼자 다니는 사람보다

여럿이 다니는 사람이 많고 압도적으로 연인 사이가 많아 보인다.

카페며 음식점 네온사인을 반짝이고 메뉴판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몇몇의 커플은 메뉴판 앞에서 저녁을 고민한다.

시계를 보니 7시.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더 높게 보이고 더 크게 보였지.

이어폰에서는 전람회의 첫사랑이 시작된다.

앞서 메뉴판을 보던 연인이 갑자기 다툰다.

“아까 그 집에서 들어갔으면 벌써 먹었겠다”

여자는 작게 소리를 질렀고 남자는 달랜다.

저렇게까지 화를 내도 되는 건가, 시무는 부러웠다.

상대방이 받아줄 거라는 믿음, 아마 그런 게 없었다.

화를 내도 되는지도 몰랐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저녁, 전에 없던 서늘한 바람이 분다.

시무는 이번 주에는 체크 선배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닫아버리고, 문자를 쓴다.

문장을 몇 번 수정하고 ‘전송’했다.

바람은 그치고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시무는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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